신의 예정 : the plan of GOD PROLOGUE 매끈한 아스팔트가 아닌 울퉁불퉁 콘크리트, 그것도 언덕길은 확실히 힘들다. 그러나 예서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주위 풍경 때문에 그것조차도 즐거웠다.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길옆에 마구잡이로 자란 이름 모를 잡풀들은 어른들이 간혹 아이들을 가리켜 ‘장마 뒤 외 자라듯 한다.’ 하던 말씀을 기꺼운 마음으로 수긍케 했다. 딱 맞는 말이었다. 여름의 열기 속에서 눈에 보이듯 쑥쑥 자랐다. 그렇게 매일 매일이 달랐다. “하하하. 힘찬아. 형 간다!!!” 달리다 딴 짓하기를 예사로 하는 힘찬이 옆을 예서가 휙 지나치자, 그새 다리 하나를 들고 싱싱한 여름 풀잎에 찔끔거리던 힘찬이의 귀가 실룩거렸다. “멍멍.” 약이 올라 발을 동동 구르며 꾸짖듯 야무지게 짖는 힘찬이의 소리를 들으며 예서는 씩씩하게 웃었다. 그러나 곧 허리를 숙이고 자전거에서 몸을 일으켜 힘차게 페달을 밟는 예서 옆을 힘찬이 녀석이 활공을 하듯 그 짧은 네 다리를 쭉쭉 펴면서 내달렸다. 네 발로 뛰어야지 사람 품에 안겨 다니는 건 죽기보다 싫어하고, 가로수나 담벼락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주제에 차를 타면 멀미를 해 동네를 벗어난 적이 없는 힘찬이는 숨이 턱에 차 혀를 있는 대로 빼물고 헉헉거리면서도 속도를 늦추기는커녕 하얀 점이 될 때까지 힘차게 앞서 나갔다. 하긴 힘찬이 녀석은 이름처럼 태어날 때부터 남달랐던 놈이기는 하다. 한 배에서 난 여섯 형제 중 맏이인 힘찬이는 그 덩치가 다른 형제들보다 배는 컸다. 그리고 그만큼 많이도 먹었다. 오죽했으면 예서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힘찬이를 다른 형제들이 젖 먹을 동안 붙잡고 있었겠는가. 배밀이로 어미젖을 향해 발버둥치는 의지는 가히 그 이름값을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여하튼 그런 힘찬이의 극성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젖몸살을 하는 어미 때문에 힘찬이는 예서가 젖병을 물려서 키웠다. 그래서 힘찬이는 예서를 자신의 어미인줄 안다. 자신이 처음 눈을 떠 인지한 존재도, 젖을 먹을 때 맡던 냄새도 예서였으니까. “야!!!” 이른 새벽바람이 시원스레 예서의 얼굴을 치고 지나갔다. 그 상쾌한 바람은 머리와 함께 예서의 눈까지도 맑게 해 주었다. 예서는 자전거 핸들을 놓고 두 손을 높이 들어 있는 힘껏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자 앞서 달리던 힘찬이 녀석이 잠시 멈추어 서서 함께 소리를 높여주었다. 예서는 창백한 파란 하늘을 향해 활짝 웃었다. 멋진 하루다. 너무 이른 시간 때문일까. 아니면, 워낙 외진 곳이라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서일까. ‘한샘’에는 오늘도 역시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예서가 물통에 물을 가득 받자 차가운 기운과 함께 금세 굵은 이슬이 물통에 맺혔다. 뚜껑을 단단히 여민 후 예서는 두 손 가득 물을 받아 시원스레 얼굴을 씻었다. 예서가 집 근처 약수터를 마다하고 굳이 이곳으로 오는 이유는 단 하나다. 물맛 때문이 아니라, 이곳에 할아버지와의 남다른 추억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예서의 삼형제 중에서 유독 예서를 아끼시던 할아버지는 가끔 예서만을 데리고 이곳으로 산책 겸해서 나오곤 하셨고, 그 여러 번의 산책길에서 예서에게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을 주었다. 유난히 까만 밤하늘의 둥근 달이 얼마나 큰지, 그 달 아래 흐드러지게 핀 하얀 박꽃이 얼마나 단아한지, 새벽이 파란 것도, 파란 새벽의 하얀 입김이 얼마나 사람을 활기차게 하는가를 처음 알려주신 분이 할아버지였다. 길 위에서 예서는 하늘의 별을 세었고, 애기똥풀, 돼지풀, 강아지풀, 토끼풀 같은 들풀의 이름을 배웠다. 혹부리 영감의 이야기를 자장가 삼아 할아버지 등에서 잠이 들고, 예서는 그렇게 또 다른 세상을 보았다. 예서가 너무 어렸던 그 시간은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예서에게 빛바랜 영상을 남겼지만 왜인지 그만큼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손에 잡힐 듯 떠오르는 영상들은 맑은 새벽공기처럼 예서를 항상 설레게 했다. “힘찬아?” 예서는 티셔츠로 얼굴의 물기를 쓱쓱 닦으며 힘찬이를 불렀다. 둘레둘레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부산스러운 흰색 털 뭉텅이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자, 예서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혼잣소리를 내며 자전거에 물통을 실었다. 그리고 잠시 자전거에 기대어 예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은 파란 물이 뚝뚝 흘러내릴 것 같은 하늘은 아니지만, 흐릿한 색은 경쾌한 느낌은 아니더라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하긴 하늘이 만들어 내는 색치고 나빴던 적이 있었던가. 예서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힘찬아! 밥 먹으러 가자!!!” 힘찬이 녀석은 역시나 오늘도 ‘한샘’에 오자마자 쏜살같이 뒷산으로 사라지더니 예서가 자전거에 물통을 다 실을 때까지도, 그 후 한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따라 들쥐 마냥 온 산을 쑤시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대개 이쯤이면 호기심 많은 개구쟁이답게 흙투성이로 나타나곤 했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예서가 찾아 나서야 하나 보다. 힘찬이의 이름을 부르며 예서는 천천히 힘찬이가 올라간 길을 걸었다. 어차피 겁이 많은 녀석이라 그다지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힘찬아! 형 그냥 간다!!” 그런데 오늘은 꽤나 많이 올라왔건만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간 걸까. 예서는 낮게 혀를 차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번처럼 풀 뜯어먹고 토하면 이번에는 진짜 가만 안 둔다. 빨리 나와~! 집에 가자~!” “...............” 옹골차게 한 마디 외치고 예서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들리는 거라곤 낮은 새 소리와 바람결에 나부끼는 나뭇잎소리뿐, 주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이 자식, 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예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응? 뭐지?” 멈칫거리는 예서의 귀에 무슨 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그러나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그 어떤 소리도 없다. “이상하다.” 긴가민가하던 예서가 ‘혹시?’ 하는 마음에 험하고 인적이 드문 등산로 곁 샛길로 들어서자마자, 예서의 귀에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낑낑거리는 소리가 길에서도 한참 벗어난 곳에서, 그것도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들렸기에 예서는 더럭 겁이 났다. “힘찬이, 너 이 자식. 힘찬아!!” 힘찬이의 이름을 부르며 예서는 덤불숲을 헤치고 빠르게 소리 나는 방향으로 뛰었다. 칡넝쿨에, 머루넝쿨에, 길도 없는 곳이었다. 비가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발밑은 질척거렸고, 작년에 떨어진 단풍잎이 이제야 썩는 것인지 미끌미끌 물컹거리며 주르륵 미끄러졌다. “힘찬아!!!” 소리가 끊겨진 곳에서 힘찬이의 이름을 부르며 예서는 발을 동동 굴렀다. 모든 피가 발밑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싸한 소리를 내며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그 때였다. 발밑에서 희미하게 흙 파는 소리가 예서의 귀에 잡혔다. 바로 앞, 칡뿌리가 얼기설기 엉켜진 땅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예서가 허겁지겁 무릎을 꿇고 어렵사리 칡뿌리를 걷어내자 칡뿌리 아래 구덩이에서 흙투성이 힘찬이가 꼬리를 말고 예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네 이 놈! 이 형이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낑낑거리며 앞발을 들고, 애처롭게 귀를 내리고, 예서를 쳐다보는 힘찬이의 모양새에 예서에게서 안도의 한숨과 함께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마도 오늘 힘찬이 녀석이 새로운 영토 개척에 나섰던 모양이다. “꺼내 줄까~?” 예서의 말에 힘찬이는 대답하듯 길게 끙끙거렸고, 힘찬이의 그 처량하게 우는 소리에 예서는 활짝 웃으며 힘찬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예서가 그의 머리 위로 힘찬이를 높이 치켜들자, 그제야 안심이 된 모양이다. 힘찬이는 헤헤거리는 입 모양으로 꼬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예서는 명료한 소리로 밝게 웃었다. 그 때였다. 귀에 들어온 작은 인기척에 예서는 무심히 돌아섰다. 신의 예정 : the plan of GOD 똑. 똑. 느리게 그러나 선명하게 떨어지는 물소리는 동굴 안을 돌아다니며 을씨년스러운 소리를 만들었고 파닥거리는 모닥불은 동굴 이곳저곳에 음침한 그림자를 만들며 음산하게 흔들거렸다. 파란 입김의 싸늘한 공기는 한없는 추위를 몰아오며 모닥불의 힘이 전혀 못 미치는 동굴 천장의 짙은 어둠은 예서의 온몸을 지독히도 아프게 내리눌렀다. 퉁. 퉁. 예서는 자신을 옴짝 못하게 옭아매는 기둥에 이마를 찧으며 이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하려 애를 썼다. ‘이건 대체 뭐고, 저 놈은 대체 뭐냐?’ 본의 아니게 끌어안은 몸서리쳐질 만큼 차갑고 축축한 기둥만으로도 충분하건만,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척척하고 싸늘한 돌 위에 앉게 된 예서의 몸은 물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젖은 옷 때문에 하체부터 서서히 감각이 없어져갔다. 특히, 엉덩이는 무수한 바늘 끝으로 푹푹 찌르는 듯이 아프고, 똥구멍으로 숭숭 한기가 불어치듯 내장까지 추웠다. 들썩거려도, 똥구멍을 한껏 오므려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엉덩이가 동상 걸린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그 처음을 예서 자신이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예서는 눈물을 삼켰다. 다시금 묶인 손목을 이리저리 비틀어보다 예서는 곧 체념하듯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버지, 뭐하십니까? 지금 막내아들 사지로 끌려가는데?!!’ 이빨까지 덜덜 떨리는 추위 속에서, 목을 죄어오는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 속에서, 시간을 어림짐작할 수 없는 동굴 속에서, 예서는 자신이 얼마나 그렇게 끌려 다녔는지 모른다. 작고 낮은 뒷산에 어디 이런 동굴이 존재하고 있었던 걸까. 좁은 돌무더기 틈바구니 속의 무시무시한 동굴은 있는 대로 아가리를 벌리고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 삼키려는 거대한 괴물이었다. 처음과는 달리 조용히 남자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한껏 웅크린 몸은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 마냥 처량하다. 그리고 거기다 비까지 오면? 금상첨화겠지. 홀딱 젖은 예서는 두 말할 나위 없이 비 맞은 새끼고양이였다. 더불어 단단히 결박되어 있는 예서의 손목은 거친 마찰로 인해 한 꺼풀 벗겨져 그 붉은 속살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격렬한 저항의 흔적이다. ‘하아. 진짜 춥다.’ 그러나 남자는 경악하는 예서의 손목을 움켜쥔 후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앉은 이 순간까지 그 어떤 이유나 설명은 고사하고 말 한마디 없이 죽음과도 같은 침묵만을 고수했다. ‘엄마. 무서워.’ 그리고 모닥불 너머, 예서의 맞은편에 묵묵히 앉아 예서만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남자 때문에 예서는 숨소리조차 편히 내지 못하고 터져 나오려는 두려움을 속으로 꿀꺽 삼킬 뿐이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악물고 자신을 구해줄 사람을 기다리며 예서는 가족의 이름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간절히 불렀다. ‘왜? 뭐 때문에......?’ 다시금 묻고 싶은 말은 입 언저리만 맴돌 뿐, 나오지 않았다. 그저 나뭇가지를 등에 짊어지고 동굴 안으로 들어온 거하며,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걷는 걸음이나, 여하튼 그 모든 행동으로 보건대 아마도 남자는 처음부터 작정한 듯싶다는 거 뿐, 자세한 사항은 더 이상 모른다. 악다구니를 쓰며 물어도 대꾸 한 번 없으니 알 도리가 없다. 순간순간 우발적인 범죄가 아니라는 것만 확신할 뿐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눈물만이 앞을 가렸다. 정말 이대로 죽는 걸까. 극도의 공포로 인해 껄끄러운 예서의 입안은 바짝 타들어 갔고, 호흡은 점점 거칠어만 갔다. 그 때였다. 부스럭. 그렇게 무거운 침묵 속에서 너덜거리는 예서의 날카로운 신경이 균형을 잡기 힘들 때 즈음에서야 말은커녕 소리도 없이 마주 앉아서 예서를 사나운 눈초리로 쏘아보던 남자는 몸을 조금 움직여 등에 매고 있던 작은 보따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 꺼내든 것은 마른 육포였다. 을씨년스러운 불빛을 받아서인지 육포는 칙칙한 검붉은 색을 띄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칼로 작게 몇 조각을 떼어내 손에 쥐고 일어섰다. 천천히 예서에게 다가오는 남자는 탄탄하고 위협적인 장신이었다. 장신 특유의 구부정한 모습이 아니다. 노리고 있는 사냥감을 단번에 움켜쥐기 위해 몸을 낮추고 기회를 엿보는 듯한, 강인한 맹수의 잔인한 공격성이 엿보였다. 예서는 두려움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저기.......” 윤기가 흐르는 붉고 짙은 구릿빛의 피부는 불빛을 받아 무표정한 얼굴과 함께 사나운 인상을 주었다. 더불어 허리 부근까지 자란 검고 곧은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어 더욱 그 인상을 강하게 했다. 그럼에도 이상한 건 이렇듯 거친 모습 속에서도 희한하리만큼 절제된 고고함이 느껴진다는 거였다. 대체 정체가 뭘까. “그... 뭐냐 하면......” 예서가 남자에게서 위화감을 느끼는 건 이 이국적인 외모만이 아니었다. 남자의 옷차림이라는 게 너무도 괴이했다. 남자는 이마에 두른 띠의 귀 부근에 색색의 가죽 끈으로 섬세하게 엮은 장식품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고, 허리에는 굵고 투박한 가죽 허리띠와 여러 보석으로 세밀하게 세공된 단검을 차고 있었다. 그러나 그예 걸맞지 않게 옷이라고는 허리에 두르고 있는 짧은 천과 배꼽 위로 한 뺨은 너끈하게 올라간 소매 없는 윗옷뿐이었다. “하.하.하. 키가 상당히 크시네요.” 남자는 겁에 잔뜩 질린 예서를 잠시 서서 내려다보다 기둥 옆에 육포를 던졌다. 남자는 예서에게 그렇게 먹이를 주듯이 육포를 던지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금 예서를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지금 시위 하냐? 난 이거 먹고, 넌 나 잡아먹고? 얼마 전에 이 산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했는데. 혹시, 저 놈??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난 죽기 싫다고!!’ 예서는 배고픔은 느낄 수 없었으나, 남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묶여진 손으로 육포를 집으려 했다. 파랗게 질린 손은 예서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그러나 육포는 줍기가 영 수월치 않아 예서는 손가락에 겨우 걸치는 걸 죽을 힘을 다해 주워야만 했다. 겨우 손에 하나를 쥐고 여전히 예서를 쏘아보는 남자를 향해 예서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예서의 입술 끝은 심하게 경련이 일었다. 그 모습에 남자는 마침내 고개를 숙이고 칼로 육포를 잘게 잘라 자신의 입에 넣었다. 잡혀온 후 처음으로 예서는 남자의 시선에서 비켜났다. ‘흑. 이런 거 진짜 필요 없으니까, 이러지 말고 집에나 보내줘라!!’ 육포 특유의 냄새에 인상을 쓰면서도 예서는 그것을 입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육포는 예서가 기둥에 묶인 관계로 인해 요가를 하는 사람 마냥 몸을 있는 대로 꽈야 겨우 입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예서는 고개를 옆으로 틀고 육포의 역겨운 냄새를 참아가며 오물거리며 빨았다. 그것도 음식이라고 입안에서는 침이 돌았고, 급기야 턱을 타고 흘러내리기까지 했다. 그 추한 모습에,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예서는 코끝이 시큰했다. 동굴이 내는 음습한 소리만이 가득한 가운데 그렇게 두 사람은 묵묵히 먹었다. “...............?!!!”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말없이 육포를 먹던 남자가 거칠게 고개를 들었다. 그 거친 동작에, 가자미 눈으로 흘끔거리며 남자의 눈치를 보던 예서는 화들짝 경기를 일으켰다. 서로의 시선이 어지럽게 엉켰다. 예서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남자의 시선에 몸을 굳히고 고인 침을 삼켰다. 남자는 예서에게 벼린 칼날 같은 날카로운 시선을 주며,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유연하게 반 바퀴 돌려 허리에 차고 있던 집에 넣고, 천천히 일어섰다. 부드럽게 일어서는 그 동작과는 달리, 남자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성큼성큼 예서에게 다가왔다. 그런 남자의 움직임에 예서의 동공은 커질 대로 커졌고, 몸의 떨림이 확연히 겉으로 드러났다. 예서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려했다. 이게 최후의 만찬이었나 보다. 이유도 말하지 않고 끌고 와서는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이제야 드디어 없애버릴 생각이 들었나 싶은 게, 예서는 이대로 가만히 당할 수만은 없었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손목을 묶고 있는 넝쿨을 벗겨보려 애를 썼다. 예서는 손목에 가해지는 통증도 무시한 채 미친 듯이 손목을 비틀었다. “으. 흐흑.” 그러나 손목의 넝쿨은 꿈적도 하지 앉았다. 이를 악문 예서의 입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절망이 예서의 심장을 휩쓸었다. “뭐... 뭐....... 야....... 아악!!!!!!” 그리고 남자는 으르렁거리며 거칠게 예서의 뒤를 낚아채며 그 몸을 거침없이 더듬었다. 그러나 기둥에 묶인 예서로 인해 수월치가 않자 남자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내어 넝쿨을 단칼에 잘랐다. 그리고 바닥에 예서를 던지듯이 눕혔다. 칠흑같이 어둡고 끈적거리는 천장이 예서의 두 눈에 단숨에 박혔다. “너 뭐야?!!! 놔!!” 전혀 뜻밖의 행동에 놀라 굳은 것도 잠시 예서는 남자에 대한 무서움도 잊고 미친 듯이 저항하기 시작했다.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대로 다리를 버둥거렸다. 그러나 남자는 예서의 목소리가 동굴 안을 무섭게 울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서의 반항도 무시했다. 윗옷은 찢어져 너덜거렸고, 가슴과 배에서 어지럽게 방황하던 남자의 손이 심지어 예서의 앞섶까지 만졌다. “아악!!! 멈춰!!! 거기서 멈춰!!” 그 때였다. 예서의 눈에 남자가 잠시 전 집어던지듯이 자신의 머리맡에 놓아둔 검이 새파랗게 빛을 내며 번쩍거리는 것이 보였다. 남아있는 손은 하나다. 다른 손은 이미 남자의 손아귀에 단단히 잡혀 있어 도움은커녕 옴짝달싹도 못한다. 예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자신의 앞섶을 더듬는 남자의 크고 단단한 손을 뿌리치던 손을 들어 그 검을 집으려 했다. 예서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제발......” ‘제발 도와줘!!!!’ 예서는 손톱으로 바닥을 긁으며, 손을 있는 대로 뻗어 어떻게든 칼을 집으려 했다. 그러나 남자가 더 빨랐다. 예서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줄 알았건만 남자는 어느새 예서의 손끝에 닿던 칼을 멀찌감치 밀어내었다. 벼랑 끝 수세에 몰린 예서의 눈은 붉게 젖어들었고, 얼굴은 육체의 고통이 아닌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런 예서를 향해 남자는 으르렁거리며 예서의 상징을 터질 듯이 강하게 그러쥐었다. “........?!!!” 그 순간 예서의 저항은 멈췄고, 예서의 동공은 죽음보다 더한 공포로 커졌다. 남자는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예서의 바지 속으로 거칠 것 없이 자신의 손을 집어넣었다. 남자의 축축하고 뜨거운 손이 순식간에 예서의 상징을 움켜쥐고서야 남자는 멈췄다. “하아. 하아... 하아......” 이제 들리는 거라곤 음습하게 방울져 떨어지는 물소리와 예서의 거칠게 호흡하는 소리뿐이었다. 급격히 밀어닥치는 두려움은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예서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있었다. 두려움에 떠는 예서의 눈과 지독하게 가라앉은 남자의 시선이 엉켰다. “거... 짓말...... 너... 너 사내놈... 덮치는 변태였냐.....?” 무자비한 고통과 극도의 공포로 예서의 목소리는 잔뜩 눌려있었다. 그 소문의 살인자가 아닌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하나, 예서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을 향해 비릿하게 웃는 남자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예서의 시야는 어두워졌다. ‘오, 마이 갓. 이건 악몽이야. 깨어나야 해.’ 동굴 속에도 내가 있었다. 작은 내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 이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른다. 발목에 오던 물은 어느덧 무릎을 지나 허리춤에서 흐르게 된지도 이미 벌써 한참 전이다. 물길을 거스르는 그들로 인해 거칠게 동요하는 어두운 물은 지독히도 음침했고, 남자가 들고 있는 횃불은 기껏 예서와 남자 주위의 물만을 비출 뿐이었다. 그리고 예서는 남자의 그 강인한 뒷모습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커다란 좌절과 절망을 보았다. ‘아니야. 그런 건 없어.’ 예서는 고갯짓을 하며 맹금의 발톱처럼 뇌리에 아프게 파고드는 생각을 지우려 했지만, 그러나 그러기에는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쳤다. 한껏 물먹은 예서의 신발과 옷은 그런 예서의 몸을 끝없이 괴롭혔다. “......아픈데, 조금 천천히 가면 안 될까요?” 한 손에 횃불을 든 남자는 예서와 하나로 묶인 자신의 손에 힘을 주며 예서를 끌어당길 뿐, 뒤 한 번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남자는 거친 넝쿨로 인한 손목의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상처투성이인 예서의 손목에는 오일이 발라져 있다는 점이다. 손이 흔들릴 때마다 오일의 은은한 향은 동굴의 칙칙한 냄새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싱그러운 풀 냄새를 남겼다. 오일로 인해 마찰이 줄었다고는 하나, 손목을 넝쿨에서 빼낼 정도는 아니었다. 오일 덕분에 거친 넝쿨로부터 상처가 어느 정도 보호가 된다 해도, 이미 생긴 상처의 통증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그래요? 뭐, 바쁘면 할 수 없죠. 그런데 저기 저희 집은 이쪽이 아니거든요. 제 생각에는 저쪽 같은데.......... 요.” 뒤를 흘끔 돌아보며 말꼬리를 흐리는 예서의 힘없는 목소리에 남자의 어깨가 흠칫거린 것도 잠깐, 남자는 예서의 말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고 한결같은 걸음으로 단호하게 걸을 뿐이다. “네. 알겠습니다.” 깨어나 보니, 예서는 남자의 품안이었다. 남자는 예서에게 다정스레 팔베개까지 해주며, 곤히 잠들어 있었고, 그 사실을 인식한 순간 예서의 몸은 시체마냥 꼿꼿하게 경직되었다. 그 상태로 한동안 잠든 남자의 목울대만을 꼼짝 않고 눈만 끔벅이며 바라보던 예서는 잠시 후 그래도 조금 용기를 내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의 공기는 예서가 기절하듯 잠들기 전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남자의 품안에서 모닥불을 등지고 있어서인지, 기절하기 전에 느꼈던 오한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남자의 것이 분명한 얇은 모포와 남자의 체온은 예서의 몸에서 온기를 잡아 두기에 넉넉했다. 발이 견딜 수없이 시린 것만 빼면 말이다. 아마도 젖은 운동화를 계속 신고 있었던 탓일 것이다. 척척한 바닥임에도 이상하리만치 깔려진 모포에는 물기 하나 없이 쾌적했다. 예서는 남자에게서 조금이나마 떨어지려고 조심스럽게 다리를 접어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남자는 예서의 그 작은 몸짓에 뒤척였고, 예서는 놀라 턱을 당기며 숨을 멈췄다. 남자는 예서의 몸을 바싹 끌어안으며 예서의 머리에 자신의 얼굴을 묻곤 평온한 숨을 내쉬었다. 예서는 두려움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규칙적인 남자의 숨소리, 남자의 눅눅하고 뜨거운 숨기운 그리고 맨 살과 맨 살이 닿는 기묘한 느낌. 그 이상야릇한 느낌에 예서는 남자에게서 다시 벗어나려했건만, 그러나 잠결이라도 남자는 허용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다. 무슨 일이 있기에는 예서의 몸에 남자의 흔적이 없었다. 일이 있었다면 깨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왜 그 때 남자는 자신의 몸에 손을 대었을까. 철이 든 이 후 그 누구의 손길도 타보지 않은 곳이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남자의 체온만큼이나 그 때 닿았던 남자의 손길이 뇌리에 박혀 예서를 괴롭혔다. 예서의 눈에 차츰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를 사리물어 소리는 참을 수 있었지만, 어깨의 떨림까지는 막지 못했다. 서러운 눈물이 예서의 맑은 눈에서 방울져 떨어졌다. 예서는 자유로운 한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자신이 왜 끌려와야만 했는지, 이 남자는 누구인지, 사랑하는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는 있을까. 가슴속에 맺히는 응어리는 아픔을 동반하며 눈물을 떨어뜨렸지만 풀려지지는 않았다. ‘으으, 추워. 너무 춥다.’ 그리고 내는 어느새 그 크기를 어림짐작할 수 없는 커다란 물웅덩이로 변했다. 이미 넝마조각이 된 얇은 여름옷을 속살이 보일세라 추스르는 예서의 입술은 원래의 빛을 잃고 파랗게 죽어 있었다. 남자 앞에서 자신이 조신하게 몸가짐을 바로 할 줄은 예전에는 미처 상상도 못해본 일이다. 이 무슨 해괴한 변고인가. 이제 예서에게서 반항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지친 몸과 어두운 동굴 속의 시간은 예서로 하여금 모든 저항을 빼앗아간 것이다. 그렇게 죽음의 냄새마저도 풍기는 음습한 웅덩이를 지나자 이번에는 좁은 협곡이었다. 지금까지의 동굴이 빛을 잡아먹는 곳이었다면, 협곡은 조금 달랐다. 물론 동굴 천장에는 여전히 지독히도 짙은 어둠만이 존재했지만, 협곡은 작은 빛에도 태고의 신비를 수줍은 새색시 마냥 조심스레 드러내었다. 그 러나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정도의 좁은 협곡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빠른 물이 흐르고 있어 예서는 균형 잡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넘어지기가 일쑤였다. 더듬더듬 어렵게 걸음을 옮기지만, 그러나 험하고 익숙지 않은 길은 이내 사고를 불렀다. 그만 크게 발목이 접질리며 어긋난 것이다. “어... 어?!! 으악!!! 읍!!! 읍!!!” 예서는 급류에 휩쓸리며, 코와 입으로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켁!! 콜록!! 콜록!!” 다급하게 다가온 남자의 손에 의해 예서는 거칠게 일으켜 세워졌지만, 이미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급작스레 들어온 냉한 물 때문에 심하게 기침을 해야만 했다. “쿨룩. 쿨룩. 흑. 도대체 이게 뭐냐? 흑흑. 춥고 배고프지. 거기다 아프지. 옷을 너덜너덜하고. 쿨룩. 너 도대체 왜 날 이렇게 끌고 다니는 거냐?” 욱신거리는 발목은 제쳐두더라도, 코로 들어간 물 때문에 찡하게 울리는 머리와 턱턱 막히는 가슴으로 인해 예서는 서러웠다. 그런 예서의 등을 남자는 말없이 손을 들어 툭툭 치듯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런 남자의 행동에 흠칫 놀라는 예서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삽시간에 서느렇게 굳더니 이내 몸을 돌려 황급히 걷기 시작했다. 그런 남자 뒤를 예서는 잔기침을 하며 따라갔다. 그 후, 남자는 예전보다 조금 느슨한 걸음으로 걸었다. 그리고 예서는 힘에 부친 가파른 협곡을 몇 번이나 넘어지면서, 쩔뚝쩔뚝 아픈 다리를 끌고 물을 거슬려 올라갔다. 이제 물은 예서의 가슴에서 흐르고 있었다. 동굴에서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예서는 두려움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남자의 손에 죽기 전, 겁에 지레 질려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끝이었다. 끝은 있었다. 물론 주위는 전혀 분별할 수 없는 어두움뿐이었지만, 남자가 들고 있는 횃불로는 그저 예서와 남자의 주위만을 밝힐 뿐이었지만, 예서는 분명 끝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아프게 귀를 때리는 엄청난 물소리는 폭포인 듯 했다. 동굴이 무너져라 울리는 그 소리는 마치 동굴이 깨어나려고 몸부림치는 듯 강렬하고 비장하게 울렸다. 앞서 걷던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뒤돌아섰다. 무수히 엉키는 시선 속에서 잠시 두 사람은 묵묵히 서 있었다. 사실 빠르게 도는 주위의 물 때문에 예서는 두 발로 서 있기도 버거웠다. 남자는 예서를 향해 뭐라 나지막이 말을 내었지만, 주위의 물소리로 인해 예서의 귀에까지 다다르지는 못했다. 예서의 눈에는 그저 남자가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 사실을 남자도 인지한 듯 곧 입을 다물고 그저 온기를 가지고 있는 차가운 가슴으로 예서를 안았다. 굳어질 대로 굳어진 예서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예서의 젖은 머리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죽는 건가.’ 그 품에서 예서의 마음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죽음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었다. 깨닫지 못하는 사이 어느덧 예서에게 다가와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예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엄마. 미안. 정말 미안해. ........미안.’ 소리 없는 눈물만이 예서의 감긴 눈에 흘렀다. 예서의 눈물을 인식한 듯, 남자가 예서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곧 남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횃불을 버렸다. 지옥 같은 어두움과 동굴을 거침없이 울리는 물소리를 막아주는 건 이제 남자의 체온뿐이었다. “시... 싫어.........!!” 잠시 후, 예서의 발밑이 서서히 무너져 갔다. 본능적으로 버둥거리는 예서를 끌어안고, 남자는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남자는 예서를 부둥켜안고 예서의 입술을 찾아 빈틈없이 덮었다. 그러자 적은 공기나마 예서의 안으로 들어왔고, 예서는 상대가 누군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자가 주는 뜨거운 숨에 온 힘을 다해 매달렸다. 끊임없이 끌어당기는 물에게 잡혀 예서는 원초적인 공포와 함께 자신이 지금 살아있음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자신은 살아있기에 죽을 수 있는 존재였다. 예서는 희미해져가는 정신 속에 마지막 힘을 다해 눈을 떴다. “..........!!!”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물은 영롱한 빛의 향연을 베풀고 있었다. 예서와 남자 주위를 수많은 공기방울이 떠다니며 위를 향해 춤을 추고 있었고, 놀랍게도 예서와 남자는 그 공기방울을 따라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분명 몸이 주는 느낌은 ‘아래로’였지만 올라가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을 쳐다보며 예서는 서서히 정신을 놓았다. 오늘도 변함없이 호수 주위의 아름드리나무들은 호수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가지들은 잎사귀가 버거운지 호수를 향해 몸을 드리웠다. 마치 아낙네가 머리를 감는 형상이다. 자연스런 굴곡이라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그 둘레가 장정의 걸음으로 족히 두 시간은 넘게 걸리는 이 호수는 태양이 하늘을 점령하고 있을 때는 그 따사로운 빛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눈부시게 화사한 물결을 만들었고 수줍은 달들이 하늘에 떠 있을 때는 그 부드러운 빛에 감응이라도 하는 듯 영롱한 물결을 만들어내곤 했다. 천 년 전, 노예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이 호수는 완성되기까지 백 년이 걸렸다. 속히 훤히 들여다보이는 바닥에 깔린 하얗고 매끄러운 돌에서부터 작은 공기방울이 하나둘씩 흔들흔들 무겁고 느리게 올라와 물결의 여운 속에서 부드럽게 수면에 스며들었다. 성산(聖山) 인가(仁家)에서만 존재하는 성석(聖石)이다. 이 성석(聖石)은 물을 썩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성수(聖水)를 불러들인다. 황궁에서도 황제가 정무를 보는 홀과 황제의 거처에만 존재하는 성석(聖石)을 이같이 소유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황가(皇家)와 어깨를 겨루는 차빈가의 힘을 극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호숫가에 한 인형이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다. “..............” 호수 주위에는 바람의 짓궂은 손길로 인해 흔들리는 나뭇잎들의 소리와 찰랑거리는 작은 물소리뿐, 그 어떤 소리도 움직임도 없다. 바람은 차빈의 머리카락까지도 거침없이 흔들고 지나갔다. “Manahim.” 차빈 자신이 낸 말은 곧 차빈에게로 돌아와 묘한 감응을 불러 일으켰다. 간질거리는 그 감각은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달았다. 본성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모든 것을 풀어놓는 이곳에는 작은 정자가 하나 있다. 호수를 만들 때 함께 지어진 이 정자는 호수바닥까지 이어진 계단을 몸에 두르고 있어 얼핏 보면 소박한 새색시가 다소곳한 자태로 앉아있는 듯 보이나, 또 다른 성석(聖石) 시트린으로 만들어진 세밀하고 정교한 조각이 돋보이는 아홉 개의 기둥이 있어 결코 호락호락해 보이진 않는다. 언뜻 보면 단조롭고 고즈넉하기까지 한 호수 풍경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범인이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기운들이 조용히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그가 있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미친 듯이 뛰는 심장과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은 성큼 한 걸음만 내딛으면 되는 곳임에도 차빈 자신의 발을 단단히 묶어두었다. 자신만의 공간임에도, 어느 누구도 감히 자신의 허락 없이는 발을 내디딜 수조차 없는 자신만의 장소임에도, 마치 자신조차 가까이 할 수 없는 곳처럼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곳 마냥 느껴졌다. 차빈은 짐짓 그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자신의 뇌리를 움켜잡는 그 생각이 불쾌하다는 듯, 한 걸음 크게 내딛었다. 아홉 개의 돌로 된 징검다리. 고작 그 다리 하나 건넌 것뿐인데,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인해 차빈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간혹 힌두아와 심심파적으로 하던 드잡이에서도, 마힌과 검을 맞대어도 이 정도였던가. 모르겠다. 차빈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끝내 마지막은 멈칫하며 조심스런 발걸음이 되고 말았다. “Ah.” 아무것도 없는 정자 한 가운데, 야우크의 크고 푹신한 털 속에 푹 파묻혀 있는 예서를 보자, 작은 탄성이 절로 차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도드라져 보이는 매끄러운 몸의 실루엣이 부드럽게 구겨진 하얀 천과 더불어 차빈을 유혹했다. 천 아래의 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음을 차빈 자신이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기에 그 유혹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치 자못 컸다. 차빈은 숨소리조차 죽이며 예서 옆에 앉았다. 차빈 자신은 자신이 숨을 죽이고 있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예서는 자느라 그런 걸가. 조금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게 더욱 더 투명하게 보였다. ‘사람의 피부가 투명하다?’ 손을 대면 그대로 녹아 사라질 것 같다. 이 같은 피부는 차빈이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겠지. 예서의 이마에 흩트려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차빈의 손길은 떨리고 있었고, 얼굴은 설렘으로 조금 상기되었다. 차빈은 손가락 하나로 날카롭지도 꺾이지도 않은 예서의 콧날을 어루만지다 어색한 손길로 볼을 쓰다듬고 턱을 매만졌다. 망설이는 손끝으로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마른 입술을 축이며 몸을 숙이자, 달콤한 숨결이 차빈의 입술에 와 닿았다. 그 순간 차빈은 털컥 숨이 멎었고, 문득 동굴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혀를 굴려 육포를 먹던, 꿀을 바른 듯 침으로 촉촉하게 젖어가던 입술은 불빛을 받아 먹음직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처럼. 차빈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머금었다. “............!!!” 그러나 상상이외로 부드러운 그 감촉은 뇌리를 강타하는 충격으로 다가왔고, 차빈은 뻣뻣하게 굳었다. 당황한 차빈의 입술은 예서의 입술 위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 예서의 목으로 내려왔다. 그제야 차빈은 멈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차빈은 자신의 얼굴을 예서의 목에 묻으며 한껏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 달콤한 체향이 섞인 공기가 차빈 안으로 가득 들어왔다. 혀를 내밀어 살짝 핥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시원한 체온이 혀에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그 순간 차빈의 허리가 지끈거리고 목이 탔다. 그러나 차빈은 이런 자신을 남이 알아챌세라, 애써 얼굴의 감정을 지우며 나직이 숨을 삼켰다. 차빈은 덮치듯이 예서를 온몸으로 내리 누르고 있었지만, 자신의 체중을 싣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예서에게는 힘든 일정이었을 것이 분명하기에 곤히 자고 있는 예서를 깨울 생각은 없다. 차빈의 윤기 나는 긴 머리카락이 예서를 에워싸듯이 펼쳐졌다. “Manahim.” 그러나 갈증이 이는 듯, 목소리는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음의 울리는 소리를 따라 가라. 빛 아래서 처음 본 이가 너의 반려요, 생의 유일한 사람이니라. ‘신이 네게 준 자’니라.” 노망난 늙은 사제는 차빈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고, 그리고 그 신탁에 그 어떤 미사여구를 가져다대도, 그 소리인즉, 차빈 자신의 반려는 생에 있어 유일한 하나고, 남자며, 이계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신에게 저주받은 짐승마냥 모든 이들의 공포의 대상이 차빈이었다. 현 황제가 유난히 총애하던 동복누이의 아들이라는 것만으로도, 차빈가의 차기 수장이라는 것만으로도, 만인을 발아래 떨게 할 수 있는 존재가 또한 차빈이었건만 그 거침과 잔인함이 또 다른 의미에서 사람들을 두렵게 했다. 수려하고 시원한 이목구비에는 항상 서슬이 퍼런 사나운 기운이 감돌았고, 정제된 근육만이 붙어있는 강인하고 날렵한 몸은 날카롭게 벼린 칼날처럼 항시 서 있었다. 그러기에 차빈은 그 외모에도 그 포악한 성품과 뿜어내는 기운 탓에 호감은커녕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더불어 본인 스스로도 외모에 대한 자각 따윈 없었다. 남들에 대한 자각 또한 매한가지였다. 차빈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사람을 보고 ‘아름답다’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오직 말(馬)뿐이었다면 말 다한 거 아닐까. 그러니 지금 예서를 향해 느끼는 감정들은 차빈으로서는 난생 처음 겪는 너무도 생소한 것이었다. 몇 달 전, 그렇게 그런 차빈에게 ‘반려를 맞이하라.’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은 신탁이 떨어졌다. 물론 황족이나 귀족들은 태어나서 자신들의 추수기가 스무 번이 지나기 전 성인식을 치루는 것이, 그리고 신탁을 통해 평생의 반려를 맞이하는 것이 제국 이루의 오랜 관례다. 제국 이루에서는 밀의 추수를 끝으로 한 해가 가고 그 끝에서 인간은 나이를 먹었다. 때가 되면 그렇게 황족이나 귀족들은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하고, 때론 그 이상이기도 한 반려를 맞이하기에 차빈 자신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가 반려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다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차빈은 성인식을 치르기도 전이었다. 그런 차빈에게 신탁이 떨어진 것 자체가 놀랄 만한 일인데, 거기다가 오직 하나뿐인 반려가 남자인 경우는 제국 이루가 세워진 이래 처음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예가 없었다. 거기다 자신들이 경멸해 맞이하는 야만의 이계인이다. 제국 이루가 이 신탁 하나로 발칵 뒤집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계를 향한 차빈의 걸음은 자신의 반려라는 놈을 잡는 것이었다. 남들은 소나 양을 잡지만, 자신은 인간을 잡아 드리는 것이 아닌가. 차빈은 자신에게 최고의 신탁을 내려준 신에게 걸맞은 제물이라는 생각에 피식 웃으며 무수한 이들의 다채로운 시선을 뒤로 하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맑은 소리였다. 청명한 새벽에 어울리는 부드럽고 청랑한 소리는 여자들의 가는 목소리도, 거친 남자들의 탁하고 걸걸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아직은 어린 풋내가 물씬 풍기는, 그러나 청결한 느낌이 담뿍 담긴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다급하게 소리를 높여 반복하는 모양새로 보건대 분명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차빈은 그 목소리를 따라 숨을 숙이고 소리를 죽였다. 그 소리의 주인공은 곧 차빈의 눈에 띄었다. 개 한 마리를 번쩍 들고 무에 그리도 좋은지 아이는 선명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지막한 말소리에, 들썩이는 어깨에는 환한 웃음이 있었다. 차빈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목소리처럼 그렇게 깨끗한 웃음이 입가에도 있는지, 아이의 몸을 돌려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차빈이 미처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아이는 차빈의 기척을 느끼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 순간 차빈의 심장은 큰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아이의 말간 피부는 한없이 건강해 보였다. 단호함이 서린 살짝 다물어진 입술과 미숙한 냄새가 나는 몸은 가늘고 매끈한 선을 가지고 있었지만, 곧게 허리를 펴고 상대를 쳐다보는 흑요석 같은 검은 눈은 올곧고 당당했다. 당당했다. 그것이 아이에게서 처음 느낀 마음이었다. 그 순간 차빈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에서 땀이 배어나고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고, 아랫배가 묵직해 지고 허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 차빈은 자신의 이런 반응에 놀라 순간 굳어질 수밖에 없었고, 난생 처음 겪는 일이기에 차빈은 굳은 채로 눈도 돌리지 못하고 그렇게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다. ‘멋진 선택이군. 역시 신이란 건가. 이번에는 내가 빚을 졌는걸.’ 차빈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강경하게 저항하는 아이를 강제로 붙잡았다. 당연하지 싶으면서도 괜한 심술이 났다. 그래서 그만큼 거칠게 대했다. 그리고 그만큼 쑥스러웠다. 쑥스러워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그래서 감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생각도 못하면서도, 행동은 점점 난폭해졌다. 자신은 첫 눈에 알아보았는데, 어째서 이 아이는 자신을 못 알아보는 걸까. “Manahim.” 그래, 어째서? 차빈은 예서의 목에서 얼굴을 들었다. 차빈의 눈이 목을 지나 가지런한 쇄골로, 건강한 선을 그리고 있는 어깨로, 날씬한 팔로, 그리고 손목으로 옮겨갔다. 예서의 손목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차빈은 붕대가 감긴 예서의 손목을 자신의 손끝만을 이용해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혹여 아픈 손목에 부담이라도 줄세라, 그 손길은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Manahim.” 예서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입안이 달다. 차빈의 입에서 달큼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차빈은 거센 저항에 거친 식물의 넝쿨로 단단히 묶어 험하게 끌고 다녔다. 덕분에 손목뿐 아니라 크고 작은 상처들로 곧 그 어린 몸이 채워져 갔다. 그러나 자신에게 저항함이 괘씸해서 더욱 험하게 대했고, 모른 척했다. 차빈은 예서의 손을 잡고 그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 손을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칼을 쥐어 굳은 살이 단단하게 박힌 자신의 손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매끈하게 쭉 뻗은 손가락 끝의 단정한 손톱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었다. 차빈은 지금 당황스럽고 혼란스럽다. 누군가를 소중하다 느낀 적도, 누군가에게 미안하다 느낀 적도 없는 자신이다. 그래도 이 어색한 감정들이 싫지만은 않다. 미치도록 뛰는 심장만큼 좋다. 차빈은 예서의 몸을 덮고 있는 천을 아래로 치웠다. 잘 익은 살굿빛 유두를 입에 머금고 혀로 굴려 보기도 하고, 납작한 배를 어루만지면서 옆구리에 쓸어보기도 하며 예서를 맛보았다. 손끝까지 저릿한 그 느낌은 너무도 생소했지만, 그래도 그만 둘 수 없었다. 차빈은 예서의 몸을 덮고 있던 천을 조금 아래로 당기며, 예서의 배꼽을 혀로 지분거리다 백주 대낮에 훤하게 드러난 예서의 중심을 조심스레 쥐었다. 반뜻하니 잘생긴 물건이고, 분명 사내다. 사내의 성기를 보고 싶어서 자신이 안달하게 될 줄은 예전엔 미처 상상도 못한 차빈이다. 그러나 곧 머뭇거리는 자신이 못마땅했는지 차빈은 예서의 중심에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 손길에 그 동안 조금의 미동도 없던 예서가 뒤척였다. 덜컹 떨어지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차빈은 움찔했다. 그러나 곧 예서는 언제 뒤척였냐는 듯 잠잠해졌다. 낮게 안도하는 한숨이 차빈에게서 흘러나왔다. 차빈은 슬쩍 예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음미하듯이, 아직은 화사하고 농염한 과일향보다 여린 풀 내음이 나는 예서의 중심을 손바닥으로 쓸며 꺼칠한 예서의 음모를 만지작거렸다. 혐오감은커녕 견디기 버거운 본능이 스멀거리며 차빈 자신의 몸을 달구었다. 차빈은 지금처럼 동굴에서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예서의 체온을 품안 가득 느끼며 눈앞에 있는 존재가 차가운 그림자가 아닌 실체임을 그 순간 미치도록 느끼고 싶었고 으스러지도록 끌어안고 싶었다. 그건 순식간에 자신을 점령한 감정이었다. 그러나 예서는 차빈의 손길에 악을 쓰며 몸을 틀어 밀어낼 뿐이었다. 차빈은 그런 예서를 내리 누르며 옷을 벗겼고, 옷 속에 손을 집어넣어 예서의 물건을 한 순간에 움켜쥐었다. 손에 잡히는 그것의 형태를 확인하듯이 주물거리며 허벅지 중간까지 옷을 내리고 보니 분명 사내아이였다. 눈앞에 드러난 적나라한 예서의 모습을 보면서도 차빈은 혐오감은커녕 거리낌조차 들지 않았다. 미칠 듯한, 가슴 저릿한 흥분만이 있었다. 분명 사내였다. 비록 덜 여물어 보이긴 해도 말이다. 뭐 그건 그다지 차빈으로서는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예서는....... 그 때 차빈이 잠시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예서를 쳐다보았고, 예서는 그런 차빈을 보며 정신을 놓고 있었다. 차빈은 한참을 예서를 끌어안고 미친 듯이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Manahim. Rimeo dejisep. Reky kef todi rekuredily? (마나힘. 나의 그대. 어느 때까지 잘 생각이냐?)” 차빈은 나직이 속삭이며 예서의 발끝까지 덮인 천을 예서의 중심을 주물거리며 천천히 걷어 올렸다. 색깔이나 모양이 자신과는 천지차이다. 이것 가지고 제대로 사내구실을 할까. 사내구실이라, 뜬금없이 떠오르는 생각에 차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차빈 자신이 상대라면, 만족한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차빈의 한 손에 다 잡히는 매끄러운 발목, 거침없이 자신의 손에 감기는 종아리와 자신의 손에서 녹아내리는 단단하나 부드러운 허벅지 안쪽을 차빈은 손으로 입술로 맛보았다. “.............” 예서는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몇 번을 깜박거리고 나서야 흐릿하던 시야가 또렷해졌다. 물 먹은 솜 마냥 몸이 무겁다. “..........!!!” 그리고 찰나에 생소한 주위 풍경과 함께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만지는 감각이 예서의 뇌리에 단숨에 박혔다. 예서의 상징을 한 손에 그러쥐고 있는 크고 단단한 손이 너무도 선명하다. 그다. 화등잔 만해지는 예서의 눈과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예서의 얼굴. 예서는 차빈의 시선에서, 그 손길에서 벗어나고자 뻣뻣하게 굳은 상체를 일으켰다. 다리를 들어 있는 힘껏 차버리고 싶었지만, 차빈의 손아귀에 있는 분신의 안위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차빈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예서 자신을 한 손에 터뜨릴 것 같은 차빈의 크고 단단한 손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때까지도 차빈은 예서의 상징을 짓궂게 주물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사내놈 걸 만지고 싶으면, 네........ 네 놈 거나 만져. 내 건 사... 사양이다.” 몸을 덮으라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 전혀 제 구실을 못하고 있는 천을 예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끌어당겼다. 욕이라도 거나하게 퍼부어주고 싶지만, 혹여 예서의 말을 알아듣는 것은 아닐까 싶어 눈치껏 존대까지 하고 있는 마당이니 튀어 나올 리 만무하다. “좋은 말로..... 꿀꺽. 하..... 할 때... 흐익!! 어... 어디를 만지는... 거냐......?” 호기 있게 내뱉으려던 말은 더듬거리다 겁먹은 개가 꼬리를 감추듯 사그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차빈이 손을 거두었다. 예서의 말이 먹혔다기보다는, 차빈 스스로의 의지였다. 그러나 손은 여전히 스리슬쩍 툭툭 건드리며 예서의 그 주위를 맴돌았다. 깨어난 예서에게 있어서 차빈의 존재만큼이나 자신이 알몸인 것 또한 기절할 만큼 놀랄 일인데, 이건 또 뭐하자는 건가. 아무래도 죽일 생각 따위 없는 듯 보이는데, 도대체 왜 자신을 끌고 온 걸까. 왜 자신을 더듬고, 여기는 어딜까. 돌아갈 수는 있겠지? “아무거나 옷... 옷 좀 주세요. 하.하.하. 이거 홀딱 벗고 있으려니까 상당히 주눅 드는 게 민... 민망하고, 또... 사내놈이 훌러덩 벗고 있는 건 공해라서요. 그러니까 걸치는 건 아무 거라도, 그 구더기가 끓는 넝마라도 터... 털어 입으면 되니까, 좋습니다. 네... 그... 그럼요.” 그러나 차빈은 엉거주춤 몸을 뒤로 빼는 예서의 애원에도 묵묵부답, 그저 예서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아니다. 도리어 예서가 천으로 자신의 몸을 단단히 여미고 차빈의 손길을 피하려고 하자, 차빈은 예서의 허벅지에서 손을 때기는커녕 몸을 가리려고 하는 예서를 아주 못 마땅하게 노려보다 천을 훌러덩 낚아챘다. 순식간에 털을 몽땅 빼앗긴 닭 마냥 홀딱 벗겨진 예서는 황망하게 차빈을 쳐다보았다. 예서는 급한 대로 손으로 앞을 가렸다. 그런데, “Manahim.” 나직하고 나른한 목소리다. 목소리에서 농염한 색향이 묻어난다고나 할까. 목소리만으로 여러 여자 보냈겠다. 잠시 정신이 팔려 멍히 차빈을 바라보던 예서는 곧 기겁을 했다. 차빈의 손가락이 예서의 상징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예서에게서 헛숨이 터져 나왔다. 왜 이다지도 입에 담기도 민망한 곳을 침범하는지 모르겠다. “히익!! 이제 그... 그만 좀 해라니까!! 이 사... 상 변태 놈아! 그만 좀 주물럭거려!!! 여... 여기 있는 건 내 거라고. 네 게 아니고, 저... 절대 내 거요. 네 건 그... 그 밑에 잘 계시네요. 그러니까, 이제 하... 할 만큼 하... 한 것 같은데요. 여기서 뭐, 뭘 더 하려고요?!” 차빈의 손목을 잡고 예서는 덜덜 떨었다. 아무래도 홀딱 벗고 있는 것이 쥐약인지 사시나무 떨 듯 떨리는 몸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예서를 보는 차빈의 눈빛이 짙어졌다. 한없이 견고하고 강인해 보이는 상대 앞에서 벌거벗고 있는 것만으로도, 알 수 없는 장소라는 것만으로도, 끝없이 위축되는 예서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차빈을 뿌리치려 했으나, 그 손은 곧 차빈의 손에 의해 막혔다. 자신을 밀어내는 예서의 손목을 움켜진 차빈은 곧 자신의 손에서 힘을 빼며 예서의 손목에 입을 맞추었다. 예서가 통증으로 낮게 비명을 내질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붉은 혀로 살짝살짝 손목의 붕대를 핥는 차빈에게서 예서는 농후하게 풍기는 성적인 냄새를 선명하게 맡을 수 있었다.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지독히도 강인한 수컷의 향내다. 예서는 마른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수컷이 이런 향을 보란 듯이 뿜어내는 건 자신의 암컷이라 생각하는 존재 앞에서라는 걸 모를 사내도 있을까. 그리고 그 순간 차빈은 예서에게서 어린 암컷의 풋내를 맡고 있었다. 누런 하늘을 이고 있는 예서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떻게 된 뇌구조이기에 이 남자는 이 모양일까. “부... 부탁입니다.” 훤하게 드러난 체 가려지지 못한 예서의 하체는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다. 예서는 날카로운 차빈의 시선 때문이라도 떨림을 멈추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로 되지 않았다.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차빈의 시선이 엉클어진 예서의 머릿속을 온통 점령했다. 차빈을 바라보는 예서의 젖은 눈동자는 불안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감당하기 힘든 폭력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해지는지 예서는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어딘지 알 수 없는 장소에서, 아무 도움을 바랄 수 없는 곳에서, 안간힘을 낸 마지막 저항마저도 단번에 무용지물로 만들 것 같은 상대 앞에서, 예서는 자신의 연약함이 뼈에 사무치도록 아프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거운 침묵에 예서의 두려움이 한계에 다랄 즈음, 차빈은 예서를 향해 허스키하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차빈.” 무뚝뚝하나 나직한 목소리였다. “............” “차빈.” 차빈은 한결 낮은 음성으로 다시 한 번 더 예서에게 말했다. “.........” “차빈.” 예서를 똑바로 쳐다보는 눈이 곧다. 예서는 마른 침을 삼켰다. “차 ......빈....?” 점점 굳어가는 차빈의 얼굴을 보며 예서는 떨리는 음성을 겨우 목에서 밀어낼 수 있었다. 그러자 차빈의 표정이 적이 풀어지는 듯 보였다. “차빈.” “....차빈.” 예서가 정확한 목소리로 따라 하자 차빈은 그제야 살짝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 “...................” “....서이. ....예서. 그러니까 ....민예서입니다.” 어색하고 긴 침묵 속에서 예서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차빈 자신의 말에 대한 어떤 응답을 기다리는 듯 보였기에 예서는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소리는 메마르고 갈라져 있었다. 생각나는 건 이름뿐이었다. 그리고 ‘차빈’이 이름이고 지금 자신이 ‘소개받았다.’ 라는 것을 불현 듯 깨닫자 예서는 정색을 하며 납작 무릎을 꿇었다. 그 김에 차빈의 손아귀에서 예서는 은근슬쩍 자신의 손을 빼내었다. 다행이도 차빈은 자신의 손을 순순히 놓아주었다. 예서는 얼른 자신의 앞을 가리며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떠벌리기 시작했다. “저기... 서이... 그러니까 미... 민예서입니다. 나... 나이는 열여덟이고, 민가네 셋째죠. 다... 닭집 할아버지가 그렇게 불러요. 민가네 셋째라고요. 그 집 닭을 힘찬이 놈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서 조... 종종 시켜먹거든요. 뭐, 그 놈이 뭔들 안 좋아하겠습니까만요. 그래도 개중 특별히 좋아하죠. 힘찬이 아시죠? 그... 그 왜 보셨잖아요?” 말하는 게 숨이 차 잠시 한 뜸을 쉬는 사이, 예서는 씩 웃는 것을 잊지 않았다. 웃는 얼굴에 절대 침 못 뱉는다. 광명이 일 듯 찾아드는 확신에 고개까지 연신 끄덕이며 예서는 말을 이었다. 잘하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먼저 옷부터. “제 위로 혀... 형이 둘이 있는데요. 큰 형이 강이에 두... 둘째 형이 한이고요. 강이 형은 학생주제에 돈 좀 번다고 꽤나 거... 거들먹거리고 재수 털리게 없죠. 걸핏하면 바... 발부터 나가요. 그것도 안 보이는 데로만 자근자근 밟아서 사람을 아주... 골로 보내죠. 아침 안 먹는 게 무... 무슨 큰 대역죄라고 학교도 안 보내고... 통금은 또 어떻고요. 대체 8시가 뭡니까. 8시가. 중딩 때 한 번은 말이죠. 아, 그 때는 또 7시였습니다. 여자친구가 바라다 줬다는 거 아닙니까. 해 떨어졌는데 허락도 없이 애 끌고 다닌다고 걔한테 당장 집 앞까지 고이 모셔다 놓으라고 으름장에 성질은 있는 대로 부리고. 그때 9시도 안 됐다고요!! 쪽 팔려서 그냥 콱 구덩이 파고 드러누우려고 했단 말입니다. 사귄지 고작 한 달로 안 된 애였는데. 진짜 예뻤는데. 으악!! 지금도 그 때 생각만 하면 뒷골 땅기고 치가 떨립니다. 그럼요. 게다가 더 끔찍한 건요. 대딩인 그 인간. 자신의 통금을 9시로 정해놓았다는 거죠. 으허, 분명히 나한테도 강요할 텐데........ 에, 으.하.하.하. 죄... 죄송합니다!! 그... 하... 하여간 그 인간 좀팽이 주제에 또 속이 밴댕이라 잘 푸..... 풀지도 않아 절대 안 건드려요. 남들은 과.... 과묵하고 남자답다는데, 개뿔입니다. 아..... 암요.” 평소에 그렇게 말이 많은 예서가 아님에도 현기증이 날 만큼 아찔한 두려움은 수많은 말들의 홍수와 함께 더듬거리는 걸로 나타났다. “.............” 그러나 차빈은 예서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도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볼 뿐,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서는 간소화하기로 했다. “꿀떡. 저... 저기..... 서이... 입니다.” 그러나 차빈의 눈은 점점 가늘어졌고, 자신의 한 쪽 눈썹까지 올렸다. 덕분에 예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게 아닌가. “미... 민예서.” “...........” “예서.” 점점 치떠지는 차빈의 눈매에 예서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짧고 정확하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 그러나 아무 반응도 없는 차빈으로 인해 예서는 등에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더 말해야만 했다. “예서.” “......예서.” 그러자 차빈은 이해가 된 듯 고개를 작게 한 번 끄덕이며, 나지막이 예서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차빈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러나 곧 싸늘한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 “...................” 그 후 조용한 적막만이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떠돌았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떨구고 있던 예서는 발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저려와 평소 습관대로 침을 찍어 코에 발랐다. 그리고 무심결에 고개를 들다 차빈과 눈이 마주쳤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자신을 보는 차빈을 향해 예서는 그저 어색하게 손가락을 보이며 씩 웃었다. 웃자. 웃자. 웃자. 그러나 차빈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차빈은 예서의 얼굴에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물론 예서의 입장에서는 그런 차빈이 자신의 눈앞에서 속히 사라져 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뭐, 그것이 정 싫다면 다리에서 손 좀 치워 주거나(개 버릇 남 못 준다 했던가. 차빈은 예서의 무릎위에 턱하니 손을 올려놓고 다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무릎은 언제 세웠으며, 또 언제 그 사이에 예서는 들어가 있는 걸까. 코앞에 차빈은 한 쪽 무릎에 팔을 괴고 턱을 받친 상태에서 예서를 아주 흥미로운 짐승 보듯 보고 있었다.), 그것도 싫다면 차라리 차빈이 입을 열어 전후사정을 설명해 준다거나, 그도 아니면 예서 자신을 돌려보내 주거나. “예서.” “네? 네!” 차빈의 눈을 피하며 자신이 아는 육두문자를 총동원해 차빈을 향해 열심히 날리고 있던 예서는 차빈의 뜬금없는 부름에 경기를 하듯이 화들짝 놀랐다. “저... 기...” “예서.” “네!” 예서의 대답에 차빈의 한 쪽 눈썹이 올라갔다. “예서.” “....네.” “예서.” “.......네.” 정말이지 예서는 땅을 치며 엉엉 소리 내어 통곡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빈은 그런 예서를 아랑곳하지 않고, 예서의 대답을 듣는 족족 연이어 예서의 이름을 불렀다. 아마도 반응하는 예서가 신기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러나 예서는 전혀 재미없었다. “Manahim.” 차빈에게서 뜻밖에도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예서는 그 즐거워하는 모습 따윈 보이지 않았다. ‘이제 적당히 하고 이 손 좀 치워! 아니라면 옷이라도 좀 줘! 이 썩을 놈아! 엄마!! 아버지! 형님들! 나 이젠 더 이상 못 참겠다. 서이 언제 데리러 올 건데요? 오려면 빨리 좀 와라. 무서워 죽겠다!!! 지금 당장 와!!!’ 살랑거리는 바람 따라 물결도 부드럽게 너울거렸다. 앙증맞은 작은 물결 하나가 찰싹거리며 계단을 두드렸다. 눈부시게 하얀 천을 몸에 두르고 기둥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던 예서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다. 몇 개의 계단 아래에서 춤을 추는 물결이 마치 예서가 있는 곳까지 용을 쓰고 오르려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선선한 바람 한 줄기가 그런 예서를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역시 혼자 있으니 일단 속은 편하다. 물론, 불안이 아주 가신 것은 아니지만. 차빈이 갑자기 예서를 팽개치듯 내버려두고 사라진 후, 예서는 몸을 추슬러 정자를 한 바퀴 돌았다. 호숫가에 자리 잡은 둥그런 모양의 정자는 호수 바닥까지 이어진 계단을 온몸에 두르고 있었고, 아홉 개의 아름다운 돌기둥과 아홉 개의 돌로 된 징검다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아홉 개의 계단은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 아이라도 쉽게 오를 수 있을 만큼 낮았다. 아홉 개의 돌을 건너면 호수 밖 세상으로 나갈 수 있지만, 예서는 쉬이 건널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너무도 낯선 이곳에서는 호기심보다 경계심이 먼저 앞섰다. 예서는 기둥에 기대어 반짝이는 호수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예서는 어림짐작도 할 수 없었다. “Sedifod Manahim.(작은 마나힘.)” 그 조용함 가운데 갑자기 뜬금없이 들리는 목소리에 예서는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보았다. 징검다리 건너편, 바깥세상에서 예서를 향해 소리를 높이는 어린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둘이었다. 예서에게 소리를 지르는 아이와 그 아이보다 훨씬 작아 보이는 아이, 그렇게 둘이었다. 작은 아이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듯, 큰 아이 뒤로 목을 움츠리고 반쯤 숨어 예서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Sedifod Manahim!!!(작은 마나힘!!!)” 큰 아이는 예서의 시선을 확실히 잡으려는 듯 더 한층 소리를 높였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예서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곧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주위의 동정을 살폈다. 그 모습이 꼭 다람쥐 같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던 아이는 주뼛거리는 작은 아이를 앞세우고 징검다리를 잽싼 동작으로 건너왔다. 환하게 상기된 얼굴로 예서에게 다가온 큰 아이는 단정히 무릎을 꿇고 손에 들린 쟁반을 예서 앞에 내려놓았다. 쟁반에는 여러 진기한 과일과 밀전병, 걸쭉한 소스, 잘게 채를 썬 야채, 얇게 저민 고기가 그릇에 그득 담겨 있었다. 쟁반이나 그릇이나 세밀한 세공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경탄을 자아낼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아이가 들고 오기에는 무게가 상당해 보이는 것들이었다. 작은 아이는 큰 아이보다는 다소 멀찍이 떨어져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는 항아리 바닥과 손잡이를 꽉 잡고 있었다. 차가운 물이 담긴 듯, 항아리 겉 표면에는 정갈해 보이는 고운 이슬이 맺혀 있었다. 무게 때문에 심하게 흔들거리면서도 차마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모양새가 안쓰러워 예서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어라, 쏟겠다.” 그러나 작은 아이는 경기하듯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후다닥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고 큰 아이는 낮은 목소리로 작은 아이를 윽박지르듯이 꾸짖었다. 그러자 작은 아이는 무에 그리 서러운지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주춤주춤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쟁반에 놓여 있는 잔에 물을 따랐다. 물을 따르는 손길이 심하게 떨렸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손길에 물이 흘러넘치자 큰 아이는 으르렁거리듯 작은 아이를 나무라며 아이의 손에서 항아리를 빼앗다시피 받아들었다. “저, 꼬마 아가야.” 예서는 난처했다. 우는 누군가를 달래 본 적이 없는 예서로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냉큼 떠오르지가 않았다. 손을 내밀어 다독거리는 게 제일 쉬울 것 같은데, 무슨 이유에선지 아이는 예서가 멀쑥하리만큼 예서를 너무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흠. 흠.” 그저 예서는 헛기침으로 아이의 주목을 끌고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싱긋 웃었다. “울지 마.” 눈물어린 순한 눈을 끔벅이던 작은 아이는 예서의 웃음에 곧 어깨를 들썩들썩 끅끅거리며 눈물을 삼켰다. 고개를 숙이고 무릎걸음으로 뒷걸음치는 작은 아이의 거친 발에는 역시 큰 아이의 마찬가지로 신발이 없었다.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이라고는 그저 스카프 두르듯이 허리에 두른 거친 무명천뿐이었다. 그나마 나쁘지 않은 건 아이들의 입성이 남루하나 깨끗해 보인다는 거다. 까무잡잡해 보이는 피부에는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큰 아이는 고작 해야 열 두세 살 정도로 보였고, 작은 아이는 일곱 살 정도, 그 정도였다. “Sedifod Manahim.(작은 마나힘.)” 예서가 자신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자, 예서를 향해 곱게 웃은 큰 아이가 예서 쪽으로 쟁반을 밀었다. “미안.” 먹으라는 뜻은 충분히 알겠는데, 그러나 예서는 생각이 없었다. 아니, 생각만 없는 것이 아니라 입맛도 썼다. 예서는 잠시 음식을 내려다보다 머리를 두어 번 내젖고 고개를 돌려 호수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mm.....” 작게 목을 가다듬는 소리에 예서가 마지못해 고개를 돌리자, 큰 아이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밀전병 위에 소스를 얹고 야채와 고기와 더불어 돌돌만 모양이 마치 케밥 같았다. 크기는 훨씬 작았지만. 예서가 받지 않고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을 남의 것 마냥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자, 큰 아이는 예서 손에 케밥을 쥐어주었다. 예서를 보며 먹는 시늉을 하는 아이를 따라 예서가 마지못해 음식을 입에 넣자 아이는 환하게 웃었다. 마치 어린 동생이라도 돌보는 것 마냥 아이는 그런 예서 손에 잔을 꼭 쥐어주었다. 큰 아이의 손에 이끌려 예서가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였다. 예서는 온몸에 커다란 천을 두르고 있었고, 큰 아이는 호수 주위를 불안스럽게 둘러보며 급하게 서둘렀다. 작은 아이는 벌써 건너가 호숫가 큰 나무 뒤에 숨은 지 오래다. 작은 아이는 예서와 큰 아이의 동정을 살피며 부산스럽게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막 중간 즈음 이르렀을 때, 큰 아이의 재촉에 그만 너무 서두르다 예서의 다리에 천이 엉키면서 예서가 호수에 빠지고 말았다. “Sedifod Manahim!(작은 마나힘!) Sedifod Manahim!(작은 마나힘!)” 큰 아이는 비명을 내지르며 징검다리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예서를 잡아 당겼다. 호숫가에서도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Wevee timil! Qukify eniladej!!! (나리들 불러와! 빨리 뛰어!!!)” 혼비백산(魂飛魄散). 미친 듯이 예서를 끌어 올리면서 큰 아이는 작은 아이를 향해 악다구니를 쓰듯이 소리쳤다. 큰 아이의 얼굴은 마치 온몸의 피가 죄다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 핏기가 가셔 있었다. 그러자 큰 나무 뒤에서 두려움에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던 작은 아이가 빠르게 어딘가로 뛰어갔다. 돌에 걸려 넘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없이 뛰는 것이 예서의 눈에 들어왔다. 고작 허리께 정도의 호수에 빠진 걸로 수선을 떠는 아이들 때문에 예서는 도리어 어안이 벙벙했다. 이렇듯 소란을 떨지 않아도, 끌어 올리려 호들갑을 떨지 않아도, 이 정도는 가뿐하게 오를 수 있는데, 왜? 그래서 예서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큰 아이는 그런 예서를 보며 눈물을 글썽거렸고, 얼굴이 시뻘개 지도록 용을 썼다. “Sedifod Manahim.(작은 마나힘.)” 갈라지고 눈물이 가득한 아이의 목소리에 예서는 그제야 더럭 겁이 났다. 그다지 위험스러워 보이지는 않지만, 호수에 빠지면 안 될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이들이 이렇게 소란을 피울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 때였다. 눈앞에 있던 아이의 얼굴이 공포로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공포와 두려움에 부들거리며 예서 너머를 보고 있었다. 뒤에서 들리는 물소리에 예서는 엉겁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곧 아이의 커다란 비명이 예서의 귀를 때렸다. “어....?” 그리고 순식간에 허리에 무언가가 감기는 느낌에 예서는 휘청거렸고, 아이는 예서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곤 자신의 머리를 감싸며 울부짖었다. 무릎을 꿇고 그 사이에 머리를 박곤 호수가 떠내려가라 악을 쓰고 있었다. “............?” 예서 눈앞에 있는 것은 분명 물이었다. 단지 그것에 눈이 있고, 전체적인 모양새가 마치 커다란 ........뱀?? 예서가 뱀의 머리 부분에서부터 천천히 몸통을 따라 시선을 내리니, 호수 속, 자신의 다리 주위에 희미한 물결들이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양새 또한 마치 뱀이 똬리를 튼 것 같았고,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다리를 쥐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정면을 보니 역시 물이었다. 아주 커다란 물. “Sedifod Manahim?(작은 마나힘?)” 그리고 그 뱀이 말을 하고 있었다. 못 알아듣기는 해도, 거칠고 탁해 귀에 거슬리기는 해도, 분명 사람의 언어였다. “......물 ......뱀?” 말도 안 된다. 물뱀은 예서 자신도 예전에 한 번 직접 보지 않았던가. 커다란 물웅덩이 한가운데서 자신의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주위의 동정을 살피며 경계하던 뱀은 결코 이런 모양이 아니었다. 물뱀도 그저 흔하디흔한 뱀이었다. 예정 없이 불쑥 맞닥뜨려 오싹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예서는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물로 된 뱀? 아니다. 물에 사니 그래도 물뱀에 속하지 않을까. 예서가 빤히 자신을 쳐다보자, 물뱀이 자신의 얼굴을 예서의 코앞으로 디밀었다. 예서는 질겁하며 징검다리를 뒤로 집곤 몸을 뺐다. 그런 예서를 보며 물뱀은 웃는 양 그 커다란 입을 양끝으로 잡아당기며 갈라진 검은 혀로 예서의 코를 살짝 핥았다. “........??” “Sedifod Manahim?(작은 마나힘?)” “................?!!” 그리고 예서는 방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뒤늦게 깨달았다. 예서의 눈이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고, 당연히... “으........... 으악....!!” 예서의 입에서 커다란 외마디소리가 터져 나왔다. 예서는 몸을 돌려 징검다리 위로 벅벅거리며 기어오르려 했다. 그러나 물뱀에게 단단히 잡혀 있는 하체로 인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더한 공포가 예서를 덮쳤다. “아악!! 사람 살려!!! 여기 대체 뭐냐?!!! 아악!!!” 허리를 비틀고 온몸을 비틀며 용을 쓰는 예서의 얼굴은 시뻘겋게 핏대가 올랐다. “Ak!!!” 더불어 예서 뒤에 있던 아이까지. “Sedifod Manahim!(작은 마나힘!) Sedifod Manahim!(작은 마나힘!)” 그런데 어인 일이지 예서의 비명소리에 물뱀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예서와 같이 소리를 높였다. 조급하고 다급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것이 예서의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그저 쩍 벌어진 뱀의 큰 입과 날카로운 이빨에 기절할 듯 자지러지며 예서는 목소리를 더욱 높일 뿐이었다. “아악!! 사람 살려라!! 사람 살려!! 읍!!! 읍!!!” 예서가 그렇게 얼마쯤 소리를 질렀는지는 모른다. 자신의 몸통으로 예서의 입을 틀어막는 물뱀으로 인해 예서는 적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마도 잡아먹을 생각이었다면 예서의 입을 자신의 몸통으로 막지는 않았을 것이다. 입으로 막지. 그런 생각이 들자 예서에게서 비명소리가 잦아졌다. 물뱀을 본의 아니게 입으로 만진 느낌은 손바닥으로 물 표면을 마찰하는 느낌이었다. 시원하고 부드러운, 그 기분 좋은 느낌 때문에 예서는 더욱 이성을 찾을 수 있었다. 예서의 비명이 자자들자 물뱀은 예서의 입을 놔주었다. “말도 안 돼. 크기는 왜 이렇게 큰 거냐? 물 구렁이도 아니고. 그런데 뱀 주제에 어째 머리가 내 머리보다 더 크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예서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물뱀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예서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좀 더 가까이 디밀었다. 예서는 흠칫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물뱀은 같이 고개를 틀며 예서의 눈에 자신의 눈을 맞추었다. 예서가 반대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도 역시 물뱀은 예서의 눈을 따라왔다. 예서의 코앞에 다가온 뱀의 눈은 물이 아니었다. 하긴 이 눈 때문에 예서가 ‘혹시 뱀?’이라는 생각을 한 거지만. “Sedifod Manahim??(작은 마나힘??)” 예서가 고개를 숙이자, 물뱀 또한 몸을 내려 밑에서 예서의 눈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끔벅거리며 말똥히 쳐다보는 물뱀의 눈에는 그 어떤 악의도 없었다. 갸웃거리는 그 모양새가 힘찬이를 연상케 해서 그 눈에 눈을 맞추며, 예서는 싱긋 웃었다. 그러자 물뱀은 꽤나 놀란 듯, 한순간 멀찍이 떨어지며 예서의 얼굴을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물뱀은 입가를 늘려 따라 웃었다. “Sedifod Manahim.(작은 마나힘.)” 마나힘? 그 남자도 그렇고, 이 아이나 물뱀이나 자신을 보면서 하는 저 단어의 정확한 뜻은 잘 모르겠지만, 자신을 칭하는 건 분명한 듯싶기에 예서는 대답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뜻이야 뻔하다. 이방인이거나, 손님이라는 뜻일 것이다. 예서는 그저 단순하게 생각했다. “Dela takesogidik. Skis tajy ditundi. Tu sujusy remajisul rikis edimipakisy dili rehefiss sis wely. Quwediko sodep akirid misy. Akso ladlrensikdi?(상당히 작네. 마음에 든다. 그 놈만큼 큼지막한 사내놈일 줄 알았는데, 하긴 네 놈 그 놈 품에 폭 안겨 왔지. 나는 이곳을 지키는 위대하신 성수다. 너 이름이 뭐냐?)” “..........?” “Sedifod Manahim?(작은 마나힘?)” “..........?” “Aht dakafidak emesmis rejudi? suj akf atigo?(에, 못 알아먹는 거냐? 설마 너 벙어리?)” “저기, 뭔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Rumfody?(거짓말 아니지?)” “..........?” “Dek surepatek. ......Dihatle? Sork ruf go anaf rap. Wekifaha the leh eh fadems shadel. Kefadaketej gokef rjtek sjs rjrak.(이거 재미있네. .......도와줄까? 하긴 내 능력 정도면 가능도 할 거다. 잘못되면 그건 돌은 놈이 알아서 할 거고. 그러니까 일단 너나 나나 걱정할 필요는 없는 거지.)” “그러니까 물뱀...... 님? 맞나? 진짜로 여기 말은 정말이지 못 알아먹거든요.” “Sedifod Manahim.(작은 마나힘.)” “네?” “hhhh. Sork go ruf anaf rap. Sork go ruf go anaf rap.(흐흐흐흐. 내가 도와주마. 도와줄게 고마워나 해라.)” “..............;;;” 한참을 혼자 알 수 없는 말로 떠들던 물뱀이 자신을 향해 갑자기 음흉한 웃음을 흘리자, 예서는 움찔거렸다. 악의나 살의 같은 그 어떤 악감정은 보이지는 않지만, 뭔가 상당히 수상쩍었기 때문이다. “뭐하려고요?” 그러기에 예서의 목소리에는 불안한 음색이 완연했다. 물뱀은 예서의 몸을 칭칭 감고 있던 자신의 몸을 조금 느슨하게 풀며 예서에게서 몇 걸음 거리로 떨어졌다. 예서도 덩달아 뒤로 주춤 물러섰다. 물뱀은 물 밖으로 자신의 몸을 족히 수 미터 됨직한 높이로 꼿꼿하게 세웠다. 곧 예서 주위의 공기가 긴장되기 시작했다. “무... 무슨.... 으.... 아악!!!!” 그리고 ’갑자기’다. 갑작스레 물뱀이 눈을 치뜨며 몸을 더욱 크게 솟구쳐 예서를 덮쳤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을 연상케 하는 무서운 기였다. 물뱀은 커다란 입을 쩍 벌리며 예서의 목을 단번에 물었다. “컥......!!!” 아픔은 없었다. 물뱀은 예서의 목을 물자마자, 곧 물로 화했다. 그러나 물은 예서의 입으로, 귀로, 코로 거침없이 밀려 들어왔고, 예서는 별안간 당한 일에 놀랄 사이도 없이 코로 들어온 물 때문에 아픈 코와 목을 잡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기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켁!!! 켁!!! 쿨룩!! 쿨룩!!!” 콧물인지, 아니면 물인지 코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예서는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놀란 것에 비하면 비 맞은 생쥐마냥 온통 물을 뒤집어쓴 건 아무것도 아니다. 예서는 연신 기침을 하면서 이 일의 원흉인 물뱀을 찾았다. 몇 걸음 앞, 물속에서 눈만 빠끔히 내밀고 물뱀은 웃고 있었다. “안녕. 작은 마나힘~.” 그런데 물뱀의 이해가 되지 않는 갑작스러운 장난에 어이없어 허탈하게 웃는 예서의 귀에 그 순간 뱀의 말이 들렸고, 예서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물뱀은 물 밖으로 서서히 머리를 내밀며 입아귀를 천천히 늘려 입을 열었다. “...........?!!” 놀란 예서가 입만 뻐끔거릴 뿐 말을 못하자, 물뱀은 바짝 다가와 예서의 몸을 조금 전처럼 칭칭 감고 만족스러운 듯 예서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런 물뱀을 따라 예서 또한 고개를 돌리며 물뱀을 쳐다보았다. 물뱀의 말이 들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의미 없는 소리 같았던 것이 정확하게 뜻을 전달하고 있었다. “어때? 내 말이 들려~??” 예서는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못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때였다. 인간과 말이 내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삽시간에 호숫가를 덮쳤다. 거칠게 투레질을 하는 말을 한 손으로 제어하며 장검을 빼어든 차빈이 예서 쪽을 향해 살기어린 매서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야차의 형상이 따로 없었다. 차빈 주위로 무장한 군사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무... 물뱀님. 가... 같이 가요.” 예서의 심장이 차갑게 얼어 바닥에 뒹굴었다. 그리고 그건 예서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말에서 내려 성큼성큼 걸어오는 차빈을 보자, 물뱀이 힁허케 예서를 버려두고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들며 눈 깜짝할 사이에 호수 한가운데로 도망쳤다. 그리고는 몸을 호수 속에 담그고 눈만을 빠끔히 내밀며 차빈을 뒤룩거리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물뱀을 차갑게 시린 눈으로 노려보던 차빈은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굽혀 예서의 허리를 안아 단번에 호수에서 예서를 끄집어 올렸다. “헉!!” 예서 자신이 아무리 차빈보다 빈약하다고는 하나 건강한 열여덟이다. 그런 자신을 한 팔로 단번에 들어 올린 차빈을 예서는 황망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몇 번의, 결코 본의 아닌 부딪힘(?)으로 힘이 괴물급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던가. 그런 예서의 시선은 아는지 모르는지 차빈의 손에는 여전히 장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들려있었다. “뱀 새끼. 나와라.” 으르렁거리는 차빈의 목소리에 물뱀뿐만 아니라, 예서의 목도 움츠러들었다. “......싫어. 이 돌은 놈아. 내... 내가 미쳤냐....?” “................” 그 순간 호수 주변이 눈 굴리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삽시간에 고요해지며 무서운 긴장감과 살벌한 살기만이 감돌았다. 예서의 온몸에는 소름이 쫙 끼쳤다. “훗. 뱀 새끼. 죽고 싶은 마음이 이제야 들었나보군. 반갑다.” 몸을 풀듯이 손안의 거대한 장검을 마치 어린아이 장난감마냥 가볍게 휘두르며 차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칼이 일으키는 바람을 바로 옆에서 맞아야하는 예서는 오줌을 지릴 정도였다. “흥!!! 우... 웃기지... 마아...” 그리고 차빈의 냉소적인 비웃음에 코웃음을 치는 물뱀의 목소리는 참 많이도 떨리고 있었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까불지 말고 바닥에 처박혀 있으라고. 안 그러면 그만한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해 주겠다 했던 것 같은데?” 가볍게 목을 풀며 내뱉는 차빈의 낮은 목소리에 다소곳이 낯부끄러운 포즈로 차빈의 품에 있던 예서는 마른 침을 꿀떡 삼켰다. 가만히 있길 잘했다. 괜히 되도 않는 저항에, 자존심에 덤볐다 저 칼바람이 먼저 자신을 덮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단 이 사람은 칼이 없을 때 상대하는 것이 그나마 살 확률이 높겠지? “처박혀 있었어!!! 숨도 안~ 쉬고 처박혀 있었어!! 이 돌은 놈아!!” “뱀 새끼. 마지막이다. 그 추한 면상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면 그땐 확실히 죽여주마.” 예서의 젖은 어깨를 쓰다듬으며 차빈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예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희번덕거리는 눈초리가 사납다. 그런데 그것이 아무래도 예서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누군가에 대한 것 같기에 예서로서는 다소 안심이 되기는 하다만, 혹? 설마? “이 잔인한 새끼야!!! 나이도 나보다 어린 새끼가 가... 감히 누... 누구한테 혀...... 협박이야?!!” “네 놈이 성수(聖獸)면 난 성자(聖者)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것. 뱀 새끼. 누구보다 네 놈이 더 잘 알지. 안 그런가?” “이... 이익....” 잔뜩 약이 오르는 듯 물뱀은 이제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저기, 두 분이 왜 싸우고 계신지는 자.... 잘 모르겠지만요. 혹시 만에 하나, 이건 진짜 만에... 하...... 하나입니다. 저... 저 때문이라면, 물뱀님하고는 그냥 대... 대화를......” “................” “........................” “저... 기... 그러니깐... 제... 제가 실수로 호수에 빠졌거든요. 그..... 그럼요. 제... 제가 먼접니다. 꿀꺽. 별로... 물뱀님은 해코지 같은 거 하지도 않았고요. 조... 좋은 뱀 같은데요?” “........................” “...............................” “아니면 착한.... 뱀...?” 차빈의 눈치를 보는 굳은 예서의 미소가 안쓰러울 정도다. 예서는 물뱀과 차빈을 번갈아보며 눈을 이리저리 데구루루 굴렸다. “누구보고 물뱀이라고 하는 게야!! 그 서방에 그 마누라 아니랄까봐 감히 누굴 뭐로 보는 게야!! 아악!!” “죽인다!!!” 물뱀의 악에 받친 소리와 차빈의 아귀 지옥에서 나온 듯한, 지독히 탁한 소리가 호수 수면 위로 메아리쳤다. 예서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감히 누구한테 손 댄 거냐?!!!” “고... 고작... 벙어리 밖에 더 돼!!! 죽지는 않는다고!!!” “죽여주마.” 분을 참을 수 없는지, 차빈은 장검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우... 웃기지... 마아.... 아.....” “흑흑. 그 새끼 돌았다니까. 진짜야. 진짜. 너 못 믿는 거냐?? 그 놈 손에 죽은 성수(聖獸)가 한 둘 인줄 알아?” “.................” “훌쩍. 가만있어 보자. 하나. 둘. 셋. 넷... 아, 이놈은 죽을 만 했어. 돌은 놈 말을 한 입에 꿀꺽 했거든. 것도 놈 앞에서. 진짜 죽으려고 작정한 거지. 이놈도 꽤나 이상한 놈이긴 했지만 말이야. 그래도 가끔 말이 통하곤 했었는데. ...그런데 어떻게 돌은 놈 앞에서 놈의 말을 잡아먹을 생각을 했을까. 하여간... 그리고 에, 내가 몇 째 놈까지 세었어?” 배를 하늘로 향해 채로 벌렁 누워 물 위를 둥둥 떠다니며 예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물뱀의 몸은 혼탁했다. 여기저기 탁한 덩어리들이 물뱀의 몸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며칠 전 차빈에게 톡톡히 당한 흔적이다. 그래도 입은 멀쩡한 건지 예서를 보자마자 떠들기 시작하더니만 끝을 낼 줄 몰랐다. “넷이요.” “아. 맞다. 다섯. 여섯. 일곱... 은 아니구나. 자그마치 여섯이야. 잔인한 새끼. 그 놈 벌 받을 거야. 팽!! 댁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야?!! 왜 팔이 안으로 굽어?!! 그럼 그 팔 잘라 버려!!!” 흘러나온 누런 콧물을 하늘을 향해 풀며 아무 것도 아니라는 양 물뱀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나 하늘로 향하던 그 콧물은 고스란히 물뱀의 얼굴로 다시 돌아왔고,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되돌아온 콧물에도 물뱀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한 번 굴릴 뿐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잰 줄 모르지? 하긴 그 놈이 제대로 알려 줄 리가 없지. 무식한 새끼. 난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저기 호수바닥 보이지. 저게 그냥 돌이 아니거든. 성석(聖石)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돌이라고. 저 돌이 성수(聖獸) 알이랑 비슷한 게 화근이었던 게야. 성산(聖山) 인가(仁家)에서 자라야 하는데 성석(聖石)이랑 알이랑 구별도 못하는 그 무식한 사노(私奴)놈들 덕에 여기로 온 거란 말이다. 그러니깐 내가 놈들을 먹어치우는 거라구. 그런데 그 놈은 그것도 모르고 아주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이야!!” 그런데 차빈을 성토하던 물뱀이 갑자기 한숨을 푹 쉬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잠깐, 초점 없이 풀어진 눈으로 멍히 허공을 바라보다 힘없이 말을 내었다. “그래도 그 돌은 놈 어렸을 때는 나름대로 귀여웠는데. 그 놈이 아장아장 걷던 때도 있었다고. 믿어져?” “헛소리.” 헛소리다. 차빈님은 항상 차빈님이었다. 무섭고 큰. 물뱀의 말에 그 동안 예서의 뒤에서 숨죽이고 있던 쿰이 삐쭉이 한 마디 했다. 그러나 곧 쿰은 황급히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핏기 가신 창백한 얼굴로 땀을 삐질 흘리는 게 아무래도 속마음이 엉겁결에 튀어나온 모양이다. “뭬야?!! 감히 누구한테 하는 소리냐?!! 돌은 놈 때문에 내가 만만해 보이는 게냐?!! 네 이놈!! 나는 돌은 놈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야!! 이 잡놈아!!!” “하.... 하는 일 없이 매일같이 사노(私奴)만 추... 축 내니까... 싫어하시는 게 당연하지~!!” 쿰은 예서의 등 뒤에서 쭈그려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고 무서움에 떨면서도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로 말했다. 굳게 감긴 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뭬야?!! 네 놈이 지금 내 앞에서 돌은 놈 편을 드는 게야?!!” 예서가 볼 때, 쿰은 단단한 눈을 가진, 성에서 일하는 여타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생기가 넘치고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 예서 앞에서도 진심으로 웃었고, 항상 예서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곤 했다. “꼬맹이 많이 컸구나. 야~. 맛나겠는걸. 잡아먹어 줄까보다.” 가래 끓는 듯한, 걸걸한 목소리로 물뱀은 쿰을 협박했다. “히익~!! 작은 마나힘, 살려 주세요!!” 쿰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입맛을 다시는 물뱀 때문에 쿰은 예서의 등 뒤로 고슴도치마냥 몸을 말고 숨었다. 큰 아이는 자신을 쿰이라 불러 달라고 했다. 뜻은 없었다. 그저 ‘사내아이’라는 흔한 말일 뿐, 쿰은 사노였기에 특별한 뜻을 부여받지 못했다. “사노(私奴)를 백 명이나 처먹은 주제에~. ㄹ~~ ㅇ~ ㅁ~.” 등 뒤에서 들리는 꿍얼거리는 쿰의 목소리에 예서는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천성이 순수하고 솔직한 쿰과 함께 있으면 즐겁다. 그래서 예서가 쿰만을 끼고 도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노라고 했던가. 비록 공손하나 무기질적인 사람들이라, 그래서 그림자처럼 존재감이 없지만 자신의 주위를 맴돌며 자신의 영역을 거리낌 없이 침범한다는 건 생각 외로 상당히 껄끄러운 일이었다. “하하하. 쿰.” “네. 작은 마나힘.” “너도 그렇고, 사람들이 나한테 자꾸 작은 마나힘, 작은 마나힘 하는데 그거 무슨 뜻이냐?” 예서를 사람들은 ‘작은 마나힘’이라 불렀다. 첫날 생각했던 단순한 의미는 아니라는 것 정도는 어림짐작으로 알겠는데, 다들 예서만 보면 눈을 피하고 어려워만 하니 쉬이 말을 걸 수가 없었다. 한 쪽은 껄끄럽고, 다른 한 쪽은 어렵다. 만날 수 없는 평행선과도 같은 그 느낌에 예서는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하고 씁쓸했다. 세상에는 어우러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 걸까. 모르겠다. “...............” 쿰은 의외라는 뜻 고개를 들고 예서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마나힘은 마나힘이에요. 작은 마나힘은 작은 마나힘이니깐, 작은 마나힘이라고 하는 거예요.” “마나힘은 ‘신이 내게 준 자’란 뜻이야. 역시 그 주인의 그 가노야. 무식한 것. 쯧.” 물뱀은 혀를 차며 거만하게 아는 척을 했다. 쿰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런 물뱀을 쏘아보았다. 그 눈이 상당이 야무지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저한테 작은 마나힘이라고 하는데요?” “그거야. 네가 마나힘이니깐.” “그럼, ‘신이 내게 준 자’는요?” “마나힘.” “.............;;” 예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싱긋 웃었다. 마나힘이라는 말이 목의 가시처럼 껄끄럽기는 하나, 모른다니 어쩌겠는가. 사실은 아는 것이 두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잠깐!!! 어라리요?!! 그러고 보니 왜 빈손으로 왔어?!! 성수(聖獸)를 배알하면서 덜렁 몸만 오다니!! 너 꽤나 고얀 놈이구나?!!” 그리고 갑자기 물뱀은 콧김을 붕붕 날리며 예서를 향해 눈을 부라렸고, 예서는 미소로 얼버무렸다. 그 미소가 깨끗하다. 사실 호수로 나간다고 하니 사색이 된 사노들이 우왕좌왕하며 쿰의 손에 까만 새끼 염소 한 마리를 쥐어주었다. 그러나 그 염소의 용도를 들었을 때, 예서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염소가 자신의 눈앞에서 산채로 잡아먹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순수한 의미의 먹이일지도 말이다. 예서는 순진하고 까만 눈을 가진 어린 염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쿰을 앞세워 호수로 나왔다. 어린 고기? 아무리 야들야들하고 맛있다 해도 예서는 눈살부터 찌푸려졌다. 그냥 질긴 고기나 먹고 살련다. “여긴 진짜 조용해요.” 동문서답하듯 말을 돌리며, 예서는 호수 풍경을 둘러보며 한껏 기지개를 켰다. “난 말이야. 성수(聖獸)니깐 아무나 함부로 곁에 오면 안 되는 거거든. 암.” “흥!!” “이 놈아가!!!” “하하하.” 쿰은 그 동안 쌓인 게 꽤나 많은 모양이다. 무서워서 예서의 등 뒤에 숨어 있으면서도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물뱀에게 맞서려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예서는 그런 둘을 보며 상쾌하게 웃었다. 징검다리에 걸터앉아 발을 물에 담그고 장난질을 하는 예서를 부드러운 바람 하나가 툭 치고 지나갔다. “안돼요!!! 작은 마나힘!!! 안돼요!! 절대 안돼요!!” “넌 껴들지 마.” 물뱀은 토라진 목소리로 쿰을 밀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쿰은 고개를 미친 듯이 가로 저으며 예서의 팔을 붙들고 매달렸다. 그 무서워하던 물뱀도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 쿰을 보며 잠시 주저하며 망설이던 예서는 그러나 이내 마음을 정했다. 그예 쿰은 사색이 되어 더욱 매달렸다. “작은 마나힘. 정말 안돼요!! 큰일 나요!! 진짜 큰일 나요!!” 위험하다. 쿰의 본능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 물뱀을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만큼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이 쿰은 너무도 답답했다. 쿰은 설명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저 복종하는 것만을 배웠을 뿐이다. 쿰은 그 작은 가슴을 텅텅 치며 울부짖었다. “그... 그러니깐 잡아먹힐 거예요!! 맞다!! 맞아요!! 맞아요!!” 그리다 엉겁결에 툭 내뱉은 자신의 말에 대단히 만족한 듯 쿰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뭬야?!! 누굴 뭐로 아는 거야?!! 돌은 놈한테 죽을 짓은 안 해!!” “안돼요!! 아악!!!” “이번에야말로 죽여 버린다.” 뜨겁게 솟구치는 극렬한 분노에 차빈은 들고 있던 장검으로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부수었다. 그리고 그런 차빈을 보며 가노들과 가신(家臣)들은 조용히 머리를 조아리고 주인의 처분만을 기다렸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미동조차 없었다. 어린 가노의 말에 의하면 호수에 기생(?)하는 성수가 예서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는데, 문제는 예서가 성을 벗어난 것이 아니라 그 성수가 예서를 데리고 간 것에 있었다. 성수(聖水)의 길을 따라 이동하는 건, 성수(聖獸)라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단, 그건 어디까지나 성수(成獸)에 한해서다. 어린 성수(聖獸)들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성수(聖水)의 길에 갇히거나 길을 잃어버려 죽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호수에 기생(?)하는 성수(聖獸)는 난생(卵生) 후, 단 한 번도 호수를 벗어난 적이 없다, 그 주제에 혼자도 아닌 예서까지 데리고 간 것이다. 잘못하면 죽는다. 아니, 호수에 기생(?)하는 성수(聖獸)의 능력이라면 십 중 팔구 죽는다. 차빈 자신 또한 성수(聖獸) 중 최고라는 자의 도움으로 이동하면서도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이동이란 그 만큼 자연스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인 것이다. “너희들의 죄는 차후에 받겠다.” 진노한 장검의 끝을 가노와 가신들에게 겨누며 차빈은 서릿발처럼 차갑게 입을 열었다. 까맣게 타들어가는 듯한, 차빈의 가슴은 숨을 내쉬기도 고통스러웠다. 잃는다. 그게 이렇듯 두려운 것인가. 태생이 두려움이라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여겨진 차빈이었다. 경험해 보지 못했던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차빈의 가슴을 짓이기며 소용돌이 쳤다. “예.” 그리고 단호한 차빈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 가노와 가신들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들의 주인은 단 한 번도 실수를 용서한 적이 없는 분이다. 예서는 어찌 되었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물뱀이 예서에게 재미난 일을 하자고 했을 때만해도, 다른 곳을 구경시켜 주겠다는 말을 했을 때만해도,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성을 벗어나 다른 곳을 보여 주겠다고 했을 때는 달랐다. 물론 예서가 처음부터 그 제의를 선뜻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이런 이상한 세상이 아니었다면,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몸을 추스르고 나니 예서는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게 들었다. 자신은 돌아가야 한다. 이곳은 자신이 속한 곳이 아니다. 그러기에 반드시 자신은 돌아가야 한다고 예서는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예서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곳에 와 있었다. 호수 한 가운데로 예서를 데리고 간 물뱀은 그의 몸에 자신의 꼬리를 칭칭 감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용을 쓰기 시작하자 물뱀의 몸속이 끓는 물처럼 부글거렸다. 덕분에 물뱀의 몸 속, 탁한 덩어리들도 빠르게 돌았다. 덩어리 하나가 갑자기 위쪽으로 불쑥 솟구쳐 오르기라도 하면 물뱀은 잊지 않고 “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김없이 트림을 했다. 그런 물뱀으로 인해 느껴지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며 예서는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물뱀의 얼굴을 안 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듯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 후 호수바닥으로 예서의 몸이 서서히 잠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더럭 겁이 났지만 예전 동굴에서의 무서운 경험을 해서 그런가. 예서는 곧 침착할 수 있었다. 될 수 있는 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그러는 동안 끊임없이 쿰의 비명소리가 호수에 메아리쳤다. 물뱀의 몸이 떨어져나가는 느낌에 예서는 서서히 눈을 떴다. 물속이었다. 바닥에는 호수바닥과 같은 성스러운 돌이 얌전히 깔려있었고, 얕은 수면에 사람이 지핀 듯한, 일렁거리는 불이 보였다. 장소는 알 수 없으나, 실내였다. “...........?!!!” 그리고 거기에 예서의 몸이 허리 아래로 바닥에 박힌 채 꼿꼿하게 서 있었다. 예서가 몸을 바닥에서 빼내려 했으나 꿈쩍도 안 했다. 당혹함에 주위를 둘러보니 물뱀이 예서보다 더 당황한 모습으로 예서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곧 물뱀은 수면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 물뱀이 물속으로 머리를 다시 내렸을 때는 턱을 탈골시켜 입을 크게 하고 공기를 품어 얼굴이 마치 복어 같았다. 그 모습에 물뱀의 뜻을 읽은 예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물뱀은 비장한 얼굴이 되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눈을 꼭 감고 입술을 쭉 내밀던 물뱀은 ‘거참 이상하다. 왜 벌렁벌렁 군침이 돌지. 이거 먹는 거였나?’ 라는 뜬금없이 떠오른 자신의 해괴한 생각에 예서를 보려 실눈을 떴다. 그러나 예서의 입술이 어디에 닿자마자, 화드득거리며 꿀꺽꿀꺽 고인 침을 삼키려다 그만 공기까지 마시고 말았다. 당황한 물뱀은 호흡 곤란으로 붉게 사색이 된 예서를 보며 자신의 뱃속에 들어간 공기를 게워내려 했다. “...........!!!!” 그러나 나온 건 공기가 아니고 죽은 개 한 마리였다. 그 모습에 낯빛이 하얗게 질린 예서는 있는 힘껏 바닥을 밀며 몸부림을 쳤다. 그 모습에 적이 정신을 차린 물뱀은 삐죽하니 수면에 고개를 내밀어 다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시금 몸부림치는 예서를 자신의 꼬리로 꽁꽁 묶곤 부들거리는 자신의 입술을 디밀었다. 이번에는 예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게 물뱀의 입술 때문이지, 아니면 호흡 곤란 때문인지, 아니면 그 둘 다 때문인지. 글쎄, 둘 다가 아니었을까. 그 때였다. 예서의 몸이 바닥에서 스르륵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예서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서니, 그 곳도 역시 호수처럼 고작 예서의 허리께였다. 예서가 콜록거리면서 물을 토해내는 동안 옆에서는 물뱀이 오두방정을 떨면서 예서의 주위를 맴돌았다. 쇠를 긁는 듯한, 그 크고 껄껄한 목소리에 예서는 정신이 더 없었다. “네 이놈들!! 감히 예가 어디라고 이런 무례한 짓들인고?!!” 머리 위에서 들리는 근엄한 일갈에 예서가 정신을 가다듬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다란 못 주위에 사람들이 삥 둘러 서 있었다. 결이 고와 보이는 무명옷은 마치 중세 사제복 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이쪽은 흰색에, 단단해 보이는 굵은 가죽 띠를 허리에 두르고 있어 상당히 강인해 보였다. “........?” 여긴 어딜까. 만약 돌에도 연륜이 있다면 이런 것일까. 거대한 실내는 온통 오래된 돌이었다. 어림하여 가름하기도 힘들 정도의 높고 둥근 지붕과 창문 하나 없는 공간은 그렇게 음침하거나 습하지는 않았지만, 흐릿한 빛이 일렁이는 조각상들의 음산한 음영이 예서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아 예서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네모반듯한 실내는 상당히 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중간 중간 돌로 쌓아 만든 수많은 석대(石臺)위에서 붉은 불이 이글거리며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반듯한 실내와는 달리 무수한 굴곡진 못, 그 중 가장 작은 못, 가장 구석진 못에 예서가 있었다. 수면 위에는 곱고 영롱한 기운이 떠다니고 있었다. “이와호야~!! 이봐!! 작은 마나힘. 이거, 이거 제대로 찾아 왔잖아. 여기야 여기. 대신전 지하 레탁크!! 와!! 드디어 그 곳을 벗어났다~!!” 물뱀은 신이 났다. 차빈이 이계로 떠나던 날, 온 나라의 사제란 사제는 죄다 불러 모아들인 것인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무수한 사제들이 호수를 둘러싸서는 물뱀 자신이 볼 때 되도 안 되는 기도문들을 하루 종일 외웠다. 그런데 문제는 낮에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밤새 호수를 대낮처럼 밝히며 자신의 단잠을 방해받자, 물뱀으로서는 이건 그저 재미로 넘길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보금자리 한가운데에 웬 성수(聖獸) 한 마리가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는 심지어 물뱀 자신을 호수에서 내어 쫓으려고까지 했다. 괘씸한 그 행동에 물뱀이 단호하게 대처하자, 사실 물뱀은 꽁무니가 빠지도록 도망 다녔다. 쉬지 않고 귀가 따가울 정도로 악을 쓰는 물뱀과 한참을 씨름하다 더는 안 되겠던지, 가장 외진 곳으로 물뱀을 내모는 걸로 그 일련의 소동을 대강 마감하곤 질린 듯, 그 성수(聖獸)는 혀까지 내두르기를 서슴지 않았다. 방해하지 못하도록 으르렁거리는 협박을 마지막으로 그 모든 일을 일단락 지었다. 사실 물뱀은 사제들이 들이닥치기 며칠 전, 떠들썩한 성 분위기에 궁금증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집안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 사실 물뱀으로서는 목숨을 건 일이었다. 잘못하다 차빈에게 걸리면 몸통이 토막 나는 변을 당하게 될 터이니 말이다. 하여간 물뱀 자신이 붙잡은 사노들은 하나같이 차빈의 마나힘을 이계에서 데리고 오는 일 때문에 집안이 시끄러운 거라 했다. 심하게 부들거리는 모양새를 보건대 사노들은 꽤나 들떠 보였다. 그렇게 차빈이 떠나고 번잡한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차빈은 누군가를 안고 돌아왔고, 그의 품에 안겨있는 마나힘은 확실히 이계의 인간이었다. 그리고 처음, 말을 못하는 마나힘에게 자신의 힘을 불어 넣은 건 그저 흔한 호기심이었다. 어차피 잘못 되어도 차빈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원래대로 해 놓을 터이니 물뱀 자신은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다. 아니, 하지 않았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어차피 죽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그것이 통했다. 예서가 말을 하고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그래서 물뱀은 다시 만난 예서를 보면서, 예서에게 힘을 불어 넣을 수 있다면 까짓 이동하는 것쯤은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고, 더불어 한없이 심심해 보이는 예서를 위해서였다는 그럴듯한 대외적인 핑계까지 만들자 마음이 든든하기까지 했다. “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떠드는 게냐!!” “헤에.” 정신없이 들떠 노사제의 엄한 호통에도 주눅 드는 일 없이 휘휘 주위를 둘러보며 물뱀은 철없는 어린아이 마냥 신기해했다. 그 때였다. 한 존재가 조용한 걸음으로 한 발 나서더니 예서에게 허리를 굽히며 나직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오시지요.” “..............?” 이상한 사람이다. 사람이라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흰자위가 없는 크고 까만 눈은 보이지 않을 것 같았지만, 정확하게 예서에게 손을 내미는 것으로 봐서는 보이는 듯했다. “......물 ............사람.......??” 그래, 이번에는 물 사람이냐. 예서의 말에 의아한 듯 그는 잠시 예서를 멀끔히 쳐다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난감함과 어색함을 푸는 열쇠는, 일단 인사다. 예서는 물로 된 사람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자넨...?!!” 노 사제는 큼지막한 물뱀의 꽤나 어수선한 소란에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거다. 물뱀을 큰소리로 나무라던 그는 그제야 이 소란의 곁가지로 딸려온 예서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서와 예서의 미간을 발견했다고나 할까. 예서의 미간에는 기하학적인 작은 물방울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분명 그것은 예서가 성수(聖水)의 길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없던 것이다.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문양은 인간의 솜씨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했다. 이는 성수(聖獸)가 문을 연 것이 아니라, 대신전의 성수(聖水)가 길을 터서 받아들였다는 증거다. 누구기에? 그리고 노사제의 눈에 그제야 비로소 흰 천에 둘둘 싸인 이국적인 몸이 들어왔다. 물뱀에게 불호령을 내리던 노 사제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을 보고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려 경악하는 것을 보는 순간 어떤 말을 내어놓아야 할지 예서는 당혹스러웠다. 그래도 일단 허락 없이 침입한 것에 대한 사과부터 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에 예서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다른 이가 예서보다 앞서 말을 내었다. “저...” “하하. 그러고 보니 ‘물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제 이름은 히루나입니다. 이곳에서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성수(聖獸)라 한답니다. 작은 마나힘.” 히루나라고 자신을 밝힌 성수(聖獸)는 물뱀과는 달리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눈 또한 물뱀하고는 많이 달랐다. 물뱀의 눈이 짐승의 눈이라면, 예서 눈앞의 존재의 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따스한 차가 가득 담긴 찻잔은 자신의 뜨거운 온기를 예서에게 나눠 주었다.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운, 붉고 투박한 토기그릇은 확실히 주발을 연상시켰지만, 소박한 맛은 있었다. 사제들은 그 후 아무 말 없이 예서를 데리고 그 곳을 나왔다. “어라?!!! 나는?!!!” 이라 외치는 물뱀은 무시하고 한없이 정중한 태도로 예서를 방으로 안내한 그들은 예서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러나 곧 히루나라는 성수가 뜨거운 차와 함께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돌아왔다. “말을 하시는 군요.” 그래서 지금 예서가 입고 있는 건 사제들의 옷이다. 난생 처음 입은 치마지만 그다지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도리어 색다른 경험에 기분이 썩 괜찮았다. 사람들이 예서에게 입히려하는 턱없이 짧은 스카프에 비하면 양반이었으니까. 덕분에 예서는 몸에 항상 천을 두르고 살았다. 예서는 지금 설명할 수 없는 희망에 가슴이 설렜다. 어쩌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서는 그렇게 믿었다. “아, 얘기는 들었지만 설마 했습니다. 어린 녀석이 하기에는 다소 무리한 일이었으니까요. 다행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잘못 되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참 많이 고생했을 겁니다.” “...........?” 많은 사람? 예서는 히루나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서가 눈을 끔벅이며 의문을 표시하자, 하루나는 나직이 소리 내어 웃었다. “후후후. 아닙니다. 그나저나 차빈님께 말씀 좀 잘 해 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이번에는 그냥 넘기기 힘드니까요.” “네?” “작은 마나힘을 이곳에 모시고 온 녀석 말입니다.” “물뱀님이 왜요?” “...물 ...뱀님?? 푸하하하. 물뱀님... 이라고요.” 히루나는 고개를 젖히며 목젖이 보일 정도로 호탕하게, 그리고 영문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예서를 보며 더욱 크게 웃었다. “저기, 그게... 이름을 물어봐도 얼굴만 우락부락 붉히다 갑자기 잡아먹겠다고 있는 대로 성질만 부리고,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요. 그렇다고 ‘뱀 새끼’라고 할 수도 없고요.” “뱀 새끼? 하하하. 차빈님이시군요. 물뱀이라. 앞으로 절대 녀석에게 이름은 묻지 마십시오.” 손가락 끝에 묻어있는 자신의 눈물이 신기한 양 들여다보며 히루나는 부드럽게 예서에게 말했다. “하하. 이름이 없으니까요. 성수(成獸)가 되지 않으면, 이름이 주어지지 않는 게 저희 성수(聖獸)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어린 성수들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 쪽, 마나힘의 세상에서는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서는 성수나 인간이나 이름이 큰 의미를 가집니다. 존재 그 자체이기도 하지요.” “네.”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예서의 얼굴에는 “진짜 미안한 짓을 저질렀구나.” 하는 난간함이 서려 있었다. 눈이 마주친 히루나를 향해 씩 웃는 예서에게 히루나는 같은 미소로 돌려주었다. “한 마디만 덧붙여 말씀 드리자면, 우리들은 사람처럼 때가 되면 어른이 되는 게 아니랍니다. 성수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늦어도 알에서 깨어난 지 오백년이 지나면 성수가 되는 게 보통인데, 물뱀? 하하하. 물뱀 그 녀석은 칠백 년째 성수(成獸)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수를 누린다는 우리로서도 꽤나 드문 케이스입니다. 아마도 성수(成獸)들의 보살핌 없이 혼자 부화된 때문이 아닌가 하고 저희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히루나는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다시금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작은 마나힘. 이름은 꽤나 그 녀석의 자존심과 관련된 물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빈님께서도 그것 가지고는 뭐라 안 하십니다. 뭐, 단지 죽이실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네.” 예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작은 찻잔을 들여다보며 나직이 대답했다. 죽인다? 히루나는 가볍게 웃으면서 말하지만, 예서의 귀에는 왠지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씀 잘 부탁드립니다. 마나힘 말씀이라면 아마도 죽이지는 않으실 겁니다. 단지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하시겠지만 말입니다.” “.............” “차 더 드릴까요?” “히루나님.” 참 이상하게도, 그저 매끄러운 물결뿐인 얼굴인데도 자신을 곧게 바라보는 히루나의 눈가에는 호감어린 따스함이,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잔잔히 새겨져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예서는 용기를 내었다. 어차피 말할 이는 이뿐이라 선택의 여지는 없다. 마주보던 눈을 조금 내리깔고 찬찬히 숨을 내쉬며 예서는 다시금 히루나를 불렀다. “저기, 히루나님.” “예.” “.......” “예. 말씀해 보세요.” “저 좀 도와주세요.” 찻잔 속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망설임에 입술을 달싹거리던 예서가 크게 숨을 들이셨다 내쉰 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잠시 히루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단단하게 말을 했다. 그러나 떨리는 입술에는 초조함이 꽤나 많이 묻어있었다. “제발요.” 찻잔을 쥔 예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얗게 핏기가 가신 예서의 손을 보는 히루나의 눈 속에서 점차 의문이 사라져갔다.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빌게요. 물론, 가끔씩 꿈을 꾼 적은 있지만요. 이런 곳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참 멋지고 신날 텐데....... 하고......” “작은 마나힘.” “하지만 정말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고. 또 이젠 충분하니까. 여기까지로 족하니까. 제발요. 가족들한테 돌아가고 싶어요. 입 꾹 다물고 어디 가서 이런 곳 있다는 말도 절대 하지 않을 테니까요. 도와주세요.” 예서의 두 눈에 서서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를 사리물어도 터지기 시작한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작은 희망이 주는 안도감이랄까. 이야기할 대상을 만났고, 부탁할 수 있다. 그만한 위안이 지금 예서에게는 다시 없었다. 그예 반해 그런 예서를 보는 히루나의 눈에는 점점 착잡함이 서리기 시작했다. “걱정 많이 하고 있을 텐데. 아니다. 분명 울고 있을 거예요. 하하. 저희 엄마 상당한 울보거든요. 저 닮아서 그렇대요. 아버지도 그렇고, 형들도 그렇고, 많이 찾고 있을 텐데....... 그러니까.....” 예서의 입에서는 흐느낌이,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찻잔 속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찾잔 속의 그 작은 파문들을 보며 히루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눈물이 많아서, 그리고 그 만큼 웃음이 많아서 형들의 놀림도 받고 사랑도 받던 예서였다. 그래도 남들 앞에서는 웃음만 보일망정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던 씩씩한 예서였는데 마음이 많이 약해졌나 보다. 예서는 마음을 다잡고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히루나를 향해 그 젖은 눈으로 씩 웃었다. “히루나님. 진짜로 시키는 건 무슨 짓이라도 다 할 수 있으니까요. 돌려만 보내주세요.” 이 며칠 상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예서의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빨리 돌아가고자 하는 조급함에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다. 지금 이 순간도 움찔거리며 터져 나오려는 두려움을 예서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내리 눌렀다. 그 두려움의 정점에는 끈적거리며 다가오는 차빈이 있었다. 영원히 그 커다란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그 말로 다 할 수 불안. 그건 공포였다. “이러다 미칠 거다.” 흘리듯이 내뱉는 혼잣말이나, 눈물을 머금은 예서의 갈라진 목소리는 너무도 애처로웠다. “마나힘.” “하루 종일 도망칠 궁리만 하는데, 그 커다란 성에서 단 한 발자국도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고. 하하. 저요. 용케 도망쳐도 갈 데도 숨을 데도 없는 처지에요. 그러니까 히루나님이 차빈이라는 사람에게 말씀 좀 해주시든지, 아니면 차라리 여기에 절 좀 숨겨주세요. 부엌 쪽방에서 허드렛일도 좋고, 저 일 잘해요. 하루 세 끼 밥만 주시면 돼요. 세 끼가 어려우시면 두 끼도 좋고요. 거적때기 하나면 그냥 마당 한 구석이라도 감사합니다. 그러니까요. 제발 그 사람한테는 보내지 말아주세요. 원래 신전이라는 데가 억울한 사람들 도와주고 하는 곳이잖아요.” 예서는 온 힘을 다해 히루나에게 매달렸다. 어쩌면 이 시간에도 차빈, 그 사람이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비록 보지도 그런 사실을 들은 바는 없지만 본능이 예서에게 말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다고. “마나힘. 여기는 작은 마나힘 쪽 세상에서 볼 때 그러니까 이계(異界)입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히루나님?” “예전에는 많은 왕래가 있었다고, 길이 많았다고 하더군요. 태고의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길을 열 수가 있었다는데, 하지만 지금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 쪽은 태고의 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예서는 흔들리는 눈으로 히루나를 보았다. 불길하다. 끝도 없는 나락에 떨어지는 자의 절망의 심장을 가지고 작은 실타래의 그 끝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히루나를 보지만, 그러나 히루나의 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말이다. “마나힘께서 오실 수 있었던 건 신탁과 성수(聖獸)의 힘과 성수(聖水)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덕분에 성수(聖獸) 하나를 우리는 잃어야 했습니다.” 점점 일그러져가는 예서의 얼굴을, 빛을 잃어가고 무너지고 있는 예서의 눈을, 잠잠히 들여다보는 히루나의 눈 속에는 잔인하게도 그 어떤 작은 동요조차 없이 한없이 고요하고 담담했다. 그리고 예서는 눈앞에 캄캄한 암담함에 자꾸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왜요? 무엇 때문에요?!!! 전 한 번도 원한 적 없는데요?!! 흑.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흑흑. 이건 정말 잘못된 거고, 잘못된 건 바로 잡는 거잖아요.” “글쎄요? 단지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마나힘은 결코 돌아가실 수 없다는 것뿐입니다. 돌아가실 수 없습니다. 저희 성수들은 그 길을 결단코 열지 않을 겁니다. 그러하오니...” “제발 이렇게 부탁드릴 테니까요.” 눈물로 범벅이 된 예서의 얼굴을 쳐다보는 히루나의 표정은 단호했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예서의 눈물은 얼굴을 지나 목을 타고 내려왔다. 예서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지고, 어깨의 떨림이 강해졌다. 목 메인 오열이 예서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비켜라.”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차빈을 막아선 건 대신전 최고(最高) 성수(聖獸) 히루나였다. 갑자기 사라진 예서로 인해 발칵 뒤집혀진 본성으로 황성에 있는 본가에서 예서를 찾았다는 연락이 온 건 이틀 전 늦은 오후였다. 예서가 황성에 있는 대신전 지하 레탁크 안에서 발견되었다는 말에 차빈은 안도하며 낮게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몸이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예서를 사제들이 구하지 못했다면 레탁크 안에서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 거라는 전령의 말에, 차빈은 그대로 이성을 잃었다. 이번에는 뱀 새끼를 반드시 죽이리라. 분노에 미친 듯이 말을 몰아 황성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이었다. 문지기는 서슬 시퍼런 차빈의 얼굴을 보자 두 말도 하지 않고 성문을 열었다. 차빈의 길을 가로 막으면 기다리는 건 죽음이나 문을 열면 자신은 저 변방으로 쫓겨나는 것으로 끝날 것이기에 주저도 망설임도 없이 문지기는 서둘러 문을 열었다. 성문을 통과한 차빈은 그대로 대신전으로 향했다. “차빈님.” “비켜라. 히루나.” “차빈님. 아십니까. 저희에게 있어서 성수(聖獸)를 하대하는 건 신의 대리인인 황제로 족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비켜라.” 차빈의 목소리는 조금의 흔들림 없이 단호했다. 그런 차빈의 모습에 낮게 한숨을 내쉬며 히루나는 입을 열었다. 차빈의 위협적인 으르렁거림에도 괘념치 않고 히루나는 담담했다. “지금 작은 마나힘께서는 쉬고 계십니다. 여기 오신지 며칠 되지 않아 그런지 힘이 많이 드신가 보옵니다. 오는 길도 수월치 않았고, 본의 아니게 오신 길이라 더욱 그리하신 듯한데, 잠시만이라도 이곳에서 쉬게 하시는 게 어떠하신지요?” “비키라는 내 말이 말 같지도 않은가 보군. 나에게 있어서 성수 따위는 베면 그만인 존재라는 걸 네가 모를 리 없을 텐데?” “차빈님. 작은 마나힘이 차빈님께도 소중한 분이시지만, 저희한테도 한없이 중요하신 분이십니다. 생각 없이 모시지는 않겠습니다. 지금은 이곳에서 안정을 취하시는 게 좋습니다.” “거절한다.” “............” 북풍한설보다 차가운, 한 치의 틈도 없는 차빈의 눈을 대하면서 히루나는 말없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예서가 잠들어 있는 방문에서 비켜섰다. 차빈은 비켜선 히루나를 지나쳐 방문 앞에서 잠시 서서 땀이 흥건한 주먹을 힘껏 주었다 피고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그런 차빈을 바라보는 히루나의 눈 속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잠시 후, 차빈은 방안으로 들어섰고 방문은 조용히 닫혔다. “차빈님. 마나힘은 저희들에게도 중요한 분입니다.” 히루나는 방문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끼이익. 차빈이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고 열었지만 오랜 된 나무문은 삐거덕거리며 자신의 연륜을 드러냈다. 그 소리에 낮게 혀를 찬 차빈은 한결 신중한 걸음으로 침상으로 다가갔다. 어두운 실내를 밝히는 건 고작 벽에 걸린 작은 횃불 하나뿐이었다. 그 작은 횃불이 누워있는 예서의 얼굴에 작은 음영을 만들고 있었다. 침상 옆에 서서 차빈은 그런 예서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예서의 속눈썹을 살짝 건드렸다. 그 매만지는 손길이 거슬렸는지 예서는 낮게 웅얼거렸다. 부드러운 미소가 차빈의 입가에 맺혔다. 차빈은 깰까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예서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 예서를 커다란 천과 함께 안아들었다. 예서는 편한 자세로 엎드려있는 배를 뒤집었다. 그리고 힘껏 밀어 호수로 띄웠다. ‘첨벙’ 하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배는 잠시 격하게 흔들리다 잠잠해졌다. 예서는 더듬더듬 배 위에 자리를 잡곤 양손에 노를 들어 천천히 호수 한가운데로 배를 저어 갔다. 지금 예서가 타고 있는 배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일인용 카누다. 가죽인 만큼 나무보다는 가벼웠지만, 그만큼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처음에는 종종 물에 빠져 곁에서 지켜보는 가신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식혀주곤 했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서 물에 빠지는 경우는 드물게 되었다. 그래도 서툴고 어눌한 구석이 여전히 남아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항상 조마조마하게 했다. 배는 낡고 오래되어 색이 퇴색된 곳이 여기저기 눈에 띄지만, 예전 아름다웠던 모습은 익히 상상할 정도는 남아있었다. 이 배는 예서가 타기 전까지 호수 곁 한쪽에 덩그러니 홀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버려진 존재였다. “어... 어라?!!” 순간 한쪽으로 배가 쏠리며 출렁거렸다. 역시 가볍게 생각하는 게 아닌데, 예서는 잠시 노를 멈추고 흔들리는 배를 진정시켰다. 물결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배에 그려진 그림은 마치 이야기책을 연상시켰다. 이 원색의 그림들은 때론 여러 개의 낱장의 그림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론 하나의 커다란 그림처럼 보이게도 했는데, 처음으로 카누를 만들었던 조상의 이야기라고 키쿰은 예서에게 더듬거리며 설명해 주었다.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예서는 겁에 잔뜩 질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키쿰에게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키쿰은 쿰의 동생으로 예서가 처음으로 쿰을 만난 날 쿰 뒤에 숨어있던 작은 아이다. 오늘도 여전히 바람결에 너울거리는 호수는 빛의 향연을 베풀고 있었다. 태양빛을 한껏 머금어서인지 호수는 바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눈부셨다. 그 바람에 눈을 좁혀 가늘게 뜨고 호수를 바라보는 예서의 얼굴에 즐거움이 살짝 어리다 사라졌다. “오늘은 왜 이렇케엑~~ 푸엣취!!! 케엑~~ 늦었어?!!” 물뱀은 두리두리한 눈을 있는 대로 뒤룩뒤룩 굴리며 사정없이 예서를 노려보았다. 물뱀의 재채기로 인해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덕분에 예서는 또 한 번 배의 균형을 맞추느라 힘깨나 써야 했다. 아직까지는 노를 젓거나 배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 용이하지 않았다. 뒤집히지 않는 예서가 못마땅하기라도 한 듯 물뱀은 그런 예서를 사납게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런 표정 속에서도 예서를 본 순간부터 반가움에 환해지기 시작한 감정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런 물뱀을 예서는 또렷한 미소를 입가에 담고 내려다보았다. “여기 바람은 꽤 상쾌한데, 거기 물결은요?” “궁금하면 들어와서 직접 확인해!!!!!” 물뱀은 씩씩거리다 악에 바친 듯 꽥꽥 소리를 내질렀다. “진짜요?! 에, 저번에 버럭 화냈으면서요.” “네 놈이 감히 어딜?!! 내려오지 마!!! 여긴 다 내 거다!!! 그나저나 왜 지금 나타난 거야?!!” “흐음, 아쉽군.” 진짜 아쉽기는 하나, 이런 나른하고 더운 날에는 물이 딱 제격인데 말이다. 그러니 절대 아니라고만 하는 물뱀에게 심통 겸해서 예서는 놀리게 된다. 그 날로부터, 그러니까 예서가 물뱀을 따라 대신전에 침입한 날로부터 물뱀은 저 상태다. 히루나라고 했다. 히루나가 직접 물뱀을 호수바닥에 목만 내놓고 박아 버렸고, 그리고 성수(聖獸) 히루나였기에 물뱀은 더욱 분해했다고 나중에 예서는 전해 들었다. 하여간 덕분에 물뱀은 석 달째 호수바닥에서 빼도 박도 못하고 목만 내놓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나중에 칼을 빼들고 호수로 들이닥친 차빈은 어쩐 일인지 그런 물뱀을 묵묵히 내려다보다 조용히 돌아섰다. 하긴 생각해보면 산다는 게 고역일수도 있다. 어쨌든 다행히도 차빈은 물뱀을 그렇게 외면했고, 덕분에 물뱀은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있은 후, 예서는 물뱀을 방문하는 일이 중요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오늘 늦어서 죄송합니다.” 예서는 잡아먹을 듯이 자신을 노려보는 물뱀을 모른 척하며 느물거렸다. 물뱀은 예서가 그나마 그 앞에서 편히 웃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중 하나다. “작은 마나힘. 멍청하고 둔한 인간들한테 뭘 배우겠다는 게야?!! 고작 인간 따위한테 배워서 뭐하려고?!! 그만둬!! 당장!! 왜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 따위를 해! 덕분에 나하고 놀 시간만 줄었잖아. 아쉬운 놈이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고? 췟! 치사하네, 이거.” 물뱀은 퉁명스럽게 소리치다 점점 자자들며 툴툴거렸다. 화가 풀린 거다. 단순한 물뱀은 화를 쏟아 붓고 나면 이내 풀렸다. “왜요? 여기 글 솔솔이 재미있어서 배울 만한데요. 덕분에 심심하지도 않고요.” 여전히 능글거리는 예서를 물뱀은 사납게 노려보았고, 예서는 무섭다 너스레를 떨며 배 밑창에 엎드려 누웠다. 그리고 턱을 괴고 배의 낮은 난간 너머로 눈만을 내놓고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출렁거리는 물결 때문에 예서의 눈에 물뱀도 따라 출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하. 죄송합니다. 내일부터는 늦지 않을 테니까요. 뭐, 확실한 장담은 못하지만, 그래도 노력은 하죠.” 예서의 눈이 조용히 웃고 있었다. 크고 시원한 반달형의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초승달이 되었다. 그 눈은 이상하리만치 맑고 청량한 느낌을 주었다. 유난히 동자가 크고 홍채가 검기에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이곳 사람들의 쌍꺼풀이 짙고 큰 눈과는 분명 사뭇 달랐다. 어쨌거나 처음보다는 많이 웃는다고나 할까. 그래도 아직까지는 호탕하고 시원스레 웃지는 않는다. “흥!! 인간이란 모를 존재야. 고작 백년도 못 살면서 뭘 하겠다고 그렇게 설치면서 사는지, 원. 나중에 보면 다 똑같던데. 매번 지들 조상들이 벌려놨던 일이나 반복하면서.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왜 사냐? 우린 너희 없어도 불편하지 않아.” 물뱀은 미간을 찡그리며 뚱하게 말했다. 아직도 심기가 편치는 않아 보이는 것이 화가 덜 풀린 듯싶다. 아니다. 답지 않게 튕기면서 그런 척 하는 걸 거다. “왜 사냐고요? 그건... 그건.......” 그리고 물뱀의 아무 뜻 없이 내뱉은 질문이 삽시간에 예서의 가슴에 박혔다. ‘왜 사냐’는 흘리듯 말한 질문 하나. “왜 사냐 하면, 살아 있으니까. 정신을 차려 보니 살아있는 겁니다. 그러니깐 인간은 사는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왜 사냐는 질문을 하지 않고 사는 삶이 가장 멋진 삶이라네요. 깊은 산골의 어수룩한 늙은 농부처럼, 흙에서 와서 흙과 함께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농부 같은 마음으로, 그런 농부처럼 마음에 하늘을 담고, 흙을 담고 살아야 나중에 죽어서 좋은데 간데요. 마음에 무거운 것들만 가득 담으면 무거워서 자꾸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는다고........” 위로였다. 이 낯선 곳에서 처음으로 받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위로 한 자락.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예서는 처음 알았다. 그 말의 원래 주인의 체온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 예서는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물뱀을 향해 조용히 웃었다. 그 눈이 촉촉했다. “흥!! 인간 주제에 잘난 척은. 네 놈이 히루나냐?!!” 머쓱해서 고개를 외트는 물뱀을 보는 예서의 입가에는 물기어린 서글픈 미소가 있었다. 그러나 곧 예서는 짐짓 떨치듯이 하늘을 보면서 배 밑창에 벌렁 드러누웠다. “제가 어렸을 때 그렇게 살고 싶다고 엄마가 그랬거든요. 저도 그렇게 살라고 그랬는데, .......뭐, 갑자기 생각 난거예요. ...아무도 없는 집에서 둘이서 라면도 끓여먹고, 그렇게 혼자서 독차지 하는 시간이 제일 좋아서 일부러 아버지하고 형들 집밖으로 쫓아내기도 했는데.” 맑고 파란 하늘을 보며 중얼거리던 예서는 곧 두 팔을 엇갈려 얼굴을 가렸다. “배고파.” 깜박 잠이 들었던 예서는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 처음에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부드럽게 흔들리는 배와 눈에 가득 들어오는 파란 하늘로 인해 눈 깜짝할 사이, 그 짧은 찰나에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힘찬이와의 새벽에서부터 지금까지. “배고파. 작은 마나힘.” 무표정하게 아무것도 담지 않고 하늘을 지극히 바라보던 예서는 요새 늘 입가에 붙어있는 체념의 빛을 지우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갈라진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흐음. 간 건 싫다면서요?” 심드렁하게 그러나 편안하고 여상한 목소리와는 달리 울음을 참는 듯 얼굴이 적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이내 숨을 들이마시다 내쉬기를 반복하며 예서는 마음을 달랬다. 자다 일어나서 그런가보다. 예서는 영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았다. 마음의 빚이라서인지, 마치 금기라도 되는 듯 이런 모습은 그 누구에도 예서는 보이길 원치 않았다. “네 이 놈!!! 정녕 네 놈이 누굴 지금 뭐로 보는 게야?!! 이 내가 늙은 계집종이냐?!! 네 놈이나 죄다 갈아 먹어라!!!” 예서가 타고 있는 배를 잡아먹을 듯이 물뱀은 노려봤지만, 예서는 그런 물뱀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작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처음 이런 상태의 물뱀을 본 건, 물뱀이 바닥에 박힌 지 꼬박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당혹한 예서는 어떡하든 먹이를 주려 했다. 그러나 물뱀은 그 어떤 것도 먹을 형편이 되질 못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고기를 갈아서 주자였다. 그러나 물뱀은 호수가 떠나가도록 악에 받친 소리를 내지를 뿐이었다. 나중에 예서는 성수(成獸)들은 먹이를 즐기거나 배고파서 먹는 게 아니라 탈피 전 성장을 위해서 먹는 거라는 것을 알았기에 적이 안심 할 수 있었다. 물론 물뱀처럼 예외적인 존재도 있긴 하다. 물뱀은 욕구불만의 충족을 위해 먹이를 찾는 듯 보였으니까. 본인도 모르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욕구불만이라 문제이긴 하지만, 그리고 때론 진짜 배고픔에 먹이를 찾는 듯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래서 예서도 일단 안심을 했다. 예서에게 있어서 더 이상의 죽음은 싫다. 죽음은 견딜 수 없는 지독한 고통이었다. 텅!! 텅!! 그 때였다. 호수를 흔드는 소리에 예서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호숫가를 향해 환히 웃었다. “쯧. 저 놈 또 왔네.” 쿰은 예서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줄 때까지 굵은 나뭇가지로 호수를 두드렸다. 물뱀이 자유롭게 호수를 헤엄쳐 다니던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쿰은 꽤나 즐거운지 아주 의기양양하게 호수를 두드렸다. 그 고통을 당하고도 변하지 않은 쿰이 예서는 보면 볼수록 고맙고 그 만큼 미안했고 또 가슴이 아팠다. 어쨌든 자신의 잘못이지 않는가. 쿰은 예서로 인해 목소리를 잃었다. “쿰!!” 예서가 자신을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자, 쿰은 환하게 웃으며 깊이 허리를 굽혔다. 석 달 전, 차빈 본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예서가 처음 한 일은 보이지 않는 쿰을 찾는 일이었다. 항상 예서의 옆에서 재잘거리며 예서의 시중을 즐겨 들어주던 쿰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쿰의 행방에 대해 함구하는 사노들을 다그쳐 예서가 미친 듯이 달려갔을 때는 고열을 내며 쿰은 심히 추레하고 누추한 그리고 좁고 어두운 방안에서 혼자 끙끙 앓고 있었다. 쿰의 입 주위에 검게 말라붙은 피가 칙칙한 색을 내며 쿰 가까이에 죽음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차빈의 손에 예서가 머물던 궁을 관리하던 사노 셋이 죽었다고 했다. 다행히도, 천만 다행히도 책임을 자처하고 나선 늙은 사노 셋만이 죽음을 당했다고, 손발을 바들바들 떨며 하얗게 무너지는 예서 앞에서 진심어린 눈빛으로 안도하면서 그들은 예서에게 말했다. ‘다행히도’라고. 그리고 그렇게 죽음을 면한 나머지 사노들은 모조리 채석장으로 보내졌고 죽어야 마땅할 쿰은 죽은 사노들의 간청으로 그나마 혀만을 잃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쿰이 만약 살아서 깨어난다 해도 예서가 머물고 있는 궁 안의 일이 아닌 외성 주방에서 험한 허드렛일을 하게 될 거라는 사노들의 말에 예서는 용서할 수 없었다. 단 한순간의 치기어린 자신의 행동으로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을, 차빈을,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일 이후 예서는 거의 매일 악몽을 꾸었다. “저 갈게요. 내일 또 뵙겠습니다.” 예서는 바삐 노를 들었다. “쿰.” 예서의 반가운 부름에 쿰은 머리를 조아렸다. 털썩 주저앉으며 그런 쿰의 머리를 예서는 짓궂게 헝클었다. 처음부터 한없이 예서를 따랐던 쿰은 예서의 도움으로 살아난 후 더욱 그리했다. 항상 일정한 시간에 호수로 나오는 예서를 쿰은 매일 시간에 맞추어서 만나러 왔다. 물론 글공부의 재미도 쏠쏠하기는 했지만, 예서가 먼저였다. 그리고 외성 주방의 사노들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했다. 차빈에게 발각되는 날에는 책임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부모조차 없는 불쌍한 그러면서도 어린 동생들을 씩씩하게 책임지는 어린 쿰에게 있어서 예서의 존재는 특별한 의미를 가짐을 알기에 그들은 그렇게 눈감아 주었다. “우리 어제 어디까지 했더라?” 예서의 질문에 쿰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막대기를 꾹꾹 눌러 바닥에 써 내려갔다. 얼굴은 설렘으로 붉게 물들었고, 쿰의 솜씨는 서툴렀지만 그만큼 온 정성을 기울이고 있었다. 쿰의 손에 들린 막대기는 얼마나 만지작거렸으면 표면이 매끄럽게 윤기가 흘렀다. 그리고 그 막대기를 쿰의 손에 쥐어준 이가 바로 예서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죄책감, 미안함, 서러움, 고뇌에 깨어난 쿰을 붙잡고 흐느껴 울던 예서는 그 후 단 한 번도 쿰을 찾지 않았다. 그런 예서를 쿰이 먼저 찾았다. 사노(私奴)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행동이었다. 호숫가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예서를 기다리고 있는 쿰을 본 순간, 자신을 향해 여전한 눈빛과 미소를 보내는 쿰을 보면서, 예서는 수많은 격한 감정으로 응어리진 마음을 내려놓았다. 죽이거나 죽고 싶었다. 미치거나 죽거나 그래야만 끝을 낼 것 같은 그런 추한 감정들을 하나하나 내려놓으며 쿰을 위해 글을 배웠고, 매일 호숫가에서 글을 가르쳤다. 악에 미쳐 살기에는 예서를, 그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어... 틀렸어. 여기, 여기... 그래.” 그리고 이곳의 글을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가축과 격이 같은 사노가 글을 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죽음이 내려지는 그런 절대적인 전유물. 그것을 몰래 예서는 쿰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쿰과 대화를 다시 하기 위해. 자신 때문에 잃게 된 말 대신에 글을 그 손에 쥐어주기 위해. 턱없이 무모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 때가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막으리라. 예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늘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야. 시원하고 색이 많거든. 보고 있으면 지루하지 않아. 그래서 평생 하늘만 보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아버지랑 별 보던 생각난다. 하하. 쿰은?” 예서는 손가락으로 글을 하나 썼다. 그리고 쿰도 곧 그 옆에 더듬거리듯 삐뚤빼뚤 글 하나를 썼다. “짠물?” 쿰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쿰은 달싹거리며 무언가를 설명하고 싶어 했지만, 이내 어깨를 늘어뜨리며 힘없이 웃었다. 말로도 글로도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이 안타까운 모양이다. “괜찮아. 쿰, 금방이야. 금방 쓰고 싶은 데로 다 쓸 수 있을 거다. 나도 그랬어. 그러니까 괜찮아. 그런데 너 짠물이 좋은 게 아니라 보고 싶은 거지? 그렇지? 음, 우리 다음에 보러 갈까? 하하하. 그럼, 짠물 다음은?” 예서의 질문에 쿰은 어른스럽게 씩 웃었다. 어린 나이에 포기를 배운다는 건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죽음의 무게 앞에서는 예서도 어쩔 수 없었다. 미칠 듯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는 감정도, 그리고 자신도, 그 모든 것을 물 흐르듯 흘려보내리라. 예서 자신은 그렇게 다짐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쿰의 머리를 쓰다듬는 예서의 손길만큼 예서의 눈에는 아픔이 서려 있었다. 그래도 사람은 산다. 살아야 한다. 살 거다. “산? 설마, 인가(仁家)? 그 무시무시하다는?! 그 산이 좋아?!” 심호흡을 하고 어깨를 으쓱이며 마음을 추스른,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는 예서가 다시 한 번 더 쿰의 머리카락을 짓궂게 헝클었다. 그래, 사람은 사는 존재다. “하아. 하아.” 오늘도 예서는 꿈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선잠을 깼다. 헐떡이며 자지러지게 잠에서 깨어난 예서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언제 잠이 들었던 걸까. 그런 예서의 손아귀에는 파피루스가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었고, 머리맡 침상 옆 거대한 사자대(寫字臺)위의 등불은 조용히 방을 밝히고 있었다. 자신이 파피루스를 읽고 있었던 것까지는 기억에 있는데 그 다음이 없다. 예서는 맥없이 천장을 바라보다 갑자기 무언가 내리누르는 듯 숨이 막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입을 벌리고 숨을 헐떡이며 가슴을 쥐어뜯어도 숨이 편하게 돌아오지 않는다.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다. 가위에 눌리다 깨거나 아니면 밤에 자리에 누우면 종종 이렇다. 숨을 크게 몰아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서성거리니 그제야 작게나마 숨통이 트였다. 예서는 부들거리는 손을 마주잡고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끈적거리는 식은땀과 차가운 몸이 이제 다시 잠자리에 들기는 무리인 듯싶어 예서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바깥 공기라도 마시면 조금 나아지려나. 예서는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을 옮겼다. 스윽. 방문 앞을 지키고 있는 무장(武裝) 가신(家臣)들이 예서가 문을 여는 기척을 보이자 문을 등지고 정면을 향하던 자세를 절도 있게 돌리며 긴장한 시선으로 문을 주시했다. 짙은 어두움이 무겁게 내려앉은 밤중이라, 가신들의 숨소리도 잡힐 듯한, 조용한 복도를 울리며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기침하시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입니다. 좀 더 주무시지요.” 문을 지키고 있던 가신 중, 머리가 희끗희끗하나 가장 건장해 보이는 자가 한걸음 앞으로 나와 예서에게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냥 깬 김에 그냥 산책이나 할게요.” ‘다시 눕는 건 싫으니까.’ 라는 말을 감춘,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과 한없이 침전된 목소리의 예서다. “밤이 깊습니다.” “조용히 혼자 있고 싶으니까요.” ‘그러니까 아무도 방해하지 마라.’ 그 뜻을 내포한 말을 무겁게 내며 예서가 무작정 한걸음 내딛자, 잠시 한 뜸을 들인 가신들이 머리를 짧게 조아린 후 뒤로 물러섰다. 그런 그들 사이를 예서는 지친 걸음으로 스쳐 지나갔다. 예서에게 말을 건네던 자가 가신 하나를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신호를 받은 자는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들고는 황급히 어딘가로 달려갔다. 그 후 그들은 자의로 해석한 예서의 요구대로 정처 없이 헤매는 예서에게서 평소보다 조금 멀찌감치 떨어져 조심스러운 걸음을 옮겼다. “작은 마나힘.” 예서가 부름에 고개를 돌리니, 예서 뒤로 우담궁의 부모주 나루가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마치 정무를 보다 바로 불려온 사람처럼 옷차림새가 단정했다. 분명 자다가 나왔을 터인데도 정갈했다. 요 몇 달 동안 예서가 가는 곳이라면 그 어느 곳이든지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나루를 가신들이 깨워 대령한 것이다. “부모주.” 예서의 부름에 나루는 고개를 깊이 숙여 예를 표했다. “죄송합니다.” 잠을 잘 청하지 못하는 예서로 인해 종종 잠자리에서 불려나오는 나루에게 예서는 진심어린 사과를 했다. 분명 혼자 있고 싶다고 했는데, 예서의 말뜻을 이해했으면서도 이렇듯 꼭 나루를 부르는 저의가 뭔지 모르겠다. “그런 말씀은 가신들에게 하시는 게 아닙니다.” 나루는 조용히 웃으며 예서를 나무랬다. “잠은 좀 주무셨습니까?” “내일부터는 저 아저씨들 좀 어떻게 해주세요.” 뚝뚝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뒤를 따르는 딱딱한 나무병정 같은 가신들을 흘끔 보며 예서는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상당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하긴 우르르 몰려다니며 하루 종일 예서의 곁에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장승마냥 버티고 있으니 싫을 밖에 없을 것이다. “저들의 임무는 작은 마나힘을 귀찮게 하는 거라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 두십시오. 그나저나 오늘은 어제보다 한 시각 정도 더 주무신 듯싶은데요.” 웃느라 눈가에 주름이 잡힌 나루는 예서의 걸음에 맞춰 반걸음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다소 마른 체격의 나루는 비록 지금은 우담궁 궁내에서 정무를 보고 있지만 여타 다른 가신들처럼 어려서부터 칼과 함께 커 온 단단한 근육질의 사내다. 적당히 튀어나온 광대뼈와 꽉 다물린 입매가 뚜렷해 상당한 사내다움을 발산하지만, 부드러운 눈매에서는 도리어 지적인 풍모를 풍겼다. 예서의 뒤를 조용히 따르는 걸음걸이 또한 꽤나 느긋하고 여유로워 묘하게 시선이 가는 그런 꽉 찬 사내의 냄새가 났다. “어쨌든 내일부터 산책은 혼자 할게요. 사고 따윈 칠 생각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저러는 거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생각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지는 듯, 예서가 혀를 두어 번 차자 나루가 나지막이 소리 내어 웃었다. 가라앉은 밤의 대기에 걸맞은 낮고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낮에 호숫가에 가실 때도 항상 혼자시지 않습니까?” “그 시간까지 붙어 있다면 지금처럼 말로 하지 않죠.” “하하하. 그럼요?” “욱하면 칠 수도 있다고 전해주세요.” 이기죽거리는 예서를 보며 나루는 호탕하게 웃었다. 밤이라 그런가. 말도 많고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예서로 인해 나루는 즐거웠다. 즐겁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라 나루는 자신도 모르게 들떠 무례하게도 지금 마나힘 앞에서 큰 소리로 웃게 된다. 그런 나루를 따라 나직이 웃다가 나른한지 예서는 기지개를 켰다. “여기는 신기하게도 달이 두 개네요. 푸르스름한 게 하나, 불그스름한 달이 또 하나. 밤에 머리 위에서 낯선 게 둥둥 떠다니니까 굉장히 이질적이고 때론 무섭지만. 구름이 껴서 그런가. 으, 오늘따라 더 으스스하다.” 잦아들 듯이 혼잣말을 하던 예서가 걸음을 멈추고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이 아련하다. 잔뜩 먹구름이 낀 하늘처럼, 금방이라도 그 짙은 밤하늘 같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다. 그러나 이내 그 모든 것들을 깨끗이 지우려는 듯, 하늘을 향하던 시선을 조금 내려 나루를 보며 조용히 웃다 다시금 고개를 들어 예서는 멀리 보며 심호흡을 했다. “흐음, 제가 있던 곳의 달은요. 하나고, 그걸 무슨 색깔이라고 해야 할까. 하긴 달은 색깔이 아니라 빛이구나. 달빛. 하하.” 가만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예서는 평소와 달리 말이 길었다. 어쩜 원래 천성적으로 활달한 성격인지도 모르겠다. 나루는 가만히 하늘을 보는, 웃어도 웃음에 물기가 감도는 예서를 보며 생각했다. 저 웃음은 원래 어떤 색깔이고 빛이었을까. “그렇습니까.” “여기에 비하면 소박해요. 작고. 그런데 저기 붉은 달 옆에 있는 별이요.” “아, 파인 말씀이군요.” “파인?” “하하. 예. 모든 산 자는 죽은 자를 따라가고, 그 죽은 자들이 우리를 기다리며 쉬는 곳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곳입니다. 가슴에 사무치게 그리운 자들이 나를 기다리는, 우리가 돌아갈 우리의 고향이자 어머니인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위안 그 자체입니다.” “......부모주.” “나루입니다.” 나루는 왠지 예서에게 만큼은 직책이 아닌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다. 이름보다 더 친근한 것이 이제는 직책이었건만, 밤은 사람을 너무 풀어놓는 것이 탈이다. “부모주.” “예. 작은 마나힘.” 나루는 자신이 정정을 해도 고집스럽게 자신을 부모주라 부르는 예서를 잠시 쳐다보다 머리를 짧게 숙이고 공손히 대답을 했다. “부모주는 죽어서도 갈 곳이 있네요.” 있는 대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예서의 입가에는 어느덧 한 자락의 웃음도 남아있지 않았다. 예서는 서서히 고개를 내려 묵묵히 땅을 보았다. 그 목소리가 갈라지고 가라앉은 것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나루의 낯빛이 서늘해지며 얼굴이 단단하게 굳었다. “마나힘?” “하는 일도 없고 분명 힘든 일도 없는데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아침나절에 고작 글 몇 자 배우고 한량처럼 유유자적하는 게 전분데도 이상하게 두렵고 힘겨워요. 하하. 이상하죠? 저도 제가 이상합니다.” “작은 마나힘.” “이렇게 살라 데려온 건 아니라는 거 정도는 알아요.” “..............” “대체 내 앞엔 뭐가 있을까.” 예서는 두 개의 달 아래에서, 예서로서는 너무 이국적이라 도리어 이질적인 꽃들이 한껏 만발한 정원 한가운데에서 나루를 다부지고 올곧게 바라보다 다시금 하늘을 우러르며 답을 바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갈 수 있을까.” 예서가 입고 다니는 옷은 그들의 눈에는 확실히 민망했다. 그러나 예서의 눈에는 하체만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그들의 옷차림새가 더 남세스러웠다. 짧은 바지도 아니고 치부만 가린 듯한, 그 치마라니, 보는 것만으로도 남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예서는 황성 대신전에서 얻어온 옷을 입었다. 밑단을 한 뼘 정도 자르자, 활동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예서가 마구잡이로 자르는 바람에 올이 듬성듬성 빠져 다소 흉한 구석도 없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예서의 눈에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물론 가신들과 가노들은 그런 예서의 옷을 벗겨내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그러나 예서는 꿈쩍도 안 했다. 예서는 치렁치렁한 옷깃을 팔랑거리며 자신이 거처하고 있는 우담궁의 계단을 성큼 뛰어 내려갔다. 계단 위에 서 있는 거대한 궁전과 함께 그것을 지키고 있는 웅장한 계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앞에서 절로 머리를 조아리게 했다. 계단 앞에는 벌써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거침없이 사노들이 열어준 마차 안으로 들어서는 예서의 얼굴은 기대로 잔뜩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예서가 거처하는 우담궁은 성내(城內) 제일 안쪽, 차빈이 거하는 궁 오른 쪽에 자리하고 있다. 내성에서는 가장 작은 궁이지만, 한편으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자랑하는 궁이었다. 그 궁이 예서의 오랜만의 외출로 인해 새벽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즐거우십니까.” 예서가 자리에 털썩 앉자마자, 뒤따라 들어오던 나루가 껄껄 웃었다. 마치는 말들의 힘찬 투레질과 함께 경쾌하게 출발했다. 마차 오른쪽 장방형(長方形:직사각형)의 커다란 창문 아래에는 너른 턱이 있어 사람이 앉을 수 있게 되어 있었고 간단하게 목을 축이거나 허기를 때울 수 있는 시설 또한 잘 갖춰진 널찍한 마차에는 나루말고도 또 다른 가신이 타고 예서를 보필했다. “하하. 네.” 차빈 본성 중에서 일단 내성(內城)은 가신이나 혹은 일반 백성들이 거주하는 외성(外城)과는 달리 수많은 궁들과 그 사이를 이어주는 광장들, 그리고 정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내성의 궁들은 한꺼번에 만들어지고 조성된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지은 것들인지라, 궁들은 세월의 장대함을 뿜어내며 저마다의 특색을 가지고 차빈가의 영광을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이렇듯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내성은 의외로 성벽으로 외성과의 경계를 두지 않았다. 고작 성인 허리께 정도의 낮은 벽이 해자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서 너 대의 마차가 동시에 넉넉히 드나들 수 있는 거대한 돌다리를 오직 하나만을 거느린 해자는 폭이 족히 200미터는 되었다. ‘해자’ 란 전쟁이나 침입을 대비해서 성 둘레의 땅을 파서 만든 못으로, 장정의 키를 훌쩍 넘은 깊이의 해자에는 배를 띄우지 못하게 되어 있었고, 물풀 한 포기 물고기 하나 없는 맑은 물만이 넘실대는 바닥에는 커다랗고 평평한 돌들이 촘촘하게 깔려 있었다. “손가락 빨고 떼 부리는 짓은 옛날 옛적에 버렸거든요. 다섯 살 때 강이 형한테 작살나게 밟히고 나서요. 하하하. 생일 선물로 받은 공을 한이 형이 바로 다음 날 가지고 나가서 터뜨려 왔거든요. 새 거 사준다고 아무리 달래도 안 되니까 방으로 질질 끌고 가서 이불 뒤집어씌우고 팼다는 거 아닙니까. 난생 처음 맞은 거라, 밤에 이불에다 실례하고 자다 경기하고. 하하. 난리도 아니었죠. 다른 건 생각이 희미한데 엄마가 하얗게 질렸던 게 또렷해요. 아마 형이 그런 건 엄마한테 막무가내로 떼를 부려서 더 그랬을 거예요. 그 인간 태생이 마마보이거든요. 본성은 브라콤이고. 그런데 그건 그냥 장난이었더라고요. 진짜 딱 한 번 맞아 봤는데요. 허, 사람 잡데요. 그 후부터는 알아서 기다가 가끔씩 꿈틀하다가 그렇게 불쌍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방법을 찾을 겁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싱긋 웃는 예서가 싱그럽다. 덩달아 나루도 함께 지긋이 웃었다. 굳이 웃는 저 얼굴에 ‘절대 안 된다.’ 정색하며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다. 돌아갈 수 없다. 그런 사실을 예서 자신이 모를 리 없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절대 희망을 버릴 수 없죠.” 예서가 탄 마차가 내성 안의 궁과 궁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 외성 쪽으로 경쾌하게 나아갔다. 외성은 본성의 주인이 거하는 내성과는 다르게 일반 사병들과 성의 일을 하는 평민들, 그리고 가신들과 그의 식솔들이 기거하며 살고 있었다. 사병들의 훈련장과 기병대의 마구간, 군대 막사, 크고 작은 집들과 상점들, 심지어는 신전까지 있었다. 나이든 노인네들은 서늘한 나무그늘에 모여앉아 물담배를 나누고 있었고, 어린 아이들은 길거리를 뛰어다니며 놀기에 바빴다. 젊은 아낙네들은 손에 한 가득 빨래 거리나 음식 거리, 때로는 투정을 부리는 아이를 한 팔로 거뜬하게 들고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사람들이 기르는 가축들의 소리조차 예서의 귀에 정겹게 울렸다. 내성과는 다르게 분주함으로 가득했다. 거대한 하나의 마을이었고, 그런 외성이 내성을 감싸고 있었다. 예서는 본성 외곽의 마지막 보루인 외성의 성문을 벗어나자마자, 마차의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여닫이 창문은 유리가 아니었다. 하긴 유리라는 것 자체가 없으니까. 촘촘한 나무 격자로 만들어진 창문은 교차점마다 예쁜 꽃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고, 원색의 꽃들 틈새로 밖을 내다볼 수 있게 되어있었다. 예서가 자신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창문을 벌컥 열자, 빠르게 달리기 시작한 마차 때문에 바람 또한 빠르게 예서의 얼굴을 치고 사라졌다. 예서는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그리고 힘껏 꽥꽥 소리 쳤다. “야!!!!! 이 우라질에 난장을 맞을 놈아!!!!” “............;;;” 차빈 본성의 거대한 성문 밖은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들판이었다. 들녘은 황금빛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눈부시도록 고운 밀밭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예서를 향해 손짓했다. 지평선 너머 끝없이 밀밭은 이어지고 있었다. “와!!!” 밖으로 상체를 반쯤 내민 예서는 한없이 들떠 보였다. 그것이 조금은 과장되어서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는 예서가 나루는 안쓰러웠다. “몸은 들이시지요. 작은 마나힘. 위험하십니다.” 예서는 자신에게 나직하게 주의를 주는 나루를 흘끔 보았다. 나루의 근엄한 목소리에도 주눅 들지 않고 예서는 눈을 반쯤 접으며 짓궂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NO’라고. 본성 가신 중에서 중간급 정도의 나루는 지금 예서가 머무르고 있는 우담궁의 ‘부모주’다. ‘모주’란 가신들의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직책이며, 내성의 궁마다 모주와 부모주 아래 그들을 보필하는 일반 가신들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각각의 궁을 관장하는 모주들의 우두머리가 ‘모주간’이다. 그 모주간의 셋째 아들이자 우담궁의 부모주인 나루가 항상 그렇듯이 예서의 이번 나들이에 동행하게 된 것이다. 가노인 쿰의 일이 생기기 전에는 워낙 움츠려있는 예서가 몇 명의 가노 외에는 자신의 옆에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에, 이례적으로 차빈의 묵인 하에 최고(最高)의 모주인 모주간 찬마밀과 우담궁의 모주가 가노들에게 ‘마나힘’의 시중을 들게 했었다. 그래서 그 사건 때 가신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하긴 가신들이었다면 일이 그 지경이 되도록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금만요.” 눈을 감고 예서는 바람을 음미했다. 그리고 그런 예서를 바라보는 나루의 눈은 한없이 따스했다. 이제야 옆에서 모시게 된 주인의 웃는 얼굴을 보며 나루는 문득 저 미소에 항상 질 것 같은 예감에 사로 잡혔다. “그동안 많이 답답하셨는지요?” 외성을 벗어난 마차는 여섯 마리의 힘찬 말을 앞세우고 바람처럼 빠르게 ‘맥이’를 향해 달렸다. ‘마나힘궁’이라 행간에 불리고 있는 우담궁은, 십여 년 동안 비어있던 마나힘의 자리가 채워진 차빈 성은, 예전의 삭막함을 조금씩 걷어내고 있었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맥이’에서 장이 열리는 날이다. 본성의 모주간 찬마밀은 예서의 기분 풀이를 위해 저번 달에 이어 이번 달도 나들이를 준비했다. 두어 시간을 내쳐 달린 마차는 도시 ’맥이’의 중심부에 다다를 수 있었다. 황성 다음으로 큰 차빈 본성은 이 지역의 중심이다. 그래서 그예 딸려있는 ‘맥이’에서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정기 장에는 어지간한 사람들이 다 모여 들었다. 물건을 팔려고 하는 사람들과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뿐 아니라, 그저 장 구경을 하려고 나온 사람들, 심지어 각다귀들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풍물패들과 바람잡이들까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용광로처럼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열기를 뿜어내었다. 시내 전체가 거대한 시장터였다. 상점마다 물건이 넘치고 노점들로 인해 발 디딜 곳이 없었다. 흥정하는 소리, 손님들을 호객하는 소리, 심지어 싸우는 소리까지 수많은 소리들이 한데 어우러져 삶의 열정들이 넘실대고 있었다. 그 사이를 헤치고 예서를 태운 마차는 천천히 걸었다. 창문은 도시 외곽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부터 굳게 닫히고 그 위로 잠자리 날개 같은 얇은 천이 드리워졌다. 얇은 천이기는 해도 마차 안은 아무래도 빛이 가득한 바깥보다는 어둡기 때문에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예서가 타고 있는 마차는 지위가 낮은 귀족이나 돈 꽤나 만지는 상인들이 모는 마차라 그다지 사람들의 눈을 자극하지는 않았다. 간혹 예서가 타고 있는 것과 같은 마차가 예서들 옆을 지나가곤 했다. “물건을 다 사고 나면 연통이 올 겁니다. 아마도 점심때쯤 될 듯한데, 작은 마나힘, 어디 특별히 보고 싶으신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창문에 코를 박고 감탄의 감탄을 하는 예서를 가만히 지켜보던 나루가 미소를 지으며 나직이 입을 뗐다. 사실 이번 길은 예서의 나들이만이 목적이 아니다. 본성에서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는 중요한 날이기도 하다. 도시에 들어선 이 후 연신 입맛만 다시며 아쉬워하는 예서의 눈이 있는 대로 휘둥그레 커졌다. “어? 정말요?! 진짜죠?!! 저번에는.... 음........” 그런데 그냥 억울하다. 피 같은 첫 나들이였는데, 그 좋은 날씨에 꽁꽁 얼린 동태마냥 자신은 음침한 마차에서 움쩍달싹 못했다. 어느 누가 차나 홀짝거리려고 시장바닥에 팔 걷어붙이고 나서는 사람도 있던가. 그 당시야 그것마저도 감지덕지였지만, 지금은 괜히 괘씸하다. 그래서 “저번엔 절대로 안 된다고 하고선 오늘은 된다고?” 라는 불퉁한 시선으로 예서는 나루를 쳐다보았다. “하하. 예. 오늘은 되도록 마나힘께 즐거운 시간이 되게 하라고 모주간께서 부탁하셨습니다. 짧은 외출이라면 조심해서 모시라고 말입니다.” “헤, 그 무서운 할아버지가요? 진짜요?!” 예서는 너무도 뜻밖이라는 듯 나루를 향해 되물었다. 눈사람마냥 하얀 머리카락과 수염을 자랑하는 건장한 체격의 모주간은 항상 근엄한 얼굴로 예서에게 나무라거나 주의를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항상 예서 앞에 허리를 겸허하게 숙이고는 있지만, 모주간에게서 느껴지는 건 앞에 있는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권위였다. 그래서인지 모주간의 말에 예서는 토를 단 거의 적이 없다. 번번이 졌다. 그건 본성 사람들도 익히 다 아는 사실이라, 그래서 예서가 똥고집을 부릴라치면 그저 모주간을 모셔왔다. “작은 마나힘. 모주간이십니다.” “네. 모주간 할아버지.” 예서는 진지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즐거움에 겨운 장난의 연장선이었다. “그냥 모주간이라고만 하셔야지요. 그리고 말씀 낮추어 주셨으면 하오니, 어떠하신지요. 작은 마나힘, 이제 낮추실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 ㅇ... 으음.....” “잘 하셨습니다.” 나루는 얼렁뚱땅 넘기는 예서를 향해 짧게 예를 표했다. 그러나 예의바른 행동과는 상반되게 그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계에서 와서 그런 걸까. 자신이 지금 부여받고 있는 자리에 대한 자각도 더불어 힘에 대한 자각도 없었다. 그게 천하다기보다는 순수해서 나루는 그 앞에 있으면 마냥 즐겁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지금처럼. 외모도 외모지만, 작은 마나힘은 아무리 봐도 확실히 이곳에서는 흔치 않는 사람이다. 설명하기가 수월치는 않지만, 조금은 거칠고 길들여지지 않은 천한 뱃사람들에게나 맡아지는 냄새가 난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서에게서 나는 냄새는 그립다. 그래서 가끔 문득 궁금하다는 생각이 드는 나루였다. 예서가 살던 이계는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계급과 신에 매인 이곳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신과 황제에 대한 불충이기에 감히 입에도 담아 본 적 없는 나루지만, 문득 젊은 혈기에 생기는 세상에 대한 반발심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 때론 이 작은 틀을 벗어나고자 허덕이는 꿈을 꾸곤 하는 나루로서는 예서가 신선했다. 왠지 나루 자신을 억압하는 이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 보였다. 소박한 만큼, 그 만큼 말이다. 나지막하나 말을 할 때 상대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는 거나 눈앞의 모든 사람을 존대하는 것을 보면 분명 막자라거나 허술한 집안의 사람은 아니다. 재밌는 건 이 작은 마나힘이 하는 존대는 좀 남다르다고나 해야 할까. 공손한 것 같으면서도 당당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것 또한 이곳과는 사뭇 달랐다. 존대는 하등한 자들이 윗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던가. 자신도 그랬듯이 한창 험하고 거친 소리를 할 만한 나이건만, 가노에게까지 존대를 해서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걸 보면, 재미는 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존대를 받은 가노들의 표정이 마치 저승사자를 알현하고 되돌아온 사람 같았으니까. 그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을 것이다. 마나힘 앞에서는 용케 참았다 싶은 만큼 뒤돌아 나오며 오물을 지린 가노까지 있었다. 그래서 우담궁 모주는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가노들을 마나힘 옆에 붙여주곤 했다. 생각해보면 그래서 더 존대를 남발하는지도 모르겠다. 죄다 주위에 늙고 나이든 자들로 바글거리니 말이다. 가만히 보면 마나힘은 계급이나 출신에 상관없이 나이든 사람들을 존대했다. 이계에서는 그것이 관습인가. “부모주!! 갑시다!! 가자!! 신난다.” 밖으로 나간다는 생각에, 흥에 겨워 자신을 향해 싱긋 웃는 예서를 향해 나루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후 마차의 문을 열었다. 환하고 강렬한 햇빛이 여과 없이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예서는 성큼 큰 걸음으로 마차 밖 세상으로 걸어 나갔다. “이게 여기 특산품이라면서요. 이 놈 그거 할 만해요. 특히, 위에 얹은 요거요. 으, 생각만으로도 군침 돈다. 파는 아저씨한테 특별히 많이 달라고 해서 더 얻어 왔습니다.” ‘나 잘했지?!’ 칭찬을 기다리는 꼬맹이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예서는 커다란 주발을 힌두아에게 불쑥 내밀었다. 그러나 우람한 야생늑대 같은 힌두아는 웃긴 웃되 삼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뱉을 수도 없는 억지로 입에 넣은 벌레가 이빨 사이에 낀 것 마냥 딱딱하게 굳어 눈만 끔벅거리며 억지로 양쪽 입아귀 끝을 올렸다. “제가 살던 곳에서도 이거하고 비슷한 게 있긴 한데요. 이게 훨씬 월등해요. 최고급 커드를 주발에 담아 숟가락으로 퍼 먹게 될 줄 어느 누가 감히 상상이라도 해 봤을까. 진짜 신나는 일이죠.” 예서는 씩 웃으며 힌두아 코앞에 더욱 바짝 그릇을 들이대었다. 지금 예서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이 힌두아는 마힌과 더불어 예서의 경호 가신 중 한 사람이다. 2미터의 장신에 근육으로 가득한 몸은 터질 것처럼 커다랗고, 그 맷돌 같은 커다란 머리가 어깨에 파묻혀 보일 만큼 큰 어깨가 자랑인 힌두아는 무덤덤한 성격에 과묵한 입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예서의 옆을 지켰다. 예서의 부탁으로 가뿐하게 둘로 줄인 대신 그 배나 요란한 칼 솜씨를 가진 사람들로 나루는 예서에게 붙여 주었다. 그러나 사실 마힌과 힌두아는 나루로서도 전혀 뜻밖이었다. 그들은 일반 사병이 아닌 차빈이 특별히 가까이 두는 차빈가 수장의 직속부대 소속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루의 청을 우담궁 모주가 본성 모주간 찬마밀을 통해 특별히 단장에게 넣었던 것이다. 차빈가는 한낱 귀족이라 칭할 수 없을 만큼, 제국 이루 안에 있는 또 다른 국가였다. 그것이 차빈가 사람들의 긍지요, 자긍이었다. “자요.” 예서가 심술궂게 이번에는 아예 숟가락에 쉬이를 퍽 떠서 힌두아에게 쑥 내밀었다. 예서에게서 그 험악한 모습 때문에 가끔 형님이라 불리며 놀림을 받는 힌두아는 오늘도 여전히 파랗게 질린 얼굴로 예서 앞에서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절절 맸다. 예서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숫기가 없는 형님이라,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저기... 마나힘.” “아까 큰 가마솥에 군불 떼고 휘휘 몽둥이로 젓는 게 신기해서 그냥 가마솥에서 퍼 먹어 봤거든요. 으웩. 그 무자비하게 오묘한 맛. 두 번은 경험하고 싶지 않다. 뜨겁고. 시고. 꿀 하나로 그 맛이 그렇게 변한다는 게 말이 돼요?” “마나힘... 마... 말씀 좀... 낮춰 주시면.......” “네. 형님.” “작은 마나힘.” “응.” “가... 감사합니다.” 힌두아는 떨리는 손으로 공손하게 토기 그릇을 받들었다. 고개를 숙인 힌두아의 얼굴이 빨갛다 못해 까매 보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사제들의 외의(外依)로 감싼 예서는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치우고 그런 힌두아를 보며 사악하게 웃었다. “그런데 형님은 먹는 걸 여자보다 훨씬 더 많이 좋아한다고 저번에 마힌 형이 그러던데, 설마 음식이 섹시해 보이는 건 아니죠?” “푸웩!!!! 쿨룩!! 쿨룩!!” 그리고 예서가 뒷짐을 지고 능청스럽게 내뱉는 말에 사례가 들린 힌두아는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푸하하하.” 나루는 단맛에 진저리를 치는 예서를 보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더불어 힌두아나 마힌까지. 그래도 무슨 생각인지 예서는 감(甘)을 한 움큼 쥐었다. 그런 예서를 보는 그들의 시선은 더 없는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조금씩 자신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예서가 한없이 고맙다. 부끄러워하는 힌두아의 갑옷 자락을 놓칠 세라 일부러 꽉 쥐고 앞장서는 예서의 생기어린 목소리는 궁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아니, 처음이다. 수행하는 자들을 잡아끌기도 하고, 때론 뒤따르며 예서는 가벼운 걸음으로 시내 한복판을 발길 닿는 대로 쏘다녔다. 거대한 책꽂이 사이에서 햇빛은 침묵했고, 파피루스에서 떨어진 작은 먼지 알갱이들은 그런 햇빛 속을 천천히 유영했다. 나루는 예서를 어수선함에서 잠시 쉬게 해주고 싶기도 했지만, 요새 글을 배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예서라면 좋아할 듯싶어서 시내에서 가장 큰 책방으로 안내했다. 물론, 이곳 또한 평상시와는 다르게 사람들이 꽤나 많아 분주하고 수선스러웠지만, 바깥보다는 차분했다. 사람들의 낮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간혹 들릴 뿐이었다. 조선시대의 서고를 연상시키는 책방 가득 그리고 차곡차곡 쌓여있는 파피루스들을 구경하면서 예서는 천천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제본 기술이 발달하기 이전 존재했던 책, 두루마리는 낯선 종류의 책이었지만 예서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는 책이었다. 마치 수천 년 전의 과거로 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이 이질적이고 오래된 파피루스의 냄새가 예서는 좋았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처지를 잊고 이곳의 냄새에 예서는 취하고 싶었다. 그래, 여행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예서는 문득 생각했다. 예서의 입가에 잠시 쓴 미소가 걸렸다. 그런 예서를 위해 나루 일행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방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서 옆을 지나다니는 사람들 또한 그저 이름 모를 사제를 대하듯 잠시 고개를 숙여 예서에게 예를 취하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스쳐갔다. 지나가며 갸웃거리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다. 예서의 복장이 상당히 불건전했기 때문이다. “기... 후... 리의...... 마지막..... 변.... 언?” 자신 없는 예서의 낮은 목소리가 점점 사그라졌다. “기후라의 마지막 변론입니다.” “..........?” 예서가 돌아서니, 젊은 남자 하나가 예서의 손에 들린 파피루스를 가리키며 예서를 향해 천진하다 칭할만한 미소로 웃고 있었다. 화려하게 잘생겼다기보다는 유려한 선이 돋보이는 단정한 인상의 남자는 부드러운 눈매가 언뜻 유한 성품의 소유자처럼 보이게 하나, 그러나 강단 있어 뵈는 입매가 결코 호락호락한 남자가 아님을 어림짐작케도 했다. 여하튼 객관적으로는 꽤나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기후라는 백 년 전 분이시지요. 평민이셨음에도 그 놀라운 예지력으로 만인의 추앙을 한 몸에 받던 학자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이 나라는 신의 나라, 신의 대리인인 황제의 나라지요. 처참하게 이용당하고 버려진 분이십니다.” 시선을 예서에게서 파피루스로 서서히 옮기는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냉소적으로 변해갔다. 그 목소리에 잠시 머쓱한 예서도 자신보다 약간 더 큰 남자의 시선을 따라 파피루스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가볍게 말을 내며 손에 들고 있던 파피루스를 다른 것들 위에 내려놓았다. “배우기 시작한지 석 달이 넘었는데도 상형문자라 그런가. 처음하고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서 섭섭할 때가 종종 있어요. 그게 종종이 아니라 가끔이면 좋을 텐데.” “상형문자?” 호기심서린 목소리다. 그곳에는 조금 전 남자가 뿜어내고 있던 무기질적인 공기가 마치 신기루처럼 흔적도 없었다. “네. 상형문자잖아요. 아닌가? 아닐 텐데.” 예서는 갸웃거리며 눈앞에 있는 붉은 원색의 아름다운 글자 하나를 가리켰다. “그렇군요. 거기에서는 그렇게 불리는군요. 그럼, 작은 마나힘께서 계시던 곳의 문자는 어떤가요?” “흐음. 그러니까 일단은 많죠. 어느 정도냐 하면, 그건... 어... 하하. 하여간 많다는 건 확실합니다. 물론 말보다야 훨씬 적지만요.” 설명이 어려운 듯 예서는 난감해했다. 그 난감함을 웃음으로 때우며 예서는 다른 파피루스를 손에 들었다. 글자도 큼지막한 게 조금 전 손에 들었던 ‘기후라의 마지막 변론’ 보다 훨씬 쉬워 보였다. 예서는 쭉 펴서 눈으로 대강 훑었다. 아는 글자들이 꽤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읽은 만할 것도 같았다. “그렇군요. 쉽군요.”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서는 그 너그러운 미소를 따라 웃으며 파피루스가 쌓여있는 곳을 휘 둘러보았다. ‘몇 개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역시 자신은 책을 보면 충동구매를 하고야 만다. 그래서 이름값을 한다고 형들은 핀잔을 주지만, 책꽂이에 그득 꽂힌 책만 봐도 배가 부르는 건 태생이니 어쩔 수 없다. 물론 읽는 건 그 반이나 될까 싶지만, 뭐, 어떤가. 책 사는 것만큼 남는 장사가 또 어디 있을라고. “네. 글자는 쉬워야 합니다. 누구나 배울 수 있게요.” “하하. 예. 작은 마나힘. 글자는 누구나 배워야 하는 거죠.” “...........!!!” 놀라 굳은 시선을 예서는 파피루스에서 남자 쪽으로 황급히 돌렸다. 예서는 그제야 남자가 자신을 보고 ‘작은 마나힘’ 이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아, 작은 마나힘이라고 하셔서요.” “...........” 그런데 남자는 그저 예서의 말에 부드럽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절 아세요?” “작은 마나힘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이 나라에는 없을 겁니다.” “어라, 왜요?” “글쎄요. 일단 외모부터가 이국적이지 않습니까.” “에?” 예서는 남자의 시선에 따라 자신을 아래서부터 훑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손바닥을 뒤집었다. “제가요?” “예.” “제가 보기에는 저기...” 그제야 예서는 자신이 눈앞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송구합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저는 네르간 상단의 상주 사마힌의 둘째 아후라 하옵니다. 작은 마나힘.” 아후가 고개를 깊이 숙여 예를 갖추자, 예서 또한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민예서입니다.” “민예서라, 하하. 이것부터가 이국적이지 않습니까.” “예서입니다. 제가 볼 때는 저보다 아후님이 더 이국적으로 보이는데요.” “음.” “저는 평범해요. 이곳에 와서도 한 번도 다르다고 생각해 본 적 없고. 그야 생각해 보면 제가 좀 틀리게 생긴 건 사실이지만. 물론 제가 살던 곳에서는 여러 인종들이 있었고. 또 그 곳에서도 저는 소수 인종이었지만. 그러니까......” 설명하기가 어려운 듯 예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제 눈에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제 자신을 거울로 비춘 것 마냥 거슬리는 거 하나 없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는데요? 음, 그래서 사람들이 저를 이채롭게 보는 게 이상했는데, 내가 이상한 거였나. 이런 생각이 이상한 건가.” 예서의 목소리는 점점 자자들어 혼잣말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건 아마도 차빈님 때문일 겁니다. 그 이유가 더 클 겁니다. 차빈님이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작은 마나힘께서 그분의 마나힘이라 그랬겠지요.” “네?” 예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아후의 말에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차빈님의 소중한 마나힘이지 않으십니까?” ‘마나힘’은 초대 황제 때부터 지금까지 황제 자신의 반려 중에서 오직 한 사람에게만 내리는 칭호이자, 황제의 총애와 힘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황제들은 반드시 그 칭호를 받은 자에게서 후계자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서열이 없는 반려들 사이에서 ‘마나힘’이라는 칭호는 그들 사이에 유일하게 절대적인 위치를 점하게 해주었다. 허나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극소수의 귀족가에서도 사용하게 되었고, 마나힘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는 귀족들은 그 칭호를 자신들의 긍지로 생각했다.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예서는 차빈의 유일한 반려였기에 자연스럽게 의식을 치르기 전임에도 이 칭호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누구의 소중한?” 예서는 뜬금없이 속이 울렁거렸다. 오랫동안 모른 척하고 있던 사실 하나가 저 깊은 밑바닥에서부터 갑자기 표면으로 급상승하며 빠르게 예서를 엄습했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현기증이 났다. 예서는 서고의 기둥을 붙들고 비틀거리는 몸을 추슬렀다. 숨을 내쉴 수 없을 만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예서는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내리 누르려했다. 예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자신의 심장을 쥐었다. 예서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져만 갔다. “모르셨습니까? 마나힘이란 뜻을.” 그리고 아후는 그 사실을 짐짓 모른다는 듯, 느리게 말을 이었다. “신이 내게 ..........준 ......자.” 말에는 힘이 있었다. 예서가 말을 내는 그 순간 외면하던 모든 것들의 실체가 예서의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났고, 예서의 눈은 경악으로 커질 대로 커졌다. “마나힘은 마나힘이죠.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하긴 쉽진 않지만, 글쎄요. 하나의 영혼, 정도로 설명 할 수는 있겠군요.” “.............” “왜 그러십니까. 모르셨습니까.” “.............” “작은 마나힘. 마나힘 당신은 누구십니까?”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못하고 자신을 보는 예서를 아후는 입가의 웃음을 거두고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예서는 그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후가 사라지고도 예서는 하얗게 질려 백짓장처럼 창백한, 그 자세 그대로였다. 나루일행이 다가와 예서를 부를 때까지. ‘내가 누구라고........... 그런...... 거 였어........?’ 모든 남자들, 그러니까 노예와 평민을 제외한, 제국 이루의 모든 남자들은 스무 번의 추수기가 지나기 전 반드시 성인식을 치러야만 하는 것이 제국 이루의 오랜 관습이었다. 이루에서는 태어나서 밀의 추수를 한 번씩 거칠 때마다 나이를 한 살씩 가졌다. 그리고 성산(聖山) 인가(仁家)에서 받는 이 성인식은 꽤나 고통스럽다. 수많은 산줄기를 거느린 거대한 인가(仁家)를 홀로 떠돌며 그 속에 담긴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어찌 쉬울쏘냐. 자신의 양식을 성산(聖山) 인가(仁家)에서 받아 취하며, 성수(聖水)로 목을 축이고, 무너지고 황폐된 제단을 수축하며, 그 제단에 제물을 드리고, 바람 한줄기에 서려있는 신의 냄새를 맡고, 발끝에 스치는 돌멩이에게서 신의 체취를 느끼며, 이름 없는 풀 한 포기의 흔들림 속에서도 신의 마음을 읽고, 그렇게 만난 신의 조각들을 자신들의 마음에 담는다. 혈혈단신(孑孑單身), 칼 한 자루만을 의지하여 사냥을 하고, 나무 밑동이나 짐승들이 쓰다 버린 동굴에서 이슬을 피하고 몸을 누이며, 그렇게 선조들의 삶을 반추하며, 성산(聖山) 인가(仁家)에서 계절 하나를 지내다 그 몸 그대로, 그 마음 그대로 속세로 돌아온다. 말이야 그럴듯하지만, 사실 허기와 목이 말라붙어 타는 듯한, 그 목마름, 짐승의 위협 속에서 자신을 단련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아닌, 자연의 극히 일부분으로서의 인간을 깨닫고, 그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남는 법을 배우고, 더불어 인생의 겸허함을 배우는 것이 곧 성인식이고, 어른의 시작임을 깨닫는 것이 어째 수월하겠는가. 그러나 차빈에게 있어서는 신과의 교감의 시간이 아니라 예서와의 만남이었다. 차빈으로서는 육신에게 닥치는 어려움보다 오랜 시간 예서를 보지 못함이 더 힘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성결 의식을 치르며, 차빈은 성인식의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럇!!” 재갈도, 안장도 없다. 그저 야우크의 푹신한 털 위에 두꺼운 천 하나만이 얹어있을 뿐이다. 그런 말의 갈기를 한 손으로 휘어잡고 차빈은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달렸다. 석 달 전보다 마른 듯한, 체격이지만 얼굴은 훨씬 생기 넘치고 활력에 차 있었다. 차빈은 자신의 단단한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마구잡이로 날리며 힘차게 말을 몰았다. 석 달 전과 확연하게 변한 것이 있다면 왼쪽 가슴에서 빛나고 있는 문신이었다. 황금빛 문신은 붉은 구릿빛 심장 위에서 자신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볼록 렌즈를 연상시키는 장원형(長圓形:타원형) 주위에는 열세 개의 상형문자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성수(聖獸)를 상징하는 똬리를 튼 뱀이 마치 당장이라도 몸을 세워 공격을 할 것 마냥 날카롭게 서 있었다. 건장한 말을 모느라 가슴이 움찔거릴 때마다 아름다운 그 성수(聖獸)는 살아 꿈틀거렸다. 힘차게 말을 모는 차빈의 몸은 생생하고 아름다웠다. 들판의 풍경들이 순식간에 차빈을 스쳐 지나갔다. “이럇!!” 어려서부터 차빈이 항상 봐왔던 들녘은 어느새 짙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밀밭 군데군데 무리 지어 군락을 이루며 사는 농노들의 마을은 추수 때가 되어서인지 한없이 풍요로워 보였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차빈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차빈은 자신을 수행하려는 황성 본가의 가신들을 물리치고 황성 대신전에서부터 예서가 있는 본성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오는 길이다. 석 달 전, 차빈이 마지막으로 본 예서의 모습은 잠들어 있던 모습이 전부다. 푸르스름한 새벽녘, 발소리를 죽이고 들어가 봤던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차빈의 마음은 바싹 타들어갔다. 잠시 후면 보게 될 사람이건만, 너무도 그리워 입술이 탔다. 혀로 입술을 축이며, 차빈은 말의 속력을 높였다. 차빈의 말은 차빈의 마음에 반응하며, 바람처럼 빠르게 내달렸다. “하이고!!” “에구머니나!!” “히익!!” 전쟁이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차빈으로 인해 외성의 모든 주민들은 기겁을 하며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땅을 엎드렸다. 차빈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사람들을 지나쳐 해자를 향해 빠르게 달렸다. 해자의 물은 여전히 고요했다. 개미새끼 한 마리 없는 다리를 건너며 차빈은 말의 박차를 가했다. “워~.” 차빈이 말에서 뛰어 내리자 거친 숨을 내쉬며 투레질을 하는 말을 가노들이 달랬다. 입에 심하게 거품을 물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말한테는 꽤나 힘든 여정이었음을 넉넉히 짐작케 한다. 그래서인지 말은 흥분한 몸을 쉬 삭히지 못했다. 신경질적으로 가노들의 손길을 거부하는 말을 보고 차빈은 낮게 혀를 차며 굵고 단단한 말의 목을 토닥거렸다. 우담궁 앞에는 어느새 차빈의 입성 소식을 듣고 맞으러 나온 성내(城內) 가신들이 우담궁 계단 아래에서 차빈을 배알하고 있었고, 그가 당연히 이리로 오리라 예상한 찬마밀은 느긋하고 여유로운 몸짓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차빈님, 어서 오십시오.” 쏜 화살처럼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차빈을 맞이하는 모주간 참마밀이건만 평상시와 다름없는 어투다. 모주간이 괜히 모주간이 아닌 것이다. “연통이라도 주셨으면 미리 마중을 나갔을 터인데 어찌 그냥 오셨습니까. 본가에서도 아무 기척도 없었는데요.” “예서는?” 나무라는 천마밀의 말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빈은 대뜸 예서부터 찾았다. “작은 마나힘께서는 지금 물의 정원에 계십니다.” 작은 마나힘. 십여 년 전에 세상을 달리한 차빈의 모친과 구별하기 위해 부르기 시작한 호칭이다. 그런데 이젠 그 호칭에 생기라도 불어넣어진 것 마냥 듣는 이도 입에 담는 이도 남다른 감회에 젖어들게 했다. 텅 비고 허하던 차빈 본성을 채우는 이름이자, 거칠고 황량한 처녀지 같던 차빈을 채우고 있는 이름인 것이다. “그래?” “예. 지금 그 쪽으로 가시겠습니까?” 찬마밀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몇몇의 가신들에게 눈짓을 하며, 차빈에게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곧 그들이 차빈 곁, 그러나 차빈 뒤로 한 걸음쯤 떨어져 섰다. “됐다.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 예서는?” 한 쪽 손을 짧게 내저으며 차빈은 다급하게 물었다. “혼자 계십니다.” 차빈의 질문의 속뜻을 헤아리며 모주간 찬마밀은 조용히 대답했다. 군락을 이루는 샘의 너른 바닥에는 작고 하얀 조약돌이 가득했고, 그 사이로 수많은 샘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번갈아 가며 뽀록뽀록 숨을 쉬듯이 물을 뿜어대고 있었다. 샘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물과 앙증맞고 하얀 연꽃들로 그득했다. 그 연꽃 잎사귀 하나에 작고 귀여운 청개구리 한 마리가 예서를 뒤룩뒤룩 쳐다보며 앉아있었고, 넓디넓은 샘 한 곁에 엎드려서 예서는 청개구리와 더불어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샘에서 나온 물은 정원 곳곳을 돌며 이리저리 흐르는데, 그 물길을 따라 걷노라면 시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리만치 작은 물줄기 사이를 가로지르는 키 낮은 나무다리를 낑낑거리며 받치고 있는 붉은 돌도 있었고, 그 좁은 곳을 용하게도 작은 물고기들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요리조리 헤엄치며 나다니고 있었다. 마른 갈대를 흔들던 바람은 예서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손장난을 하기도 했지만, 가끔 정원 가득 피어있는 수많은 꽃향기들을 예서에게 가져다주기도 했다. “응?” 얼핏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은데, 바람소리였나. 예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내 방금 바람이 헝클어 놓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파피루스로 만든 배를 띄었다. “후~.” 예서가 숨을 불어 넣자, 배는 연꽃 위에 앉아있는 청개구리를 향해 조심스러운 항해를 시작했다. 배가 연꽃잎을 살짝 건드리자, 청개구리는 번쩍 뛰어 도망쳤다. 그 모습에 예서는 낮고 작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뭐하고 있는 거지?”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에 예서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차빈이었다. 차빈을 확인한 예서의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딱딱하게 굳었다. 몇 달간 보지 못했던 차빈은 마른 듯 보였지만, 예전보다 더욱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산책 중이었습니다.” “그대는 산책을 누워서 하나?” 웃음서린 차빈의 목소리였다. “다녀왔소.” 푸르스름한 새벽, 아직 태양이 채 그 모습을 다 드러내지 않은 새벽에 우담궁은 팽팽하고 부산한 움직임으로 깨어나고 있었다. “마나힘. 작은 마나힘.” 예서의 침상 옆에서 나루는 곤히 자고 있는 예서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예서를 불렀다. 예서를 깨우는 것이 나루는 영 죄송스러웠다. 이렇듯 깊이 잠든 게 얼마만인지 모른다. “......ㅇ... 으... 응. 오 분만.” 예서는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웅얼거렸다. “흠흠. 기침하실 시각입니다. 어제 말씀하신 대로 차빈님께서 지금 출발하신다고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예서의 기척에 나루는 몸을 굽혀 나지막이 예서에게 속삭이며, 밤새 방문을 지키고 있던 가신들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가신들은 기척도 없이 방밖으로 사라졌다. “기침하셨습니까.” 나루가 고개를 돌려 예서를 다시 쳐다보니, 예서가 멀뚱히 누워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치뜨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말없이 눈만 껌벅이는 예서를 바라보다 나루는 삐죽 헝클어진 예서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온화한 음색으로 물었다. 이마의 식은땀을 보아하니, 밤새 뒤척이다 새벽녘에 잠든 모양이다. 나루는 손등으로 조심스럽게 예서의 볼을 쓰다듬었다. “일어나셔야지요.” “......네.” 가라앉은 목소리로 예서가 짧게 대답하자, 조용한 미소가 나루의 입가에 걸렸다. 그 미소에 예서가 부은 눈을 비비며 따라 웃자 나루의 미소가 깊어졌다. “아침은 가시는 도중에 드신다고 하셨습니다.” “나루님.” “들어오도록.” 방문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기척소리에 나루가 응하자,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방문이 열렸다. 섬세한 조각들을 하나하나 덧붙여 만든 묵직한 청동문은 두 개의 여닫이로, 높이는 족히 3미터는 됨직하다. 나루는 두근거리는 자신의 심장을 외면했다. “.............”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신(家臣)은 고개를 숙여 예서에게 예를 표했다. 가신이 옆으로 살짝 몸을 비키자, 뒤에 서 있던 가노들이 앞으로 나섰다. 예서가 가노들이 들고 들어온 물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고, 소금을 탄 따스한 물로 입안을 헹구자, 나루가 가노의 손에 들려있던 옷을 받아 정중히 예서에게 내밀었다. 타인이 자신의 시중을 드는 것을 상당히 싫어했기 때문에 특별한 지시가 없는 한 가신들은 예서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나루는 예서가 엉성하게 대충 입은 사제복의 매무새를 다듬어 준 후, 예서가 사제의 외의(外依)를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예서가 성내(城內)에서 대강 차려 입고 다니는 사제복은 사실 벨트 아래 주름의 위치와 수까지도 정해져 있을 만큼 예를 갖추어 입는 옷이다. 오늘은 외부로 나가는 날이기 때문에 나루는 예서의 옷매무새를 직접 매만져 주었다. 원색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경외의 대상인 흰색의 사제복은 두 개의 커다란 장방형(長方形)의 천을 잇되, 어깨선과 옆선에 해당하는 부분을 가죽 끈으로만 연결하고, 같은 방법으로 통 소매를 갈색 가죽 끈으로 이어 붙였다. 바늘과 실을 피해서 옷을 지었고, 씨실을 빼내어 자연스럽게 날실이 드러나게 해서 소매나 옷의 밑단을 정리했다. 그 위에 허리띠를 매면, 이것이 사제복의 중의(中依)다. 예서는 두 손으로 갈기를 있는 힘껏 움켜쥐고 눈을 부릅떴다. 처음에는 감아도 봤지만, 더한 두려움만 줄 뿐이었다. 차빈은 예서의 몸을 다시금 단단히 휘감아 예서를 바짝 끌어당겼다. 등으로 느껴지는 차빈의 온기와 근육의 움직임이 생생하다. 차빈은 한 손으로 말의 갈기를 잡고 말을 제어하면서 말을 몰았다. 동이 트기 전, 이른 새벽에 출발한 차빈들은 지금 차빈가 영지 끝자락에 걸친, 수인(獸仁)산맥의 주산(主山)인 수인(獸仁)산 산기슭을 달리고 있다. 성산(聖山) 인가(仁家)의 산줄기 중 하나인 수인(獸仁)산맥은 그 출몰하는 맹수나 험하기가 만만치 않아 사람들이 꺼리는 산이다. 그래서 말에 서툰 예서를 위해 쉬엄쉬엄 가는 길이라지만, 글쎄, 예서도 그 의견에 동조할까. 별반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예서는 막강한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지금 일행은 황성으로 가는 길이다. 물론 예서는 모른다. 차빈의 재등장으로 다시금 웃음을 잃어버린, 두려움과 혼란으로 움츠려 있는 예서를 자극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마차로 편하게 가도 되겠지만, 그럼 일행이 많아지고 속도가 느려진다. 단출하게 움직이는 것을 즐기는 차빈으로서는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예서가 이름 없는 범부의 차림으로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 이렇듯 차빈은 홀가분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차빈이 성인식을 마치고 본성으로 돌아온 후, 예서는 작은 일에도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루야 그 이유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지만, 차빈은 의외로 당혹했다. 따지고 보면 예서가 이곳으로 온 지도 넉 달이 다 되어 가지만, 차빈과 함께 한 시간은 고작 열흘이 채 되지 않는다. 서로를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사실을 안다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차빈은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을 넘어서 기정사실로 행동하고 있지만, 예서는 달랐다. 만약 황성으로 가는 이유를 정식으로 듣게 되면 과연 예서는 순순히 따라 나설까. 절대 아니다. 나루는 그렇게 생각했다. 절대 아니라고. 자신들의 작은 마나힘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성 밖으로 거의 나가지 못했던 예서를 위한 여행이라는 거짓 명분을 가지고 가는 일행들은 그렇게 지금 황성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루는 이번 길에 자청해서 따라 나섰고, 나루, 힌두아, 마힌이 그런 차빈과 예서를 수행했다. “워~!” 그리고 늦은 오후, 앞서 달리던 차빈은 손을 들어 일행을 멈췄다. “오늘은 여기서 머문다.” 차빈은 예서가 말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며 짧게 입을 열었다. 예서는 처음 타본 말 때문에 온몸이 아파서, 특히 남에게 말하기 민망한 어디가 심각하게 아파서, 몸을 비비 꼬며 잠시 차빈의 팔을 잡고 아픔을 삼켰다. “괜찮은가.” “............” 예서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예서의 입은 당장이라도 험한 욕이 튀어나올 듯 실룩거렸다. 상당히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 사이, 그러니까 마힌이 오늘밤 거할 장소를 적당히 정돈하고 힌두아가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모으는 사이에 나루는 저녁을 하기에는 적이 시간이 이른 듯 했기에 간단하게 먹을 다과와 차를 준비했다. 그리고 예서는 천천히 태고(太古)의 자연이 숨 쉬는 숲을 둘러보았다. 오늘 머물기로 한 산기슭의 작은 공터를 둘러쌓고 있는 건 하늘 끝에라도 닿을 듯이 쭉 뻗은 검은 나무였다. 서너 아름이 족히 넘던 본성 호수의 나무들보다 최소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그 검은 나무의 축축한 몸통을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며 거친 넝쿨이 칭칭 감고 있었다. 예서는 마치 거인나라의 소인이 된 느낌마저 받았다. 그런 나무 밑동에는 큰 나무가 흘린 햇빛을 필사적으로 주어먹는 듯한, 가녀린 나무들의 앙상한 가지들이 얼기설기 엉켜 있었고, 그 가지에는 한없이 작고 여린 꽃들이 듬성듬성 피어 있었다. 예서는 바삐 움직이는 일행들을 바라보다 천천히 숲 속으로 들어갔다. 멀리 가지 않으면 상관없을 듯싶었기 때문이다. 유난히 고요한 숲속에서 예서의 발소리만이 크게 들렸다.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마라.” 발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는데, 언제 따라 붙은 걸까. 차빈은 말보다 먼저 예서의 허리를 갈고리처럼 감아 잡아당기며 예서의 귀에 눅눅한 숨을 불어넣었다. 그예 예서는 진저리를 치며 차빈의 품에서 빠져나왔고, 차빈은 순순히 예서를 놓아 주었다. 도대체 이 수컷은 왜 자신을 암컷으로 보는 걸까. “멀리 갈 생각 따위는, 그저 잠깐 숲을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차빈의 숨이 닿았던 귀를 잡으며 예서는 그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간지러움에 미간을 찌푸렸다. 끈적거리는 이 느낌이 싫다. 같은 사내가 닿는 느낌이 좋을 리 만무하다. “그래? 이리 와라.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다.” 기가 질린 듯, 당혹해 하는 예서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차빈은 예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벅. 저벅. 익숙하지 못한 여행 첫날 야영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차빈은 이곳을 보여주고 싶어 일부러 험한 길을 달려왔다. 덕분에 자신의 뒤에서 걷는 예서는 어기적거리며 다리를 절었다. 꿍얼대는 모양새로 보건대 분명 차빈을 향해 욕지기라도 내뱉는 것 같으나 들으라는 건 아닌 듯싶다. 그래도 확실히 좋은 뜻이 아닌 건 분명하게 알겠다. 차빈의 입가에 그 또래다운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예서의 손목을 잡고 있는 차빈의 손은 땀으로 축축했고, 급하게 뛰는 심장으로 인해 숨이 가빴다. 그예 비해 예서는 차빈에게 손목을 내주고 익숙하지 못한 숲속을 걸으며, 조금은 불안한 시선으로 그런 차빈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끝이었다. 웅장하고 장대한 숲에도 끝은 있었다. 예서는 갑자기 뚝 끊긴 숲 가장자리에 서서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쳐다보았다. 예서의 입에서 탄성과 함께 믿을 수 없다는 뜻이 충분히 내포되어 있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예서의 눈앞에는 거대한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는 나무 한 그루 없었다. 거센 파도처럼 굽이쳐 흐르는 초원의 물결이 하늘 경계선까지 이어져 있었다. 마치 경계를 그은 것처럼 숲과 초원은 나뉘어져 있었다. 산에도 지평선이 있었다. “하하하. 와아~!! 세상에는 이런 곳도 있구나. 초가 하나 짓고 여기서 딱 한 달만 살아도 좋겠다.” 예서는 숨이 막힌다는 듯 크게 심호흡을 하며 한껏 기지개를 켰다. 가슴속까지 시원하다. 잠시나마 예서 자신의 처지를 잊을 만큼 즐겁다. “이리 와라.” 차빈은 예서를 이끌었고, 예서는 차빈을 따라 순순히 초원에 발을 내딛었다. 초원 곳곳에는 날카로운 검은 바위들이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있어 마치 처음 보는 이방인을 경계라도 하는 듯 보였다. 그 돌 틈새에는 이름 모를 작은 풀들이 꽃을 피우려고 용을 쓰고 있었고, 초원의 푸르디푸른 풀 사이에는 드문드문 작은 꽃들이 수줍게 얼굴을 내밀거나 앙증맞은 노란 꽃들이 씩씩하고 당당하게 무리지어 있었다. 예서는 차빈의 손에 이끌려 정신없이 초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흔들림이 없는 검푸른 물에는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미세한 흔들림도 그 어떤 생명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태고부터 땅 깊숙한 곳에 박혀있었던 것처럼 뿐, 예서는 태고의 시간, 그 앞에 서 있는 듯한, 어지러운 착각이 들었다. 예서는 거부할 수 없는 그 끌어당김에 아찔한 현기증이 났다. 눈을 감았다 떠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으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물이 뿜어내는 기운에 예서는 몸을 떨렸다. 지름이 족히 수백 미터는 됨직한 검푸른 물웅덩이를 마치 날카로운 짐승의 손톱처럼 날이 서있는 땅이 에워싸고 있었다. 손톱 밑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함에 움츠려 들게 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예서가 앉아있는 땅은 손톱 끝, 공중에 떠 있는 땅이다. 예서는 엉금엉금 뒤로 물러섰다. 가장자리 끝에 매달리듯 핀 이름 없는 그러나 생명력이 충만한 붉은 꽃이 그런 예서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성수(聖水)다.” 예서는 뻣뻣한 고개를 돌려 차빈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쉬는 곳이지. 이곳에 오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고요해져요?” “그래.” “이곳이요?” “.............” “바닥은 있을까?” “.............” “없진 않을 텐데. 역시 바닥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 건가. 소름끼치도록 주눅 들고, 무섭고. 저기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요. 누가 빠진 줄 알기나 할까.” 예서는 하염없이 물을 내려다보며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글쎄, 또 모르지. 인간이 발을 디딘 적이 없다는 근원으로 데려다 줄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인간은 미지라는 것에서 공포를 느끼는 것 같더군. 그대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인가.” “.............” 예서는 말없이 차빈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덤덤한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뭐, 상관없겠지.” 차빈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예서에게서 시선을 돌려 성수(聖水)를,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만 갈까.” 야영지로 돌아오면서 차빈은 일부러 숲을 돌아서 걸었다. 덕분에 예서는 처음 느낌과는 사뭇 다르게 꽤나 다양한 삶들이 숲속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검은 나무들이 주는 위압감에 주눅이 들었던지라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숲 속은 생명력으로 넘실대고 있었다. 나무들만의 숲이 아니었다. 단지, 조금 습한 기운이 있어 가끔은 등골까지 서늘하게 식혀 줬지만, 그래서 흘금거리며 뒤를 확인해야 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차빈과 예서는 졸졸 흐르는 실개천 옆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차빈은 목을 축이고 예서는 두 평 남짓한 작은 터에 벌렁 누웠다. 눕자마자, 하루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드는 느낌이었다. 예서가 누운 땅 위에는 커다란 나무도, 그리고 그 나무의 웅장한 가지들도 없이 오직 민들레만이 지천이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노란 꽃은 눈이 부셨다. 짙푸름이 지천이던 숲 속에서 만난 작은 보물이었다. 환하게 웃는 꽃을 보면서 예서는 흥얼거렸다. 몸을 돌려 엎드려서 꽃에 눈을 맞추며 예서는 마음을 편히 하려했다. 그러나 차빈의 존재감이 너무 컸다. 더군다나 단 둘이다. 숲속을 거닐 때는 몰랐는데 막상 걸음을 멈추자 예서의 모든 신경들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뭐하나?” 가만히 엎드려서 땅만 내려다보는 예서에게로 차빈은 천천히 다가 왔다. 그리고 예서의 맞은편에 팔꿈치를 괴고 옆으로 반쯤 누워 예서를 쳐다보았다. 더워서 씻었는지 머리가 온통 젖어있었다. 또로록 소리를 내는 듯 맑은 물방울이 차빈의 얼굴선을 타고 한 방울씩 떨어졌다. 그 모습이 꽤나 선정적이었다. “그냥요.” 엎드려서 손등에 턱을 괴고 있어선지 예서의 목소리가 눌려 있었다. 예서는 차빈을 아랑곳하지 않으려 애썼다. 차빈도 곧 예서와 같은 자세를 취하며 예서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작은 꽃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마주보았다. “뭘 보고 있지?” “.................” 차빈의 눈만 맞출 뿐, 예서는 차빈의 질문에 별반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순간만은 예서는 차빈이 싫지도 무섭지도 않다. 그런 예서에게서 차빈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 “민들레예요.” 그러나 곧 예서는 침묵을 피하듯 말을 내며, 시선을 꽃으로 돌렸다. “민들레?” “네. 여기서는 어떻게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흔하다면 흔하고, 또 특별하다면 특별한. 사람들마다 어떻게 받아 들이냐의 차이가 있는 거니까. 어려서 곧잘 가지고 놀던 꽃입니다. 씨에 날개가 달려있거든요.” 그제야 차빈은 시선을 내려 땅을 쳐다보았다. 땅 위에는 납작 누운 듯한, 작은 꽃들이 수북하게 피어있었다. “어떻게 이곳에도 똑같은 것이 있을까.” “....................” “.................” 그 후, 두 사람 사이에는 평화로운 정적만이 있었다. 예서는 서늘한 땅의 기운을 손바닥으로 느끼며, 손등에 볼을 대고 엎드려 누웠다. 그리고 곧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예서에게 따사로운 햇빛은 긴장을 풀어 주었고, 단잠을 선물로 안겨 주었다. 오랜만의 단잠이었다. “...............” 특색 없는 꽃이다. 아무리 봐도 차빈 눈에는 별반 감응을 일으킬 만한 요소가 전혀 없었다. 하긴 태어나서 지금까지 꽃에게 감응을 받아 본 적이 없긴 하다. 차빈은 묵묵히 꽃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예서를 물끄러미 보았다. 언제 잠이 든 걸까. 둘을 천천히 번갈아 보던 차빈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문득 예서의 마음을 움직인 꽃이 눈에 새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차빈은 꽃을 꺾었다. 그리고 돌아누워 꽃을 눈앞에 들고 쳐다보다 하늘을 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하게 파란 하늘이 눈부셨다. 차빈은 부신 눈을 팔로 가리는 것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러나 곧 몸을 급하게 일으켜 예서를 돌아보았다. 가슴이 답답하다. 예서는 가위를 풀려고 숨을 몰아쉬었다. 꿈인가. 예서는 어떻게 하든지 몸을 뒤척여 잠에서 깨어나려 했다. 그러는 한편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무게감에 예서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부드럽고 촉촉한 것이 예서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예서는 천천히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 예서의 눈앞에 차빈의 감긴 눈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차빈이 천천히 눈을 떴다. 뻣뻣하게 굳은 예서의 몸을 통해 그의 깨어남을 느낀 거다. 입술이 맞대어진 상태에서 서로의 시선이 엉켰다. 흔들리는 예서의 눈동자를 보며 차빈이 먼저 눈을 감았다. 차빈은 자신의 입술을 벌려 예서의 입술을 집어 삼켰다. 정신을 차린 예서가 차빈을 밀어내려 했지만, 체격이나 체력이나 월등한 차이를 보이는 차빈을 밀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군다나 예서가 힘을 쓰기에는 자세가 너무 불리했다. “읍!!!” 예서가 내는 거부의 소리에도 차빈은 예서의 턱을 누르며 조개처럼 다물려하는 예서의 입술을 강제로 열고 거침없이 예서의 입안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차빈은 혼란스러웠다. 성인식 이후에 다시 만나 예서는 자신을 밀어내고 있었다.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서는 온 힘을 다해 차빈을 거부하고 있었다. 차빈은 이해할 수 없는 만큼 혼란스러웠고, 그만큼 분노했다. 예서의 벌려진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던 차빈은 본능으로 허리를 조금씩 움직였다. 그 곳에서부터 번져가는 자극은 차빈의 온몸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그러나 예서에게서 나온 것은 더욱 격렬한 저항이었다. 예서는 차빈의 긴 머리카락을 틀어쥐며 차빈을 자신에게서 떼어내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차빈은 예서가 마구잡이로 떼려도 막무가내였고, 사지를 미친 듯이 몸부림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예서가 차빈의 혀를 물려고도 했지만, 턱이 잡혀 있어서 불가능했다. “읍!! 읍!! 싫....!!!” 입안 깊숙하게 들어온 차빈의 혀는 예서에게 구토의 욕구를 줄 뿐이건만, 차빈은 아는지 모르는지 도리어 예서의 혀를 끄집어내 자신의 입안으로 가져와서는 자근자근 씹기까지 했다. 거칠게 휘젓는 혀로 인해 예서의 입안은 상처를 입었다. 통증에 비명을 내어도 차빈의 입 속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윽.” 하체의 마찰로 인해 발기하기 시작한 차빈의 상징에 온몸을 비틀며 예서는 미친 듯이 저항했다. 이제 예서의 입에서 울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제야 차빈은 예서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예서의 입술은 예서의 피와 누구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역시 차빈의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차빈을 보며 예서는 고래고래 악을 썼다. “젠장, 이 개차반 같은 놈아! 비켜! 내 몸에서 떨어져!! 떨어지란 말이야!! 아악!!!” 예서의 악에 바친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차빈은 더러워진 예서의 입술을 자신의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닦았다. 퍽!!! 그리고 예서는 그 순간 힘껏 쥔 주먹으로 차빈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러나 그것은 별반 큰 힘은 발휘하지 못했는지, 살짝 틀어진 얼굴을 바로 돌리며 차빈은 자신의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그리고 거칠게 예서의 두 손목을 각각 땅에 대고 강하게 눌렀다. “윽!! 비.켜.” 십년이 넘도록 진검을 휘두른 손이다. 그 아귀의 힘이 장난일 수 없었다. 예서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차빈은 잠시 그런 예서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격렬하게 고갯짓을 하는 예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서의 목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차빈의 긴 머리카락이 예서의 시야를 가렸다. “지금 그대를 가지고 싶다.” 예서의 목을 지분거리던 차빈이 예서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차빈의 목소리는 욕망으로 갈라져 있었다. 예서의 눈이 공포로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싫.... 어. 싫... 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아~~ 악!!” 비명을 지르며 발광하듯 몸부림치는 예서를 끌어안고 차빈은 비릿하게 웃었다. 씁쓸함이 눈가에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차빈은 저항하는 예서를 내리누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격하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예서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허탈하게 웃었다. “그대를 가지지 않는다. 그래, 지금은 그대를 가지지 않아.” 타박. 타박. 씩씩하고 건강한 사내아이들이 토닥토닥 장난을 치며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듯 좁은 거리를 내 집 마당 마냥 휩쓸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내쫓았다. 아이들은 거리에서 쫓겨나면서도 뭐가 그리고 좋은지 깔깔거리며 웃고 떠들었다. 차빈들은 말에서 내려 천천히 걸었다. 나루 뒤를 차빈과 예서가, 그 뒤를 마힌과 힌두아가 조용히 뒤따랐다. 사람들은 예서를 지나치면서 예를 갖추었고, 예서도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여행 첫날의 어설펐던 인사도 며칠이 지나자 차츰 익숙해졌다. 사제복의 외의(外依)를 걸치고 있는 예서는 온통 가리어져 있어서인지 반쯤 드러나 있는 손등만이 유난스럽게 하얗고 선명하다. 햇빛을 반사하는 눈이 부신 피부는 파란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그런 예서의 손을 흘긋 보며 차빈은 군침을 삼켰다. 고개를 돌려 보지만, 자연스레 그리로 가는 시선을 자신의 의지로는 막을 수 없었다. 차빈은 그런 예서의 유혹을 참지 못하고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예서의 손등을 스치듯이 어루만졌다. 어쨌든 사제는 일반인이 함부로 손을 대어선 안 되는 존재니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도둑질하듯이 자신의 사람을 만져야 하다니, 차빈은 속으로 낮게 혀를 찼다. 손끝에 감기는 부드러운 감촉은 차빈의 온몸에 삽시간에 열이 지폈다. 차빈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바람에 실린 예서의 체향에 차빈은 더욱더 손에 힘을 넣었다. 이해할 수 없는 예서의 거부 따윈 무시하면 그만이다. 이제 곧 이 온기를 마음껏 품을 수 있다. 이제 ‘곧’이다. 어차피 몸도 마음도 그리고 영혼도 영원히 자신의 것이다. 차빈은 치밀어 오르는 열기를 이를 악물고 참았다. 신전이 있는 중앙 거리에는 나무 넝쿨로 얼기설기 조잡하게 만든 광주리에 야채나 과일, 때로는 생선 몇 마리를 진열해 놓고 파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있어 거치적거리기도 했지만, 한 편으론 거리의 활기에 톡톡히 한 몫을 했다. 정감어린 수더분한 농부 같은 마을은 그다지 풍요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궁색해 보이지도 않았다. 가파른 산을 깎아 만든 마을은 낮은 계단식 논을 연상시켰고, 돌로 만들어진 집들은 구역에 맞추어 반듯하게 세워져 있었다. 신전이 있는 거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길은 한 사람이 고작 말 한 필을 끌고 지나다닐 정도로 좁았다. “이곳입니다. 조용하고 깨끗하다고 해서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나루는 차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차빈은 건물의 외관을 한 번 훑어보더니 긍정의 표시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루는 다시 한 번 더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대부분의 숙소들은 마을의 중심인 중앙 거리에 모여 있어서 차빈들은 마을로 들어오자마자 얼마 걷지 않아 꽤 괜찮아 보이는 여관을 잡을 수 있었다. 잠시 후, 자그마한 사내아이 하나가 허겁지겁 안에서 뛰어나왔다. “어르신. 마구간은 이쪽에 있습니다요. 따라 오시지요.” 앵무새처럼 빠르고 감정이 섞여 있지 않는 목소리로 아이는 차빈들에게 머리를 연거푸 조아렸다. 곧 마힌과 힌두아는 소년을 따라 갔고, 여관 안으로 성큼 들어서는 차빈을 따라서 예서는 천근같은 다리를 들어 옮겼다. 건물은 이층으로 되어 있었다. 벌써 이야기가 끝난 것인지, 나루는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서 있었다. “..............” 방안은 낡은 침상과 낮은 탁자, 그리고 단 두 개의 의자뿐이었다. 창문은 없었고 벽 위쪽에 크기가 서로 다른 구멍 몇 개가 숭숭 뚫려 있었다. 예서는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몸도 몸이지만, 그것보다도 정신적으로 느껴지는 압박감이 훨씬 컸다. 차빈이 무섭다. 예서는 차빈이 무서웠다. 한일자로 항상 굳게 닫혀있는 차빈의 입매도, 싸늘한 기운이 넘치는 차빈의 눈도, 예서에게는 너무도 위협적인 그 다부진 몸도, 그리고 피를 묻힌 차빈의 손도 끔찍했다. 예서는 두 손으로 피곤하고 지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엄마,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으니까. 나 좀 데리러 와.’ 예서는 지금 차빈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에 지쳤다. 그 어느 한 곳 빈틈없는 끈적끈적한 거미줄 속에 갇힌 작은 벌레처럼 어떤 길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의미 없는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생명들이 스러졌다. 쿰은 목소리를 잃었다. 생명의 무게는 너무도 무거웠다. 예서 자신은 고작 열여덟일 뿐이다. 차빈 자신이 작정하고 있는 일을 예서가 거부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만으로도 예서는 몸서리가 쳐졌다. 미치도록 벗어나고 싶은 만큼 그 만큼의 중압감을 가진 그 무엇이 예서 자신을 꼼짝 못하도록 내리 눌렀다. 더구나 상대는 남자건만 예서 자신을 성적으로 원한다. 삐드득. 굳게 닫혀있던 낡은 문이 힘겨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예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고, 차빈은 문손잡이를 잡고 가만히 그런 예서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뒤엉켰다. 예서가 먼저 고개를 돌리자, 차빈은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섰다. “몸은?” “..........괜찮습니다.” 예서는 방문 앞에서 아직도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는 차빈을 흘긋 보며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 “.....................” “저, 잠시 밖에 좀......” 무거운 침묵에 예서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차빈이 서 있는 방문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두려움에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가지 말고 쉬어라.” 차빈이 자신을 비켜서 나가려는 예서의 손목을 낚아채려 하자, 예서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고 파랗게 질린 얼굴로 차빈이 잡으려던 손목을 자신의 다른 손으로 움켜잡았다. 차빈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뭐 하는 짓이냐?” 낮게 깔린 격노한 차빈의 목소리가 얼음보다 차가웠다. “나는......”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다.” 예서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파하려고 피한 것은 아니다. 그저, 당연하지 않은가. “마나힘!!! 그대가 감히!! 감히 이 나를 피해?!!” 분노한 차빈의 눈을 보는 예서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대답해 봐!!” 이를 악문 차빈의 목소리에 예서는 마른 침을 삼켰다. 마음을 가다듬으려 했으나, 호흡이 아프다. 예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앞으로는 절대... 싫습니다. 그러니까 제 몸에는 손대지 말아주세요. 부탁입니다. 이제 그만하고... 그만하고 돌려보내 주세요. 저는 이곳으로 온다고 동의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분명 명백한 납치고 감금이에요. 이렇게 부탁드려요. 제발, 전 가족한테 돌아가고 싶습니다. 돌아가고 싶다고요. 동의하지 않은 일에 그 누구도 나한테 강요할 자격 없습니다.” 말하는 게 너무 힘들어 가슴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예서의 눈에 끝내 참고 있던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눈물은 무게를 못 견디고 곧 예서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예서는 차빈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기 위해 이를 사리물어야 했다. “하.”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는 차빈의 주먹이 분노로 하얗게 핏기를 잃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차빈의 검은 눈동자가 예서를 단숨에 집어삼킬 듯이 노려보았다. 그 날 이후 차빈은 예서에게 그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없는 사람 마냥 예서를 대했다. 그리고 일행은 이제 여정의 끝에 와 있었다. “이럇!!!” 차빈은 늘 하던 대로 황성 북문을 통해서 황성으로 들어갈 생각이다. 그 전에 물론 할 일이 하나 있긴 하지만. 차빈은 지름길을 벗어나 황성의 뒤를 병풍처럼 지키고 서 있는 북산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 차빈을 따라 나루도 마힌도 힌두아도 말머리를 돌렸다. 힘들어하는 말을 몰아치며 차빈은 산등성이를 넘었다. 해는 서쪽으로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워~.” 차빈은 한 손으로 예서를 단단히 안고 두 발을 번쩍 들어 올려 몸을 세우는 말을 달랬다. 투레질을 하던 말은 차빈의 손길에 곧 조용해졌다. 해는 산을 오르기 전보다 서쪽으로 성큼 기울어져 있었다. 서둔다고 서둘렀는데 빨리 하산해야 할 듯싶다. “봐라. 마나힘. 제국 이루의 황성이다.” 차빈은 앞을 가리켰다.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도시가 예서의 눈앞에 바다처럼 펼쳐졌다. 거친 절벽 아래로 성냥개비만한 집들과 거리들이 보였지만,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 황성은 차빈 본성과는 다르게 거대한 수도를 품고 있는 대륙 최고의 성이니까. “마나힘. 저것이 차빈 본가다. 차빈이란 이름은 우리 가문의 이름이자, 나의 이름이다. 알겠나? 그게 내 이름이다. 마나힘이 그대 이름인 것처럼. 그것이 우리 둘의 이름이다. 그게 너와 나다. 마나힘. 잊지 마라.” 무기질적인 목소리다. 사무적인 그 목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할 만큼 차가웠다. “저것이 황궁이다. 신의 대리자인 황제께서 머무시는 곳이다.” 이제 차빈의 손끝에는 황금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궁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저것이 대신전이다. 그대와 내가 며칠 후에 혼례의식을 치룰 곳이지.” 황궁과는 정반대로, 위에서 내려다본 대신전은 거대한 하나의 조각품이었다. “.........!!!” 혼례의식?!! 누구 마음대로!! 예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파열될 듯 극심하게 뛰었다. 눈앞이 아찔하고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여기가 그대의 나라요, 내 품이 그대의 집이다. 나만이 그대의 가족이다. 다른 것은 없다.” “.............” “마나힘. 제국 이루에 온 것을 환영한다.” 말문이 막힌 예서의 귀에 낮게 속삭인 차빈은 예서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차빈의 두 눈은 의지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발아래에 펼쳐져 있는 곳은 말 그대로 거대한 감옥이었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듯, 예서는 숨이 막혔다. 차빈들이 본가(本家)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주위는 캄캄한 어둠속에 잠겼다. 미리 차빈의 연통을 받은 본가 가신들은 저택 앞, 계단 아래에 일렬로 도열해 있었다.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은 위엄을 갖춘 잘 훈련된 군인들 같았다. 본가는 본성에 비한다면 턱도 없을 만치 작았다. 그러나 그 화려함만은 본성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월등했다. “본가다.” “.......이건 아니야.” 망연자실 고개를 내저으며 예서는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곧 예서 뒤에 서있던 차빈에게 막혔다. “아니야. 이건 아니라고. 이러는 건 정말 아닙니다!!” “무엇이 말인가.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아직도 설명이 더 필요한가. 더 이상 같은 말 하게 하지 마라.” 차빈은 예서의 팔목을 휘어잡고 묵묵히 계단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높이가 족히 5미터는 되어 보이는, 묵직하고 거대한 저택의 문이 차빈이 계단을 하나 둘씩 오르자 양쪽으로 소리 없이 열렸다. 문 안쪽은 눈이 부실 정도로 불이 훤하게 밝혀져 있었다. “분명 착각한 겁니다. 그러니까 뭐든지 되돌릴 수 있을 때, 그게 지금이니까, 그만해요. 내가 그 마나힘일리 절대 없잖아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된다고 봐요? 우리 둘 다 남잔데요. 그것만 봐도 절대 아니라니까요.” 차빈의 손에 질질 끌려 계단을 오르는 예서의 발은 족쇄를 매단 듯 천근의 무게였다. 뿌리치려 했지만, 꿈쩍도 안했다. 예서의 목소리가 점점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차빈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마나힘.”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네? 미칠 것 같단 말입니다.” 차빈은 낮게 한숨을 쉬며 울먹이는 예서를 잠시 내려다보다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끌려가면서 예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돌아 본 예서의 눈에는 까만 어둠만이 있었다. 정원은 마구 자란 약초들로 어지러운 형국이었다. 정원이라 불리기에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차빈의 모친이자, 전대 마나힘은 몸이 약했다. 그를 위해 차빈 부친은 대륙 최고의 의원들을 옆에 두는 것은 물론이었거니와 황성 최고라 칭송을 듣던 정원을 아무 주저함 없이 갈아엎고, 대륙을 다 뒤져 구하기 어렵다는 희귀한 약초들을 구해 가꾸게 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전대 마나힘은 고작 오년동안 그의 곁을 지켰다. 반려에 관한한 심지어 잠자리까지도 공평하게 관심을 주는 것이 제국 이루의 오랜 관례다. 후계자의 모친인 마나힘이라도 한 남자의 반려로서는 다른 이들과 똑같은 위치거늘, 그 관례를 깨고 이례적으로 차빈 부친은 전대 마나힘만을 유독 가까이하며 아꼈다. 이로 인해 차빈가는 혹독한 비난의 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그럼에도 마이동풍이었다. 그러니 전대 마나힘 사후, 정원은 그 누구의 손길 한 번 받아 보지 못하고 방치되었다. 아무도 상심한 주인을 위해 입을 열 수 없었던 거다. 나루는 모든 것이 마구잡이로 자란 정원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필요한 약초들을 찾아 헤맸다. 나루는 당연히 예서를 위해 나온 길이다. 본가에 온 이후, 예서는 아예 그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오는 여정 중에도 그다지 음식에 입을 대지 않더니만, 지금은 아예 먹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밤새 뒤척였다. 본성에 있을 때는 그래도 하루에 서너 시간은 눈을 부치곤 하더니만, 본가에서는 그것도 아니었다. 나루는 하루가 다르게 눈에 보이도록 축이 나는 예서가 안쓰러워 혹여 잠이라도 푹 자게 되면 먹을 것을 찾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그예 필요한 약초를 구하려고 나선 길이었다. “하아, 이제 어쩌지?” 자주는 아니더라도 간혹 사람들을 향해 웃던 예서가 본가에서는 웃음은 고사하고 아예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다. 이 정도로 거부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라 나루로서는 막막하고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저렇게 싫어하는데, 죽을 만큼 싫다는데, 차라리 할 수만 있다면 나루는 예서를 데리고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숨어들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조금만 안정하고 인정할 때까지. 아니, 사실은 내어주기 싫다. 예서를 다른 이에게 맡긴 게 불안한 나루는 서둘렀다. 말린 약초를 작은 주머니에 넣어 베개 밑에 넣어두면, 그 향기가 사람의 마음에서 긴장을 풀어주고 곤한 잠을 준다고 했다. 그리고 약초를 찾아 허리를 굽히고 있는 나루의 얼굴 또한 창백하기는 매일반이었다. 지금도 예서의 걱정으로 눈가가 어두웠다. 당연하다. 밤새 몸을 뒤척이는 예서의 침상 머리맡을 지켰으니까. 20대 중반의 단정하고 강단이 있어 뵈는 나루의 얼굴은 광대뼈가 도드라진 얼굴이라 볼이 움푹 팬 것이 더욱 눈에 띄었다. 침실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던 예서가 침실에 없었다. 조급한 마음으로 예서를 찾아 나선 나루의 눈에 서고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가노들과 본가 가신들이 보였다. 혹시 하는 마음에 서고 쪽으로 발길을 돌렸는데, 역시나 눈에 익은 자들이었다. 나루는 성큼 그들에게 다가섰다. 분명 서고 안에 예서가 있는 모양인지, 그들은 서고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서고는 가노들에게는 금지구역이었지만, 가신들은 아니다. 그런데 가신들조차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있는 걸 보면, 예서가 단단히 거부한 모양이었다. “무슨 일들이냐? 마나힘께서는?” “부모주 나리. 마나힘께서 서고 안에 계십니다만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 하십니다.” 난감하다는 듯 가신 하나가 가노 손에 들린 음식 쟁반을 가리켰다. 음식 쟁반을 들고 있던 가노가 나루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니 드셨느냐?” “예. 부모주 나리.” “알았다. 너희는 가서 일들 보거라. 필요하면 부를 터이니.” 말을 하며 나루는 음식의 온기를 재보느라 그릇에 손을 대었다. “다시 만들어 오너라. 특히 향신료는 넣지 말라 이르고, 비위가 많이 약해지셨을 게다.” “예. 부모주 나리.” 나루는 그들을 보내고 서고문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낮고 호흡을 가다듬은 후에 짧게 안에다 고했다. “마나힘.” “...........” 안에서는 역시 아무 응답이 없었다. “작은 마나힘.” “...........” “나루입니다. 작은 마나힘. 들어가겠습니다.” 나루가 문을 여니 정면, 햇빛이 잘 드는 자리에 예서가 있었다. 예서는 힘없이 책꽂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무릎을 세워 거기에 턱을 괴고 서고 바닥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기를 천천히 반복하고 있었다. 나루는 출입문 앞에 서서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조용히 문을 닫았다. “작은 마나힘.” 예서의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 흔적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나루는 조심스럽게 예서에게 다가갔다. “뭐라고 쓰시고 계셨습니까?” “...........” 옆으로 다가온 나루의 목소리에 잠시 멈추었던 예서의 손가락은 다시 움직였다. “처음 보는 글자로군요. 작은 마나힘께서 예전에 사용하시던 글자인가요?” “지금도 쓰고 있는 글자입니다.” 예서는 나루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그리고 나루는 정정의 의미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의 뜸을 들인 후 나루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작은 마나힘, 뭐라도 드셔야지요. 오시는 길에서도 잘 드시지 않으시고, 본가에서는 아예 아무것도 입에 대시지 않으시니, 그러시면 여러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 잘 아시지 않습니까. 차빈님께서도 많이 걱정하고 계십니다.” “......생각 없어요.” 뭔가를 말할 듯 입을 벌렸다가 예서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짧게 대답했다. 핏기 없는 얼굴에 하얗게 각질 이 일어난 입술이 애처롭다. “이곳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시는지요? 향신료가 좀 강한 게 황성의 음식인지라, 본성에 사람을 보내어 주방장을 불러올릴까요?” “...........” 예서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어디 속이라도 불편하십니까. 의원을 부를까요......?” “나루 부모주는 알고 있었지요?” “뭘 말씀하시는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요? 그렇지요?” “......마나힘.” “저는 왜 여기 있는 거죠?” “.............” “저는 누구죠?” 예서는 나루의 시선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그러나 잠시 후 예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멈추었던 손가락을 들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루는 예서의 길고 매끈한 손가락을 보며 얕게 한숨을 쉬었다. “혼자 있고 싶습니다.” “............마나힘.” “혼자이고 싶어요.” 예서의 단호한 말투에 나루는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머뭇거렸다. “뭐라도 드셔야지요. 많이 축나셨습니다.”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작은 마나힘.” “그거 알아요? 내가 원하는 건 고작 하난데, 사람들은 하나같이 안 된다고만 해요. 매일 밤마다 죽은 사람들이 내 주위를 어슬렁거린다고요!! 흑. 나는 왜 차빈이라는 사람하고 엮여야 하는 건데요? 원하지 않는데, 하아, 하아, 나 너무 힘들다 싶으며 벗어도 돼요? 벗어도 되는 거죠? 그런데 벗으면, 죽어버리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사실은 그게 무서워요. 무섭다고요. 그러다 나 때문에 누가 또 죽으면요?” 격하게 흥분하던 예서의 마른 입술이 가뭄에 마른 대지처럼 쫙 갈라지며 피를 흘렸다. “마나힘!! 걔 아무도 없느냐?!!” “혼자 있고 싶습니다.” 손등으로 거칠게 입술을 훔치며 예서는 고개를 돌렸다. “다른 건 다 필요 없다고요.” “............” “마나힘.” “.............” “작은 마나힘. 차빈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나루는 두 손을 모으고 평상시와 다름없는 나직한 목소리로 예서에게 고했다. 그러나 굳게 다문 예서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예서는 말은 고사하고 나루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작은 마나힘.” “혼례의식이요? 하, 말이 돼요? 남자라는 거, 그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건가요? 아니라고 하는데, 그건 아무것도 아닌 거죠?!! 제발요. 이러지 말아요. 죽을 것 같으니까. 하아, 이렇게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면 뛰어내릴 수밖에 없는데.” 강경함과 서글픔이 서린 예서의 말에 나루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작은 마나힘.” “그렇게 부르지 마!!” 고개를 강하게 내저으며 예서는 나루를 강하게 쏘아붙였다. “.............” “싫단 말입니다. 저는 민예서입니다. 서이입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흑.” 나루와 예서는 조금의 빗김 없이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제발. 흑흑. 한번만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줘요.” 솟구쳐 오르는 눈물을 참고자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악물고 있는 예서를 바라보는 나루의 눈은 단 한 조각의 흔들림도 없었다. 굳건한 산과 같은 나루의 시선에서 예서는 절망을 읽었다. 예서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내가 봐도 이건 아닌데, 왜요? 어째서 다들 함께 미쳐 돌아가는 거예요?” 나루는 무미건조하리만큼 담담한 어조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나힘은 선택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선택을 받는 존재입니다. 작은 마나힘께서는 선택을 받으신 겁니다. 누차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차빈가의 마나힘이십니다. 아시겠습니까. 한낱 범인의 반려도, 고작 영지 하나 호령하는 귀족가도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런 어린아이나 하는 짓은 멈추시지요.” 나루의 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확고함이 담겨 있었다. “.............” 그리고 예서의 입술은 달싹거릴 뿐, 그 입에서는 그 어떤 생각도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무수한 생각들이 엉킨 실타래처럼 그 시작점을 찾지 못했다. “마나힘은 그런 존재입니다.” 나루는 예서를 올곧은 시선으로 조용히 쳐다보았다. “그게 마나힘입니다.” “.............” “눈물을 거두시지요.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나무라는 듯, 혹은 달래는 듯한, 차분한 나루의 말투에는 짙은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예서에 대한, 그리고 자신에 대한. 오늘, 더러운 권력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가장 외로운 그 자리에, 사지라 불러도 무방한 그 곳에 저렇듯 어리고 맑은 사람을 몰아넣는다. 깊은 계곡 청랑한 물속에나 어울리는 작은 사람을 오물에 집어던지는 느낌을 나루는 지울 수 없었다. 살 수 있을까. “하아.” 예서의 입에서는 흐느낌 대신 절망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마차는 나루의 작은 배려로 예서 혼자 타고 가기로 했다. 그나마 예서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예서가 마차에 오르자, 마차는 서서히 차빈 본가를 출발했다. 마차는 예서가 본성에서 타던 것과 크기만 비슷했을 뿐, 그 외에 것은 천양지차였다. 마차의 내부나 외부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마차 바퀴의 차축까지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철과 동으로 정교하고 화려하게 장식한 마차의 외부는 논외로 치더라도, 거대한 통나무의 속을 파내어 만든 마차 내부는 벽과 천장에 성수(聖水)를 상징하는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매끈하게 조각되어 있었고, 바닥은 나무의 결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윤기가 흐렸다. 교차점마다 생동감 넘치는 원색의 꽃이 정교하게 새겨진 격자 창문은 세련되고 우아했다. 그러나 창문은 걸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답답하시더라도 절대 천을 거두시면 아니 되십니다.” 말을 탄 나루는 마차 옆에 바짝 붙어, 창문에 기대어 멍히 앉아 있는 예서를 항해 낮게 고했다. 혼례의식은 극히 개인적인 의식으로 치르는 것이 관례나 차빈의 가문이 가문이다 보니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번 차빈의 반려는 하나고, 남자이며, 이계의 이방인이다. 다들 침묵으로 일관하고는 있지만, 황가를 위시하여 제국 이루가 이 혼례의식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나루는 무사히 아무 사고 없이 이 의식이 치러지길 간절히 소원했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 혼례 행렬은 대신전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푸르르~.” “워~.” 쉬지 않고 가던 마차는 이내 작은 소음들과 함께 멈춰 섰다. 예서의 입안은 긴장으로 바짝 탔다. 마차 주위에서 말의 투레질 소리와 인기척이 들리는 것도 잠시, 곧 마차의 문이 덜컥 열렸다. “마나힘. 대신전입니다.” 마차 문을 연 나루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예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차는 신전 앞, 너른 터에 벌써 도착한 것이다. 영원 하라 간절히 기원했던 것은 헛된 것이었다. 청록이 짙은 아름드리나무들이 주위를 마치 보초병들처럼 빼곡히 지키고 서 있었다. 신전 주위는 황성 안이라는 것이 무색하리만치 고즈넉했다. 차빈은 마차에서 내린 예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예서는 그 손을 쳐다볼 뿐, 선뜻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예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차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차빈은 묵묵히 예서를 기다릴 뿐,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예서는 그런 차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싫습니다.” “...............” “...........” “그대는 아직도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 나는 그대의 의견 따윈 묻지 않았다. 신 또한 그대의 생각 따위를 궁금해 하진 않는다.” “저는 인간인데요? 남자고요?” “.......그대는 나의 마나힘이다.” “아니라니까!! 민예서라는 사람입니다. 사람!!! 환장하겠다. 마나힘이라니, 제발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네?!” 안간힘을 다해 말을 하는 예서의 가슴이 턱턱 막혔다. “그대는 인간 따위가 아니다. 나의 마나힘일 뿐이지.” “이거 놔!!” 바위를 파내어 만든 겨우 두어 사람이 스쳐 지날 정도로 좁은 계단은 끌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조잡하기까지 했다. 차빈에게 마구잡이로 끌려가던 예서는 죽을 힘을 다해 버티며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나루를 비롯한 가신들과 무장 군인들이 정자세로 도열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무덤덤한 시선으로 쳐다볼 뿐, 그 누구나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다. “놓으라니까!!! 내 말 안 들려?!!!” “마나힘. 두 발로 걸어라.” 시리도록 냉엄한 어투의 차빈은 예서의 손이 파랗게 죽어도, 계단에 예서의 무릎이 쓸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차빈의 등은 단호했다. “놔 줘!!! 제발 부탁입니다. 이렇게 빌 테니까요, 제발요.” 열 세 개의 층계를 오르자, 그 위에 거대한 대신전이 웅장하게 서 있었다. 고작 2미터 높이의 장대하나 뭉툭하고 투박한 바위, 그 위에 대신전이 있었다. 밑에서는 보이지도 않던 대신전이었다. 이는 그만큼 대신전을 바치고 있는 바위가 광대하다는 걸 의미한다. 대신전을 둘러싸고 있는 맑은 물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놔!!” 신전을 보자 예서의 눈이 한 마디로 뒤집혔다. 격렬히 저항하는 예서를 단단히 품에 결박하고 차빈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마나힘. 대신전이다.” “싫어!!! 너나 해!! 난 안 할 테니까!!!” 계단과 터, 그리고 대신전은 하나의 거대한 바위다. 그리고 그 바위를 수백 년간 이름 없는 노예들이 오직 끌과 정으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조각해 들어가 만들어낸, 하나의 거대한 조각품이다. 대신전은 아름답고 섬세한 조각으로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한, 강렬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계단에서의 느낌 따윈 단번에 날려주었다. 그리고 이제 만든 자도 만들라 명한 자도 다 사라졌건만 신전만이 절벽을 등에 지고 홀로 오롯하게 서 있었다. “빌어먹을, 놓으란 말이다!!!” 물은 고작 발목에도 못 미쳤다. 한참을 예서는 차빈의 손에 질질 끌려갔다. 맑은 물은 두 사람이 일으키는 파문으로 크게 일렁거렸다. 그러나 신전 주위에는 쥐 죽은 듯,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대신전 앞에 서서 잠시 예서를 내려다보던 차빈은 부드럽게 예서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대신전 3층은 텅 비어 있었다. 굵고 커다란 기둥들과 벽에 새겨진 신을 형상화한 부조들뿐 아무 것도 없었다. 박쥐의 지독한 배설물 냄새만이 그득했다. 잠시 감시가 소월해진 틈을 타서 예서는 몰래 빠져 나왔다. 하루 네 번씩 하는 정결의식을 참여하는 것만도 버거운데, 사제들은 잠시도 예서를 혼자 두지 않았다. 물론 도망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도망의 결과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예서는 단지 잠깐 숨 쉴 틈만이라도 얻고 싶었다. “우웁......?!!” “조용히 하십시오. 작은 마나힘. 히루나입니다.” 그러나 두런거리며 3층으로 오르는 인기척에 예서가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자신의 입을 막고 끌어당기는 힘에 예서는 본능적으로 소리를 내려했다. “이곳은 일반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히루나는 낮게 예서의 귀에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최대한 작은 소리로 예서는 사과했다. “쉬. 이리로.” 히루나는 한쪽 구석에 나있는 작은 틈으로 예서를 이끌었다. 작은 통로였다. 낮고 작은 틈은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움츠려야 겨우 지나갈 수 있었다. 이곳도 사람들의 손길이 닿은 곳이라 여기저기 신을 상징하는 조각들로 그득했다. 문짝이 달려있지 않는 돌문을 통과하기도 하고, 갑자기 불쑥 나타난 신당에 놀라기도 하면서, 예서는 정신없이 히루나를 따라갔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사람의 온기는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목이 없는 사자상들을 뒤로 하자, 갑자기 커다란 신당이 불쑥 나타났다. 예서의 발이 우뚝 멈춰졌다. 어디서 들어오는지 알 수 없는 희미한 빛으로 겨우 앞을 분간할 정도의 널찍한 신당에는, 거기에는 그림들이 있었다. 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은 채색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그림을 둘러싸고 있는 글자들은 세로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예서는 단 한 글자도 읽어낼 수 없었다.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지시에 귀를 기울이라. 너희는 전심으로 너희 존재의 이름을 보존하라.” 히루나다. 예서가 마치 읽듯이 한 자 한 자 글자를 따라 손으로 천천히 훑자, 히루나가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여긴 천 년 전 가폐에서 끌려온 자들의 신당입니다. 잊혀진 곳이라고나 할까요. 이곳을 만든 노예들은 제국에서 태어나 자란 자들도 있었지만 태반은 아니었거든요. 없앨 만도 한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대로 두더군요.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태 ....양?” “하하하. 알아보시는 군요.” “사람들이 머리위에 무언가를 그릴 때는 대충 달이라든지 해라든지 아니면 별이잖아요. 그게 하나뿐이고 하니까, 해가 생각날 밖에요. 그런데 모양이 상당히 요상한데요.” 사람들의 머리위에 떠 있는 건 둥그런 태양이 아닌, 볼록렌즈였다. “극도로 강한 폭풍이 한꺼번에 엄습하리라. 대지를 뒤덮으리라. 일곱 낮과 밤 동안 홍수가 대지 위를 달리리라. 거대한 배는 폭풍에 시달리며 큰 물결위에서 요동치리니, 맹렬한 파도에 휩쓸려 다시는 그 교만한 고개를 들 수 없으리라. 인간의 멸망, 이는 신들의 회의에서 내려진 결정이다. 무지한 백성만 남겨 두리라.” “.........?” “태반의 오래된 모든 종교에는 반드시 집고 넘어가는 게 있습니다. 대홍수라는 천재지변입니다. 그건 이 쪽이나 저 쪽 마나힘 쪽이나 매한가지로 알고 있습니다. 진실은? 글쎄요. 신만이 아실 겁니다. 단지, 신의 진노 속에 신의 구원이 존재했다는 건 진실일겁니다.” “...............” “예전에는 태양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두려움의 존재가 된 것은 대홍수 이후, 그 때부터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온화하게 대지를 덥히던 해가 땅을 태우니, 그 이후 태양은 신이 되었습니다. ‘무지한 백성만 남겨 두리라.’ 그 말대로 무지했지요. 그것이 진정 신이 원했던 멸망이지 않았을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인간은 신을 잊었고, 신의 대체물을 생각해 내었지요. 그것이 태양이든, 아니면 자신들의 위대했던 조상들이든, 아니면 자신들을 홍수에서 구했다는 칠 현자든. 저로서는 상당히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이 그림은 홍수 전, 그 때를 표현한 것입니다.” 태양 아래 단정히 서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훑으며 하루나는 말했다. 거대하고 우람한 거인들, 무장한 군인들의 무리, 아름들은 여인들, 어린 아이와 노인들, 집과 나무들, 곡식들. 그리고 물결 위에 근엄하게 서 있는 일곱의 사람들. 그들은 커다란 물고기를 모자처럼 통째로 머리에 쓰고 있었다. 물고기의 비늘은 마치 막 잡은 양 싱싱하고 세밀했다. “가폐는 신의 방편으로서 홍수에서 살아남았다는 칠 현자를 통한 신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홍수 후, 짠물에서 올라왔다는 현자들입니다. 벌거숭이 인간들에게 지혜를 나누어주었다는 현자들은 자신들의 일을 마치고 다시 짠물로 돌아갔다고도 하고, 신과 같은 영원한 호흡을 얻었다고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성수(聖水)입니다.” 히루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볼록렌즈의 태양아래, 하나의 긴 줄로 물결무늬가 사람들 머리위에 있었고, 물결 위로 뱀들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로는 성수(聖水)지요. 그 예전, 그러니까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물은 하늘과 땅에 있었고, 신의 물과 인간의 물로 나뉘어져 있었다더군요. 홍수 때 땅으로 내려온 신의 물은 땅속으로 사라져 강이 되었고, 그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들의 안식처가 나온답니다.” “...............” “하하하. 이곳에 끌려온 자들이 성수(聖水)와 성수(聖獸)에 대한 고뇌를 그런 식으로 푼 것입니다. 저희들은 제국 이루에만 존재하니, 처음 접한 존재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의 물에 성수(聖水)를 대입시키고, 저희들을 한마디로 편입시킨 거지요. 뭐, 천 년 전 그 당시에는 저희 성수(聖獸)들을 현자의 후손이라 하여 두려워하기도 했지만요. 하긴, 성수(聖水)를 신의 물이라 생각했을 법도 합니다. 이해가 안 거는 건 아닙니다.” “...............” “비가 오지 않는 땅. 그러나 신의 안개가 땅에서 올라와 땅을 적시고, 온화한 태양 아래 인간이 천수를 누렸다는 그 풍요로운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있는 그림입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인간이란 존재는 때론 진저리가 날 만큼 혐오스럽다가도 그 순수함이 사랑스럽기도 하지요. 가끔 이리로 와서 머리를 식힌답니다. 나중에 제4계에 대한 이야기도 해드리겠습니다. 그도 꽤나 흥미롭답니다.” 히루나는 이해하기 힘든지 눈살을 찌푸리며 곰곰이 히루나의 말을 되씹는 예서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이 땅에는 여러 종교가 있습니다. 서로 맞물려 있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지요. 홍수 신화는 개 중 가폐의 이야기가 가장 설득력이 있어 좋아합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그 신당의 마지막 기둥 위로 좁은 하늘이 보였다. 절벽 틈이었다. 예서는 세 개뿐인 층계를 천천히 내려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닥은 푸석푸석 먼지내가 나는 마른 흙이었다. 히루나는 옆으로 길게 나있는 절벽 틈으로 예서를 이끌었다. 절벽 틈을 한참 지나자, 발아래에 커다란 못이 있었다. 히루나는 예서를 데리고 밑으로 내려갔다. 길도 없는 날카로운 바위 위를 예서는 맨발로 힘겹게 따라갔다. 신전에서는 아무도 신발을 신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못 주위에는 엉성한 나무들과 제멋대로 자란 풀들이 지천이었다. 히루나는 못가 커다란 바위에 앉았다. “대신전의 성수(聖水)입니다. 하하. 대신전의 성수(聖水)라고 하기에는 조금 초라해 보이시지요?” 못은 작아 한 눈에 다 들어왔다. 마치 오랜 가뭄 끝, 해갈을 기다리는 샘 같다고나 할까. 아니며 나이 들어 운신하기 귀찮아하는 노인네 같다고나 할까. 아무래도 이는 바짝 마른 주위풍경 때문인 것 같았다. “온화한 성수(聖水)랍니다.” “성수(聖水)도 성격이 있나요?” ‘의아하다’는 표정이 ‘이해한다’로 바뀌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서는 고개를 진지하게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예전에 본 성수는 꽤나 위협적이었거든요.” “어디서 보셨습니까?” “그 때, 그러니까, 수인이요?” “아, 그 성수는 요지부동이지요. 그래서 믿을만하답니다.” “무섭기만 하던걸요.” 히루나는 가볍게 웃으며, 작은 돌을 하나를 집어 못에 던져 넣었다. 돌은 작은 파문을 일으키며 가라앉았다. 깊고 깊은 물은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요. 성수(聖水)는 모두 다른 색깔들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인간들처럼 말입니다. 자신을 담고 있는 그릇을 쫓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을 그릇에 투영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보는 이의 마음을 비추기도 하고, 때로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색깔로 물들이기도 하지요.” “.................” “그 분들 작은 마나힘을 찾고 있는 듯싶었는데 거긴 어쩐 일이셨습니까?” “그걸 아시면서 왜 그분들에게 절 넘기지 않으셨나요?” “하하하. 넘기다니요? 작은 마나힘이 무슨 대역 죄인이라도 되십니까. 말도 아니 됩니다.” “제가 죄인하고 뭐가 다른데요?” 예서는 나이답지 않게 자조적인 웃음을 입가에 뗬다. 지긋이 성수(聖水)를 응시하는 예서의 눈은 죽은 듯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런 예서를 힐끔 보다 히루나는 천천히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파란 하늘이 눈에 시리다. 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타인의 손에 의해 그 운명이 송두리째 뽑혀 좌지우지하게 된 이 사람이. 앞으로 원치 않는 삶을 살아야할 이 사람이. “모든 것은 신으로부터 시작되어 신에게로 돌아갑니다.” 예서는 뜬금없는 히루나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신이라고요?” “그렇지요.” “그럼, 제가 여기 있는 것도 신의 뜻이고, 이 모든 일이 신의 뜻이라면, 저는 뭐죠?” “신의 선택입니다.” “하아, 모든 것이 그렇게 신의 선택이고 신의 뜻이라면, 그럼, 그럼 살인은요?! 살인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예서는 돌을 들어 반항하듯이 성수를 향해 던졌다. 예서로서는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던지 자신을 옭아매는 일이었다.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누워서 죽어가던 쿰은 악몽, 그 자체였으니까. 예서는 진저리를 치며, 이를 사리물었다. “사람들이 죽고, 쿰은 말을 잃었습니다. 저는 옴짝달싹도 못하고. 그게 얼마나 끔찍한지 히루나님은 모르실 걸요. 그것도 신의 뜻인가요?” “그건 묵인이지요.” “하하. 그게 뭐예요.” 예서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흔들리는 예서의 눈동자에 비해 그런 예서를 보는 히루나의 눈동자는 고요했다. “신의 기다림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모든 것이 신의 소관이라면, 그렇다면 인간의 자리는요?” “글쎄요. 전 모릅니다. 인간의 자리는. 전 하나의 성수(聖獸)일 뿐인 걸요. 사람들은 때로는 저희를 인간으로 착각하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저희는 성수(聖獸)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때론 인간을 집어 삼키기도 하는 거지요. 아이러니죠. 인간이 성수(聖獸)라는 이름을 저희에게 주다니 말입니다. 신의 언어인 성(聖)과 짐승의 언어인 수(獸)를 주다니 말이죠.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성수(聖獸)는 인간이라고 말입니다. 마나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히루나는 코를 찡긋거리며 장난서린 웃음을 보여주었다. “신의 자리를 찾는다면 먼저 인간의 자리를 찾는 게 순리일 겁니다. 허나 그것은 사람의 몫이지, 저희들의 몫은 아닙니다. 저희들은 방관자이자 주변인일 뿐입니다. 물론 저는 주변인이길 원해서 지금 이렇게 인간들 한가운데에 있는 거지만 말입니다. 그게 또 저의 몫입니다. 모든 만물은 자신의 몫이 있습니다.” “...........”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게 마련이지요.” “그게 히루나님의 몫이면, 제 몫은요?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제 몫이라고요? 하, 내일 원치도 않는 혼례의식이라는 것을 치르는 것도요? 그럼 그 다음의 제 몫은요?! 그리고 그 다음은요?! 차빈이라는 사람하고, 그것도 남자하고, 저를 엮어서 뭐하려고요?!! 왜요?!!” “마나힘. 그것 또한 마나힘의 몫입니다. 피할 수 없는, 피해서도 안 되는 것. 그걸 바로 인간들은 운명이라고 하더군요.” “모든 것은 그러니까 그렇게 신에게로 귀결되네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렇게 핑계를 대면서, 그렇게 도망가면 돼요? 신을 원망하면서요?” “그건 마나힘의 선택입니다.” “.......이럴 때만 내 선택이냐. 흑.” 분노서린 예서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오는군요.” 예서의 눈에 한 무리의 사제들이 허겁지겁 사색이 된 얼굴로 못을 향해 구르듯이 달려 내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걱정할까 싶어, 제가 연통을 넣어 두었습니다. 게으름뱅이들이라니까요. 연통을 넣은 지가 언젠데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고 말입니다. 무료한 신전생활이라 제가 저들한테 가끔 이렇듯 작은 유희 거리를 제공합니다. 다음에는 같이 하시지 않겠습니까.” “.............” “저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삼백년 만입니다. 혼례의식에 마나힘의 의식을 행하는 것이 말입니다.” 거대한 레탁크는 빛을 받아 음습하고 느리게 일렁거렸다. 예서는 막연한 심정으로 홀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은 빛조차 희미해질 만큼 높았다. 벽에 일렬로 서있는 석대(石臺) 위의 불이 홀과 성수(聖水)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예서를 비추었고, 움직이는 거라고는 불이 만들어내는 이지러진 그림자들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예서는 혼자였다. “돌아와 하나 되오니, 이제 그 길을 열어 주소서.” 성수(聖水)가 발바닥을 자작자작 적시자, 예서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굵고 울림이 강한 목소리였다. 예서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예서는 두려움에 떨면서 다시 한 발 조용히 내딛었다. “돌아와 하나 되오니, 이제 그 발을 인도하소서.” 성수(聖水)는 빠르게 예서의 발목에서 돌았다. 같은 목소리였다. 예서는 불안스레 주위를 살폈다.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예서는 우뚝 멈춰 서서 자신의 팔을 끌어안았다. 할 수만 있다면 도망가고 싶다. 이대로 땅이 꺼져 자신을 삼켜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돌아와 하나 되오니, 이제 가는 걸음이 하나 되게 하소서.” 물은 이제 예서에 무릎에 있었다. 뒤돌아 나가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돌아와 하나 되오니, 이제 생명의 근원을 나누게 하소서.” 잔잔하던 성수(聖水)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힘차게 용트림을 하듯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건 오직 예서의 주변뿐이었다. 처음과는 다르게, 다른 곳은 마치 유리처럼 잔잔했다. 성수(聖水)는 이제 예서의 허리에 있었다. “돌아와 하나 되오니, 이제 영원히 하나의 생명이 되게 하소서.” 가슴에서 흐르는 성수(聖水)는 이제 예서에게 크나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걸음걸음 내딛을 때마다 성수는 깊어졌고, 그 흐름은 벽 너머로 이어지고 있었다. “돌아와 하나 되오니, 이제 다시 둘이 되지 않게 하소서.” 성수(聖水)는 이미 예서의 머리를 넘은지 오래다. 발바닥은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 예서가 물 위로 떠오르려하나 할 수 없었다. 예서는 걸었다. “돌아와 하나 되오니, 이제 영원히 하나의 생명이 되게 하소서.” 가슴이었다. 그리고 이제 예서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차빈이 있었다. 차빈, 또한 예서와 마찬가지로 온몸이 온통 물에 젖어있었다. 차빈은 천천히 예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돌아와 하나 되오니, 이제 생명의 근원을 나누게 하소서.” . . . “돌아와 하나 되오니, 이제 가는 걸음이 하나 되게 하소서.” . . . “돌아와 하나 되오니, 이제 그 발을 인도하소서.” . . . “돌아와 하나 되오니, 이제 그 길을 열어 주소서.” 레탁크, 그 끝에 예서와 차빈이 있었다. 차빈의 혀가 살짝 예서의 입술을 핥자, 그 동안 아무 반응이 없었던 것이 마치 허상이라도 되는 듯 예서가 움찔거리며 사시나무 떨 듯 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건 결코 쾌락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서는 끝내 입술을 열지 않았다. 차빈은 좌우로 격하게 고개를 흔들며 자신의 입술을 거부하는 예서의 턱을 잡아 예서의 입을 열었다. “읍...!!” 뿌연 막이 씌워진 예서의 눈은 탁했다. 예서가 보이지 않는 눈을 보려 애를 써보지만 아무 소용도 없다. 모든 의식을 마치고 본가로 돌아온 예서의 눈에 나루는 맑은 액체를 넣은 후 부터다. 덜컥 겁을 내며 당황해하는 예서의 귀에 나루는 밀월의 즐거움을 위해서라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 예서가 더욱 사색이 된 건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방안을 부드럽게 떠도는 향내는 예서의 몸에서, 무릎에서 힘을 앗아갔다. 타액이 고이고, 타액이 섞이면서 젖은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앞이 보이지 않아 더욱 예민해진 예서의 귀에는 그것조차 커다란 고통으로 다가왔다. 차빈은 허리를 천천히 돌리며, 자신의 아래에 누워있는 예서의 몸을 쓰다듬었다. 차빈의 굳은 살이 박힌 손 아래에 있는 것은 분명 예서의 단정한 몸이었다. 예서는 몸을 틀고 손을 들어 차빈의 가슴을 밀어보려 했지만 도리어 그 손은 차빈에게 단단히 잡혀 위로 당겨졌다. “놔!! 아악!!” 차빈은 예서의 비명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리어 다리를 활짝 벌리고 예서의 상징 주변을 서성거렸다. 음모를 쓰다듬기도 하고, 배꼽에 손가락으로 찔러보기도 하고, 허벅지 안쪽 깊숙이 손을 넣어 애널까지 어루만졌다. 예서를 더듬거리는 차빈의 손길은 절박하고 초조했다. 여유를 갖고 탐하기에는 타는 듯한, 괴로운 목마름이 너무 컸다. 오래전부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묵직해진 자신의 아래를 차빈은 흘끔 보며 아무래도 일단 한 번 푸는 것이 먼저지 싶었다. 차빈의 손이 빨라졌다. “헉!!” 차빈이 예서의 고환을 잡고 강하게 쭈물거리자 예서에게서 헛숨을 터져 나왔다. 발작적으로 몸을 틀며 예서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차빈이 가운데 손가락의 손톱을 세워 성기에서 애널로 이어진 길을 긁어주자 허리를 들썩이는 예서의 비명에 울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이거 놔!! 건드리지 마!! 윽. 만지지 마, 제발.” 차빈은 그런 예서를 재빨리 뒤집었다. 예서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시작이지 않는가. 차빈의 입가에 비릿한 냉소가 흘렀다. 그러나 뒤집힌 예서는 더한 공포를 맛봐야만 했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차빈의 손을 피해 기어서 도망가려 했으나, 하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차빈은 커다란 손을 들어 예서의 등뼈를 따라 거칠게 훑다 애널 위에 움푹 들어가 있는 곳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예 따라 애널이 움찔거렸고 차빈의 가슴은 미친 듯이 뛰었다. 차빈은 입에 고인 침을 삼켰다. 급하다. 이러다가 예서의 몸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끝낼 것 같았다. “싫어!! 싫어!! 안 돼!!!” 차빈은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는 예서의 허리를 바짝 들어올렸다. 그리고 예서의 다리를 자신의 다리로 단단히 고정하고 예서의 둔부를 양쪽으로 힘껏 벌렸다. 숨어있는 비문이 차빈의 눈에 확연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 흠도 없는 비문은 깨끗하고 고운 빛깔을 띠고 있었다. 차빈의 호흡이 눈에 띄게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이러는 건 아니야. 이러지 마. 제발. 흑.” 차빈이 애널 주위를 간질이듯 손가락으로 매만지자 예서가 애널에 힘을 주며 몸을 움찔거렸다. 느끼는 거다. 차빈은 예서의 둔부를 힘껏 벌리고 혓바닥으로 예서의 애널을 핥았다. 예서의 모든 것을 눈으로 볼 것이고, 손으로 만질 것이고, 혀로 맛볼 것이다. 흥건한 타액은 비문에서 성기로 가는 길을 타고 흘러 내렸다. 비문을 두드리던 차빈의 혀가 그 문을 열었다. 뜨겁게 조이는 예서의 안으로 거침없이 차고 들어온 차빈의 혀를 예서의 비문은 밀어내려 했다. “윽!!!” 차빈은 낮게 혀를 차며 예서의 둔부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꽤나 세게 때려선지 곧 예서의 둔부에 차빈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차빈은 원을 그리듯이 부드럽게 그 자리를 어루만지다 아무 기교 없이 그저 어미가 새끼를 보듬듯 핥고 또 핥았다. 그러나 곧 차빈은 자신의 손가락을 오일에 적셨다. “그만!!! 멈춰!!!!! 빌어먹을, 거기서 멈춰 제발. 윽!!” 오일이 듬뿍 묻어있는 차빈의 손가락은 쉽게 예서의 안으로 들어갔다. 예서의 몸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빈은 깊숙하게 손가락을 묻었다. 드나드는 손가락의 감각에 예서의 허리가 잘게 떨렸다. 가늘게 떨리는 허리를 차빈은 혀로 핥다 곧 이를 드러냈다. “흑.” 끔찍하다. 예서 자신의 몸에 닿는 차빈의 손길이, 자신의 몸속을 드나드는 차빈의 존재가 단지 폭력이건만, ...........그런데 과연 이걸 폭력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싫어!!!” 차빈이 격렬하게 반항하는 예서의 한 팔을 뒤로 깎자, “컥!!” 하는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그 고통으로 예서의 저항이 잠시 멈추었다. 그 사이 차빈은 두 번째 손가락을 예서의 애널에 묻었다. 자신의 손가락을 삼키는 예서의 애널을 보는 차빈의 눈은 욕망으로 흐려졌다. 붉게 충혈되기 시작한 예서의 애널과 자신의 굵고 단단한 손가락. “나의 마나힘.” “아악!!!” 부러뜨릴 듯이 뒤로 꺾은 예서의 팔에 힘을 주며 차빈은 몸을 숙여 예서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차빈의 목소리는 잔뜩 탁해지고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예서는 그 뜨겁고 축축한 숨결에 진저리를 쳤다. “윽. 그만둬. ......제발요. 흑.” “어리석은 저항 따윈 지금 멈추는 것이 좋아.” 예서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하아, 안 돼. .....이러지 마.” 고개를 저으며 끝내 거부하는 예서로 인해 차빈의 검은 눈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일렁거렸고, 그 순간 차빈은 손가락을 거칠게 빼내었다. 차빈은 뒤로 꺾었던 예서의 손을 놓곤 예서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아직 아무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 예서의 안으로 무섭게 파고들었다. “아악!!” 차빈의 뜨거운 불기둥은 예서의 몸을 단숨에 둘로 갈랐다. 그 강렬한 존재감과 몸서리쳐지는 고통에 예서는 몸부림쳤다. 죽고 싶다. “허억! 아~악!!!” 차빈은 강하게 거부하는 예서의 애널을 무시하고 앞뒤로 조금씩 움직이며 점점 예서의 속으로 자신을 깊게 묻었다. 이런 격한 움직임에도 용하게 예서의 애널은 한껏 벌어질 뿐 찢어지지 않았다. 그건 남자를 품는 게 일반적인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터부시되는 것 또한 아니기에 제국 이루에서는 남자들을 위한 물품들이 꽤나 쓸 만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처음인 예서를 위해 차빈은 고작 애널을 이완시키는 오일만을 쓸 뿐, 약은 전혀 쓰지 않는다는 거에 있다. 만약 약을 썼다면 예서는 둔탁한 아픔만을 느끼며, 조금은 감당하기 쉬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예서는 맑은 정신으로 그 끔찍한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더불어 차빈 자신의 존재감까지 너무도 선명했다. 기절하고자 하나 그럴 때마다 방안을 떠도는 알 수 없는 향취가 예서를 자지러지듯 흔들어 깨웠다. 다 풀지 않은 애널에 밀고 들어온 차빈으로 인해 상상할 수도 없는, 생각해보지도 못한 모진 고통 속으로 예서를 내몰렸다. 고통은 예서의 몸보다 정신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이 고통을 멈추게 할 수 있다면 예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으윽!!!” 먹임직스러운 하얀 둔부 사이를 가르고 있는 자신의 검붉은 상징. 그리고 뜨겁게 조이는 예서의 안은 차빈으로 하여금 눈으로도 몸으로도 더 할 나위없는 쾌감을 안겨주었다. 머릿속을 하얗게 비우는, 온몸을 태우는 이 미칠 것 같은 쾌락은 차빈에게 견딜 수 없는 흉포함마저 얹어 주었다. “하아. 나의 마나힘.” “아악!!! 멈춰!!! 흑흑흑.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윽.” 완전하게 맞물린 자리를 매만지며 탁하고 갈라진 음성으로 차빈은 예서를 불렀다. 그리고 경련을 일으키듯이 떠는 예서의 허리를, 숨이 넘어 갈 듯 꺽꺽거리는 예서의 등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차빈은 입을 열었다. “마나힘. 그대는 나의 것이다. 잊지 마라.” 그리고 그 순간 차빈은 힘차게 움직였다. 자신을 받아내기도 버거워하는 예서의 둔부를 있는 대로 잡아 벌렸다. “아악!!!” 조금의 배려도 망설임도 없이 지독히도 잔인하게 예서의 몸을 드나드는 차빈의 상징이 몸서리칠 만큼 선명하다. 벗어나려고 죽을 힘을 다해 몸부림을 쳐도 단단하게 구속된 예서의 몸은 그저 차빈의 손아귀에서 힘없이 흔들릴 뿐이었다. 끔찍할 정도로 싫지만, 이건 단순한 폭력이다. 그렇게 믿기에, 아니 믿고 싶어서 예서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몸을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이 날대로 성이 난 차빈의 상징에 비해 예서의 것은 그저 아무 힘도 받지 못한 채로 힘없이 흔들거렸다. 그러나 벌거벗겨진 체로 너무도 깊이 들어온 차빈은 진저리칠 정도로 예서 자신과 하나였다. 온몸의 체액이 뒤섞이고, 강렬하게 코로 밀고 들어오는 차빈의 체향은 영원히 예서의 뇌리에 남아 기억될 것이다. 예서의 온몸을 감싸고 있는 차빈의 뜨거운 온기와 귀에 잡히는 거친 숨결.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윽.” 단말마의 신음과 함께 강하게 밀어 붙이며 차빈이 멈추자 뜨거운 것이 예서의 안에 퍼지며 차빈이 예서의 등위로 무너지듯 서서히 겹쳐졌다. “하아. 하아. 제발.... 흑.... 이제 그만..... 그만해.... 줘요..... 흑.” “마나힘.” 가늘게 떨리는 예서의 어깨에 입을 맞추며 차빈은 나지막이 예서를 불렀다. 그 음성에는 만족감이 넘실대고 있었다. 차빈은 몸을 일으키며 예서에게서 단숨에 자신을 빼내었다. “으윽!” 순간 이물질이 빠져가는 배설감과 움찔거리며 격하게 다물어지는 애널, 그리고 경련을 일으키듯 움직이는 뱃속으로 인해 예서는 본능적으로 몸을 말아 그 모든 것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차빈은 그것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예서를 똑바로 눕히며 자신의 정액으로 질척거리는 애널 속에 손가락을 넣어 휘저었다. 예서의 허리가 고통으로 튕기듯이 들썩거렸다. “나의 마나힘. 지금부터는 순순히 반응하는 것이 좋을 거다.” 손가락 세 개로 예서의 몸속을 더듬으면서 차빈은 예서의 상징을 덥석 입에 물었다. 방안을 떠도는 나른한 색향으로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몸이다. 차빈이 그렇게 입안에 넣고 혀로 굴리자 예서의 뜨거운 피가 아래로 몰리기 시작했다. “안 돼. 하지 마.... 하지 마. 아악!!!” 예서는 몸서리나도록 끔찍했다. 이제까지는 폭력이었으나, 지금부터는 아니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예서가 온몸이 들썩거리며 몸을 틀어 차빈에게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용을 써도 이미 힘이 들어가지 않은 몸으로는 무리였다. “흑흑흑. 그만. ......제발. 부탁 ......입니다. .....이제 놔 주세요. 할 만큼 했으니까... 흑흑. 그만.... 윽!!!!” 흐느끼며 애원하는 예서의 소리를 차빈은 철저히 묵살했다. 그저 더욱 예서를 자극할 뿐이었다. 점점 힘을 받기 시작한 예서의 요도 끝을 혀를 세워 찌르기도 하고 핥기도 하며 강한 거부의 몸짓을 하는 예서를 주시할 뿐이었다. 그 때였다. 예서의 눈이 커지며 허리가 활처럼 퉁겨졌다. 온몸을 관통하는 그 감각에 예서는 헐떡이며 몸을 뒤틀었다. 그건 통제할 수 없는 본능적인 쾌락이었다. “여긴가.” 나른하게 웃으며 차빈은 방금 자신의 찾아낸 애널 속 예서의 극점을 손가락으로 자극했다. 그러자 예서의 상징이 급격하게 꼿꼿이 자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뭐.....?!! 아니야. 아니 ...야!!” 고개를 거칠게 내두르며 예서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곧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숨을 쉴 수 없어 헐떡이게 되고, 온몸에 수천의 개미들이 빠르게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간지러움에 몸을 틀게 된다. 손끝까지 선명한 신경은 너무도 예민하게 서 있어서 마치 피부가 한 꺼풀 벗겨진 것 같았다. 이제 차빈은 더 이상 예서의 상징을 건드리지 않아도, 예서의 몸이 강하게 무언가를 원하기 시작했다. “아윽!” 예서의 허리가 다시금 퉁겼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두 손으로 시트를 틀어쥐고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나, 곧 예서의 입에서 흐느낌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넘쳤다. “흑흑. .......제발.” 예서의 얼굴 옆에 자신의 한 팔을 짚고 예서를 덮치듯이 내려다보고 있는 차빈의 팔을 예서는 움켜쥔 시트를 놓고 더듬거리며 붙잡았다. 눈으로는 차빈을 볼 수도 확인할 수도 없지만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신경은 차빈의 작은 움직임도 숨결도 잡아내어 차빈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나의 마나힘.” “흑.” 애널을 자극하는 차빈을 따라 예서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서.” 차빈은 몸을 굽혀 예서의 입술위에서 예서를 불렀다. 그리고 곧 예서의 입안으로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으며 예서의 입술을 덮었다. 난생 처음 겪는 폭발하고 싶은 쾌락은 예서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차빈을 따르게 했다. 본능이 먼저였다. 차빈의 혀를 맞이하는 예서의 혀는 능숙하지는 못해도 그렇다고 서툴지도 않았다. 몇 번의 경험을 연상시킬 정도? “으윽!!!” 차빈은 예서의 혀를 이빨로 끊어낼 듯 씹었다. “남자를 아나?” 차빈은 애널에서 거칠게 손가락을 빼내어 예서의 상징을 강하게 거머쥐며 예서의 입술위에서 잇새로 말을 밀어내듯이 으르렁거렸다. “...아....... 니.... 아악!!!!!” 예서는 손가락이 급하게 빠져나가는 불쾌한 배설감과 자신의 상징에서 일어나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고통에 차빈의 손을 뜯어내려 몸부림쳤다. “여자는?” “아파!!! 윽!!!” 예서는 비명을 내지르며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차빈은 만족한 듯 예서의 상징을 한 번 강하게 움켜쥐었다 놓고는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예서의 귓불을 날카로운 송곳니로 씹었다. 변덕스럽게 예서의 상징을 매만지던 손을 차빈은 예서의 애널 속으로 부드럽게 밀어 넣으며, 다시금 예서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안아라.” 예서의 가슴위에서, 예서의 유두를 핥으며 차빈은 평온한 말투로 예서에게 명령했다. 예서는 떨리는 손을 들어 차빈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온몸을 내달리는 쾌감과 충족되지 않은 쾌락은 차빈을 거부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와 이성을 배반했다. 그저 놓여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자 미끄러지듯이 차빈은 머리를 아래로 내리며 예서의 상징을 입에 물었고, 그 순간 하얀 빛무리를 보며 예서는 몸을 떨었다. 예서의 초점 없는 눈에서는 맑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넘쳤다. “하아......” 누워있는 예서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빈은 꿇고 있는 자신의 단단한 허벅지 위로 예서의 둔부를 다시금 추슬러 올려놓았다. 차빈이 빠르고 짧게 치고 오를 때마다 예서의 입에서는 예의 변함없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맞추듯 차빈은 점점 빨라졌다. 그러면서 차빈은 한 손으로 예서의 상징을 지분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발기되어 있는 예서의 것은 바르작거리며 떨 뿐, 액은 나오지 않았다. 귀두 부분은 표피가 벗겨지고 빨갛게 부어 있었다. 너덜너덜하다고나 할까. 차빈은 그런 귀두를 자극하며 예서를 괴롭혔다. “윽!!!” 잠시 후, 차빈은 힘껏 밀어붙이며 눈을 감았고, 억눌린 신음과 함께 예서의 안에 자신을 폭발시켰다. 그리고 예서의 안에서 자신을 단숨에 빼내었다. 예서의 배는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며 밀려오는 배설감에 헐떡이며 괴로워했다. 차빈은 자신이 머물고 있던 예서의 안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자신의 정액으로 질척거리는 예서의 안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차빈이 예서의 극점을 자극하자, 예서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밀월의 시간동안 차빈 자신이 끝나도 차빈은 예서를 단 한순간도 쾌락에서 놓여나지 못하게 했다. “흐윽.” 그리고 쾌락에 괴로워하는 예서의 모습을 보며 차빈은 묵직하게 다시 힘을 받기 시작했다. 애널 속을 지분거리며 차빈이 예서의 유두를 날카로운 송곳니로 잘근거리자 유두에서 한 두 방울씩 피가 맺혔다. 차빈은 그런 예서의 유두를 강하게 빨았다. 예서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이를 악물었다. “윽.....!!!!” 그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예서의 골반에는 차빈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고, 예서의 온몸은 차빈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특히, 목과 겨드랑이, 성기 주변과 허벅지 안쪽, 가슴, 손목 안쪽, 무릎 뒤쪽 같은 예민한 곳에는 차빈의 이빨 자국이 더욱 두드러졌다. 차빈의 눈에 드러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차빈의 혀가 지나가지 않은 곳이 없었고, 차빈의 손가락이 만져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예서와 차빈의 하체는 축축하게 젖은 지 이미 오래다. 하얗게 말라붙어 있는 곳도 있었다. 땀으로 범벅이고 체액으로 온몸이 축축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빈은 예서를 탐했다. 좀 더 깊이 연결되고 싶었던 차빈은 예서를 뒤집었다. 예서는 아무 저항 없이 뒤집혔다. 차빈은 예서의 허리를 곧추 세우고, 단단하게 잡았다. 예서의 애널은 끊임없는 관계로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도톰하게 부어올라 있었고, 짙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느슨하게 다물고 있는 비문에서는 차빈의 정액이 비집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차빈이 예서의 둔부를 힘껏 잡아 벌리자 비문은 문을 열고 작은 틈새를 만들었다. 차빈은 단번에 예서의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뜨거움이 차빈의 온몸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예서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차빈은 자신을 빨아들이는 예서의 안에서 미칠 것 같은 욕망에 헐떡거렸다. 시트를 틀어쥔 예서의 주먹은 하얗게 핏기를 잃고 있었고, 그런 예서를 보는 차빈의 눈은 쾌락으로 한껏 흐려져 있었다. 몇 차례 뒤에서 몸을 깊게 묻던 차빈은 예서의 안에서 자신을 단숨에 빼내어 예서를 다시 놀려 눕혔다. 그리고 다시금 강하게 치고 들어갔다. 입술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붓고 피가 말라붙은 예서의 입술을 탐하며 차빈은 강하게 예서를 껴안았다. 한 치의 틈도 없이 하나가 된 차빈의 몸을 예서는 부들거리는 팔을 들어 힘겹게 끌어안았다. 티끌만큼의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멍한 머리와는 달리 몸은 차빈의 몸에 반응하고 있었다. 애정이나 쾌락과는 무관한 행동이었다. 그저 습관처럼 무의식적인 반응을 보였다. “으윽!” 짧은 단말마를 끝으로 차빈은 예서의 몸 위로 쓰러졌다. 격렬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예서의 가슴위에서 차빈은 소리 없이 짧게 웃었다. 차빈이 몸을 반쯤 일으켜 입을 벌리고 숨을 몰아쉬는 예서를 가만히 쳐다보다 손을 들어 예서 자신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주자 순간 예서가 움찔거렸다. 차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예서의 머리카락을 계속 넘겨주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듯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나힘.” 차빈은 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예서의 입안으로 흘려 넣어주었다. 예서는 고분고분 받아넘겼다. 이제 더 이상 차빈에게 예서는 저항하지 않았다. 심지어 예서는 차빈이 음식물을 씹어서 넘겨주어도 순순히 목으로 넘겼다. 갑자기 몰려오는 피로감에 차빈은 그대로 예서의 가슴 위에서 잠을 청했다. 낮도 밤도 없는 오직 관능만이 숨 쉬던 사흘간의 밀월은 이렇게 끝이 났다. 커다란 방 안은 후끈 달아올랐던 정사의 냄새로 가득하다. 끈적이며 피부에 달라붙는 그 나른한 색향에 저도 모르게 나루는 얼굴을 붉혔다. 사흘 만에 열린 방안 풍경은 그대로였으나 냄새는 진득하니 변해 있었다. 그러나 조용한 걸음으로 침상으로 다가가던 나루의 얼굴이 한순간 창백하게 굳었다. “이 무슨...?!!” 한껏 흐트러진 침상에 나루 자신의 소중한 마나힘이 맥없이 앉아있었다. 온몸에 거친 정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내보이며 정신을 멍하니 놓고 있는 예서의 몸은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예서의 눈과 마주친 나루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졌다. 예서의 눈이 텅 비어있었다. 급하게 다가서자 예서는 무너지듯 나루의 품에 안겼다. “나루........” 나루는 침상에 주저앉으며 허겁지겁 예서를 품에 끌어안았다. 추슬러 마주 댄 볼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고 뜨거웠다. 가늘고 거친 숨을 겨우 내어뱉는 듯 예서의 마른 입술을 살짝 벌어졌다 다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있는 힘껏 나루는 예서를 끌어안았다. 감히 주인을 모시는 부모주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나루는 지금 제정신일 수 없었다. 그러기에 태어나 오랜 세월 몸에 익힌 예법 따윈 지금 이 순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작은 마나힘.”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자신의 품에서 늘어져 있는 예서를 나루는 조심해서 들어올렸다. 가뿐하게 들리는 예서의 몸에 나루는 흠칫 몸을 떨었다. 침상노예라도 이렇게 안을 수는 없는 거다. 나루는 욕지기가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이를 악물고 참았다. 밀월의 방에 예서를 밀어 넣었던 자신을 저주하며, 처음으로 느끼는 주인에 대한 증오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나루는 급히 방과 연결되어 있는 욕실로 향했다. 그는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가노들을 눈짓으로 내보냈다. 가노들도 예서의 상태에 당황하며 화급하게 물러났다. 뜨거운 욕탕에 예서를 안은 채 나루는 들어섰다. 이 욕탕을 준비하면서 자신은 얼마나 설렜던가. 밀월을 끝낸 두 사람을 위한 곳이기에 진기한 물품들로 가득 채워 놓았거늘, 아니 사실은 집중할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예서와 차빈이 들어간 방문 앞을 서성이는 낯선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흠칫거리며 당혹했기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초조감을 다스릴 그 무엇이 필요했다. 나루는 마른 나뭇잎처럼 흔들거리는 예서를 고쳐 안았다. 이 순간 나루는 자신이 부모주임도 잊었다. 시중드는 모든 가노들을 물리고 아무도 없는 욕탕 안에서 나루는 말없이 예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생기 없이 메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나힘. 다 끝났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편히 쉬십시오.’ 그러나 마지막 말은 목이 메어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떨리는 손으로 이마에 흩어져 있는 예서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매만질 뿐이었다. 거친 차빈의 흔적을 하나하나 매만지며, 그 위에 물을 끼얹으며, 나루는 눈물을 삼켰다. “......힘. ..........마나힘... 작은 마나힘.” “..............” 나루는 예서를 나지막이 불렀다. “마나힘. 일어 나셨습니까?” “...........” 나루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예서를 보며, 평상시와 다름없는 따스함이 배어있는 미소를 띠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일상적인 인사말을 듣자, 예서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나루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예서의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그리고 그런 예서를 보는 나루의 마음은 착잡하고 무언가로 가슴을 후벼 파내는 듯 아팠다. 예서는 그 때 그대로 고열을 내며 쓰러진 후, 지금 이 순간까지 근 일주일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나힘. 작은 마나힘. 아무 말씀 안 하셔도 되십니다.” 입을 달싹거리는 예서를 보며 나루는 처연하게 웃었다. “마나힘. 물 좀 드릴까요?” 예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짝 메마른 예서의 입에 나루는 숟가락으로 물을 떠 넣으려 했으나, 누워있는 예서에게 무리였다. 나루는 예서를 반쯤 일으켜 등에 쿠션을 조심스레 대준 후, 물을 먹었다. “마나힘. 뭐 좀 가져다 드릴까요? 뭐 좀 드시겠습니까?” 예서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나루의 시선을 피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작은 마나힘. 뭐라도 드셔야지요? ......차빈님께서 많이 걱정 하셨습니다. 아십니까? 마나힘께서는 일주일 동안 잠들어 계셨답니다. 하하하. 잠꾸러기 마나힘을 기다리느라 다들 많이 힘들었습니다.” “.............” 나루의 밝은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서는 아무 반응도, 아무 말도 없었다. “...................” “................” “......쉬고 싶어.” 잠시 후, 예서의 입에서 심하게 껄끄럽고 갈라진, 메마른 소리가 나왔다. “예. 드실 것을 준비할 동안 잠시 쉬고 계십시오.” “......집에 가고 싶어.” “...............” “.......................” “엄마가 만들어 준 죽이라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거라면 모든 걸 다 잊고, 툴툴 털어 버리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생기 없는 목소리였다. “.................” “..............집에 가고 싶어.” “..........” “.....................” “...............” “마나힘. 이젠..... 이젠 여기가 원하던, 원하시지 않던, 싫어하셔도 마나힘의 집이십니다. 전 마나힘이 마나힘이시라 한없이 기쁩니다. 작은 마나힘을 모시게 되어서 말 할 수 없을 만큼 즐겁습니다. 그러니 평생 옆에서 모실 겁니다. 이 나루는 평생 마나힘 옆에 있을 겁니다.” 나루는 눈물이 맺혀있는 예서의 눈을 뜨거운 물수건으로 덮었다. 나루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눈물과 함께 아프게 삼켰다. 그리고 예서가 그런 나루의 손을 잡고 흐느꼈다. “식사하시는 마나힘 손에 잔을 건네 드릴 때, 제게서 받은 잔에 입을 대고 저를 향해 조용히 웃는 마나힘을 뵐 때, 이 나루는 한없이 설렙니다. 하하. 그거 아십니까. 마나힘께서는 유난히 눈으로 웃으시더군요. 눈을 떠서 하루가 시작되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오늘도 마나힘을 모실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주무시는 마나힘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드릴 때, 이 나루는 가슴이 뿌듯합니다.” “흑흑흑.” “저희 마나힘은 삶은 당근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니까 당근은 꼭 볶아 드려야 하지요. 옥수수는 또 구우신 것을 싫어하셔서 반드시 삶아 드려야 하고요. 저희 마나힘은 단 걸 유난히 싫어하시는데, 가신들이 모르고 드리면 얼렁뚱땅 옆으로 밀어 내실뿐,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결코 뭐라 하지 않으십니다.” “......흑흑.” “그리고 저희 마나힘은 큰 소리 내는 걸 싫어하셔서 가노한테 조차도 얼굴을 붉히신 적이 없으십니다. 아무한테나 존대를 해서 가노들을 기함하게도 하시지요. 실은 작은 마나힘 때문에 오줌까지 지린 가노도 있습니다. 하하.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소서.” “흑흑흑.” “........또 밤에 잠이 오시지 않으시면 몰래 살짝 방을 빠져 나와 아무나 붙잡고 별자리를 물어보시는 게 취미라, 심장 작은 가노들 놀래게도 잘 하시지요.” 예서는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수건을, 나루의 손을 치웠다. “그리고 저희 마나힘은 어린 가노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걸 즐겨 하십니다. 마나힘의 미소를 보면서, 나루는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충혈된 나루의 물기서린 눈을 보는 예서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그런 예서를 보며 나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을 겁니다. 지켜드릴 겁니다. 이 나루가 ....웃게 해드릴 겁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조금.......” “조금 더 드시지요.” 힘겹게 숟가락을 내려놓는 예서를 보며 나루는 한 번 더 권했다. “........많이 먹었습니다.” 그러나 버거운지 예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드시지요.” 자신을 애처롭게 쳐다보는 나루를 올려다보다 예서는 마지못해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수저 뜨는 것이 고작이었다. 예서는 쟁반을 밀었다. 나루는 안쓰러움이 서린 낮은 한숨을 내쉬며 쟁반을 옆에 서있는 가노에게 넘겼다. “고맙습니다.” 걱정 반 염려 반으로 조심스레 예서를 눕히는 나루를 보며 예서는 농을 하듯 말을 내었다. 많이 지친 눈빛 속에서도 작게 반짝이는 미소에 나루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깨어난 지 사흘만의 미소였다. “저 이제 쉴 테니까, 나루 부모주도 가서 쉬...!!! 우욱!!” 예서는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나루는 급한 마음에 예서의 토사물을 손으로 받아 내었다. 맑은 스프는 소화되지도 못하고 그대로 나왔다. 토사물의 냄새는 역하지 않았지만, 비유가 약해진 예서를 위해 나루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가노들까지 덩달아 다급해했다. “이건 악몽일거야. 그런데... 그런데 너무 끔찍한 악몽이라, 꿈인데도.... 너무 힘들어요.” 예서는 토사물로 더러워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울먹였다. “......마나힘.” “인생은 너무 빨라 찰나라면서요? 하하. 다행이다. 그렇지요?? 정말 다행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는 게 인생이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제 인생도 그렇겠죠? 그래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왜 이렇게 힘들까. 이제 겨우 시작인데.......” 자신도 모르게 나루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주인과 부리는 자의 선을 넘어서는 행동이었다. 부림을 받는 자는 주인의 자리 그 일정선 안으로 절대 들어설 수 없다. 그러나 나루는 그런 것 따위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이 안쓰러운 사람을 위로하고 품고 싶은 마음만이 들 뿐이었다. 소매 없는, 간결하고 정결한 냄새가 나는 나루의 윗옷을 붙잡고 예서는 목 놓아 울었다. “......형.” 예서는 가족의 냄새가 너무도 그리웠다. 그래서 그 비슷한 누군가의 위로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형이라 나루를 부르고는 있으나, 그건 나루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대신이었다. 그건 나루도 예서도 잘 알고 있었다. “......마나힘.” ‘...........나의 연인이여.’ 나루는 자신의 깊은 속에서 울리는 음성에 눈을 감았다. 어깨를 부들거리며 흐느끼는 예서를 안아 위로해 주고 싶은 간절하고 간곡한 마음을 긴 호흡과 함께 내리 눌렀다. 그리고 예서를 끌어안으려는 두 손을 허공중에 두고 눈을 감았다. “.................” 그리고 열려진 문 사이로 그런 둘을 차빈은 냉혹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훕!” 기압소리와 함께 차빈은 재빠르게 한발 앞으로 나섰다. 칼끝은 정확하게 마힌의 심장을 향했으나 제국 최고의 검사라는 소리를 듣는 마힌답게 아슬아슬하게 차빈의 칼끝을 피했다. 차빈은 짧게 혀를 찼다. 두 사람은 다시 칼끝을 마주 대하고 서로의 틈을 노렸다. 상대를 매섭게 노려보며, 천천히 상대의 주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두 사람은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였다. 집중하고 있는 차빈의 눈은 한없이 고요하고 차가웠다. 그리고 이번에도 차빈이 먼저였다. “욱!” 마힌의 오른팔을 노린 차빈의 공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마힌은 오히려 막아서며 순식간에 치고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마힌의 반격에 차빈은 밀려나듯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차빈은 자세를 바로 잡고 칼끝을 가다듬었다. “흩으러 지셨습니다.” 곱상한 외모답지 않게 걸걸한 목소리의 마힌은 심드렁하게 말을 내뱉었고, 그런 마힌의 말에 차빈은 이를 낮게 갈았다. 차빈의 단정한 얼굴선을 따라 한 방울의 땀이 흘러내렸다. “하아... 하아.........” 칼끝을 땅에 꽂고 손잡이에 의지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차빈은 수그렸던 몸을 일으켰다. 차빈의 온몸은 땀으로 흥건했다. 차빈은 속눈썹에 떨어진 땀방울이 귀찮다는 듯 거칠게 손등으로 닦았다. 마힌은 그런 차빈 옆에서 담담하게 서 있었다. “역시 무리인가.” 처음부터 승부는 정해져 있었다. 온갖 생각으로 어지러운 칼끝이 어찌 상대를 제압할 수 있겠는가. 차빈은 그저 승부보다 진한 땀을 흘리며 마음을 다스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제 갓 스무 번의 추수기를 맞이하고 있는 차빈의 얼굴은 다 자라지 않아서인지 고울 정도로 부드러운 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눈매가 날카롭고 입매가 강인해서 그다지 그 부드러움이 도드라져 보이지는 않았다. 한 쪽 입술 끝을 말아 올리며 피식거리는 차빈의 미소가 꽤나 씁쓸하다. “처음부터 호흡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가끔, 예서를 향해 어색하고 딱딱한 미소를 지을 때면 수줍은 소년같이 보일 때도 있긴 하다. 그 미소를 떠올리며 마힌은 혼자서 히죽이 웃었다. 눈앞에 이 어르신이 언제 소년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태어날 때부터 차빈은 차빈이었다. “지금 나한테 건방지게 검사의 마음가짐을 가르치려는 건가.” 팔짱을 낀 가슴을 내밀며 차빈은 싸늘하게 물었다. 꼿꼿하게 세운 허리 근육의 긴장감이 단단하다. 그 모습에 마힌은 혀를 낮게 찼다. 역시 차빈은 차빈이다.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심드렁하게 마힌은 대답했다. 꽤나 건방지다면 건방진 태도였다. 그리고 상대방을 향한 말투 또한 퉁명스러웠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함께 검을 쥐고 자란 상대방을 존중했다. 말투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마힌은 몰락한 집안이지만 분명 귀족가의 자제다. 본인은 별로 가문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의지가 없지만, 마힌에게 있어서 칼이 곧 가문이었고 신이었고 자신이었다. “어린 시절에도 이런 무딘 검을 저에게 겨눈 적이 없었다는 것만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서가 아직 누워있다.” “예.” 칼날을 어루만지면서 마힌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왤까?” “글쎄요? 아마도, 차빈님께서 너무 괴롭혀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뭐, 달리 이유가 있겠습니까?” 어깨를 으쓱거리며 마힌은 관심 없다는 듯 대꾸했다. “마힌. 너는 모른다.” 웃으면서 차빈은 말을 했지만, 그러나 말끝은 쓴 맛을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약초 정원?” “예. 며칠 전에 본성 부모주가 보여드렸더니, 그 곳이 꽤나 마음에 드셨나 보더군요. 오늘도 부모주를 따라 그 쪽으로 나가셨습니다.” 굵은 주름에 날카로운 인상의 본가 모주간은 느긋한 목소리로 고했다. 이가 수십 년간 차빈 본가를 지키고 있는 모주간 ‘나이’다. 본성 모주간 찬마밀이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라면 본가 모주간 나이의 모습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치열한 황성에서 차빈 본가를 지키는 파수꾼이었으니까. 이제 성인이 되어 자신에게 커다란 등을 보이며 서 있는 차빈을 바라보는 나이의 시선은 무표정 속에서도 장성한 손자를 기특하다 바라보는 조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 하긴 마나힘은 그런 걸 좋아하더군.” 예서를 생각하는 건가. 차빈의 얼굴이 놀랄 만큼 순식간에 풀렸다. 분별하기 힘들 정도로 미미한 변화였지만, 마치 또래의, 연인으로 인한 설렘에 몸 둘 바를 모르는 여타의 다른 사내아이 같았다. 그를 보는 모주간 나이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워졌다. 차빈은 태어나면서부터 차빈이었다. 어린 두 어깨에 그 무거운 짐을 짊어졌음에도 그 여린 입술을 한일자로 꾹 다물고 앓는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하이에나 같은 다른 세력가들에게 막말로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잔인하고 냉혹하게 살아올 수밖에 없는 세월이었다. 그래서 모주간 나이는 한도 끝도 없이 불안했었다. 그런데 기쁨에 들떠 어쩔 줄 몰라 하는 차빈을 보면서, 더군다나 어찌 보듬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난처한 표정으로 예서를 안고 호수 한가운데 서 있는 차빈을 봤을 때, 나이는 깊이 안도했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입술만 달싹거리다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차빈은 말했었다. “나의 마나힘이다.” 라고. 태산 같은 차빈가를 지탱하는 건 차빈이다. 그러나 그런 차빈의 버팀목은 이제 그 누구도 아닌 예서다. 그가 웃음을 알고, 눈물도 알고, 아직은 미흡하지만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사람이기에 나이는 안도한다. 권력이 뭔지도 그리고 그 더러움도 모르기에 전혀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건 차빈이 그늘이 되어 줄 것이다. 나이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이 둘 옆에서 이 둘이 조금 자랄 때까지만 함께할 수 있다면 여한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다. “정리 좀 해 놓으라고 말해 놓았습니다. 약초들을 좋아라 하시니 약초들은 그대로 두려 합니다만.” 커다란 사자대(寫字臺) 위의 파피루스를 유심히 살피고 있던 차빈은 나이의 말에 잠시 고개를 들어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끄덕였다. “그래. 좋아. 그렇게 하도록.” 차빈은 사자대(寫字臺) 위에 파피루스를 도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예. 그럼 그리로?” “그래.” “그럼, 그리로 간단한 다과를 내보내겠습니다.” 차빈은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짧게 까닥이며 나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런 차빈의 뒤로 모주간 나이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약초 정원은 모주간 나이의 말대로 어느 정도 정리는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한 쪽에서는 가노들이 바지런히 일을 하고 있었다. 언뜻언뜻 가노들 사이로 의원들이 보이는 것이 아마도 약초와 잡초를 가노들에서 구분해 주는 듯싶었다.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소곤거리는 모양새로 보아 정원에 예서가 있는 것을 아는 듯했다. 예서 성격상 저런 것들을 귀찮아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을 테지. 도리어 자신이 방해가 될까 저어하여 조심하고 있을 것이다. 차빈을 발견한 가노들과 의원들은 일손을 놓고 예를 갖추자 차빈은 손짓으로 그들을 물렸다. 의원들과 가노들은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정원은 아직 확실히 오랫동안 방치된 그대로였다. 큰 나무조차 없이 약초로만 뒤덮였던 곳이었는데 어느덧 나무들이 제법 군데군데 자라고 있었다. 차빈은 느긋한 걸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예서를 찾았다. 꽤나 넓은 정원이었던지라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예서는 나무 그늘 아래 홀로 앉아있었다. 작은 나무는 워낙 깡마르고 왜소해 햇빛으로부터 예서를 온전하게 보호해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햇빛들이 거침없이 들이쳤고, 연한 나뭇잎이 만들어낸 작은 그늘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예서는 차빈에게 등을 보이고 앉아있었다. 그런데 부모주나 다른 가신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차빈의 미간이 순간 찌푸려졌다. 그 어떤 경우에도 홀로 두지 말라 그렇게 일렀거늘. 차빈은 낮게 혀를 찾다. 예서는 무엇을 보는 것인지 차빈의 기척도 깨닫지 못하고 골똘하게 아래를 보고 있었다. 차빈은 그런 예서를 보며 조용히 다가갔다. 차빈의 입가에는 순수한 미소가 어리었다. 어제 격렬하게 안았던 예서다. 혼례의식 이후 처음으로 이 주 만이었다. 아직도 차빈의 하체에는 묵직한 기운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건 아마 예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크게 차빈의 느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고개를 숙인 예서의 목에는 차빈이 어제 새겨놓았던 흔적이 햇빛을 받아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차빈의 귀에 어제 예서가 흘리던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차빈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차빈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예서 뒤에 섰다. 이제 차빈도 정식으로 이름을 받은 이상 황궁에 얼굴을 내밀어야 했다. 성인식을 치르고 혼례의식을 행한 이상 차빈은 당당한 차빈가의 한 사람이자, 이제 어른인 것이다. 슬슬 본성보다는 본가 쪽에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할 때가 된 것이다. 그게 차빈은 예서에게 조금은 미안했다. 물론 미안해하는 자신을 차빈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성격에는 맞지는 않지만, 늙은 너구리들 속에서 싫든 좋든 자신은 수많은 탈들을 바꿔 쓰면서 살 때가 된 것이다.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잡아먹어야 된다. 그리고 이젠 차빈은 가문보다 더 지키고 싶은 것이 생겼다. 차빈은 예서에게 세상을 주고 싶었다. 자신의 모친이 가졌으나, 누리지 못했던 것을.......?!!! “...........?!!!” 차빈이 거칠게 자신의 손목을 낚아채자, 그제야 마치 예서는 정신이 든 것 마냥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손에 들린 날카롭게 날이 선 작은 단도를 보았다. 예서의 손목에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고, 단도의 날은 햇빛을 받아 서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냐?!!!” “윽.” 시큰거리는 느낌에 예서의 얼굴이 작게 찌푸렸다. 분노로 부들거리는 차빈의 손아귀 힘 때문에 예서의 손은 파랗게 죽었다. 차빈의 검은 눈은 분노로 격렬하게 소용돌이쳤고, 그 눈을 보며 그제야 예서는 뚜렷하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예서는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렸다. 고작 한 뼘 정도의 아름다운 이 칼은 차빈 모친이 가지고 있던 것이다. 자신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이것을 얼마 전 기꺼운 마음으로 차빈은 예서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 칼날에 지금 예서의 붉은 피가 선명하게 묻어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칼을 바라보는 차빈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나는.......” 예서는 두려움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씻어도 씻어도 없어지지 않는 자신의 온몸에서 풍기는 차빈의 체향을 예서는 견딜 수 없었다. 코끝에 남아있는, 방안 가득 공기 중에 섞인 차빈의 강한 체향에 숨이 막혔다.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서 나가고 싶었고, 다른 향기로 자신을 채우고 싶었다. 그리고 나루가 잠간 자리를 비운 사이, 나루가 예서의 방에 두려고 꽃이 예쁘고, 향기가 좋은 약초들을 따러 간 사이, 그건 무의식이었다. 예서는 무의식중이었다. 자신의 행동 뒤에 따라올 일 따위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각조차 없었다. 그저 손목에 짙게 남아있는 차빈의 흔적을 지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결코 죽을 생각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저는 그냥... 이건 아무 뜻도.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주의할 테니까요.” 흔들리는 눈동자로 차빈을 보는 예서의 입술이 바르작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예서의 뇌리에 쿰의 얼굴이 본성 가노들의 얼굴이 순간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빈은 말없이 그런 예서의 손목을 틀어쥐며 더욱 차갑게 노려볼 뿐이었다. 예서의 손목을 잡고 있는 차빈의 손은 아직까지도 분노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칼은 차빈 모친의 유품이었다.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거지? 왜 이런 곳에 혼자 나와 있는 거냐?” 차가운 기운이 서린 차빈의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 저..... 그러니까 나루는 약초를 따러...” “나루...?” “네.” “부모주?” “....네.” “다른 가신들은?” “.................” 차빈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나루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어쨌든 자신의 실수였다. 마나힘을 혼자 모시고 나갔으면서 그를 혼자 두고, 그리고 지키지 못했던 것, 모두 자신의 잘못이다. 약초 정원에서 돌아온 차빈과 예서로 인해 저택은 발칵 뒤집혔다. 분노로 어둡게 가라앉은 차빈으로 인해, 그리고 손목에 피를 흘리는 예서로 인해 본가는 날카로운 긴장 속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차빈은 나루에게 그 어떤 말도 묻지 않았고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루 역시 변명 따윈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을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저택 사람들 또한 매한가지였다. 의원은 가벼운 상처라 수일 내에 아물 거라 했다. 상처가 깊지 않아 흉터도 생기지 않을 것이고, 하루 이틀 물만 조심하면 염증도 없을 거라 말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주간.” “예.” 차빈 옆에 서 있던 모주간 나이는 차빈의 부름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조금 더 깊이 숙였다. 나이의 목소리는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마나힘을 모시는 본성 부모주라 하나 지금은 본가에 있는 자다. 분명 그대의 소관일 터, 그대 또한 책임이 없다 할 수는 없지.” “예.” “마나힘의 일은 본가 모주간인 그대가 직접 나서서 챙겨야 하거늘, 고작 본성의 궁 하나를 지키는 부모주에게 모든 일을 일임하고, 감히 주인을 혼자 모시게 해?!!” “죽을 죄를.” 모주간 나이는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어차피 죄의 유무를 묻는 자리다. “네가 감히 나의 마나힘을 능멸하고 그 몸에서 피를 보게 해?!!” “차빈님.” “그렇게 스스럼없이, 그렇게 허술하게 모시고도 살기를 바라지는 않았겠지.” 가노라면 모를까. 이건 억지에 가까웠다. 차빈이 잔인하기는 했으나 경우를 따지지 않은 적은 없었다. 물론 부족하게 모신 것에 대한 잘못은 인정되나 죽음으로 갚을 만한 사항은 아니었다. 나루는 가노가 아니라 가신인 것이다. 더군다나 나루는 본성 모주간 찬마밀의 아들이다. 찬마밀의 집안이 어떤 마음으로 차빈을 대대로 모시고 있는 지 차빈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던가. 그러기에 이렇듯 쉽게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임에도 그런 나루의 목에 거침없이 차빈은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이건 예서에 대한 본보기였다.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차빈은 이번에는 확실하게 인지시킬 생각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다. 무리수임을 알면서도 차빈은 칼을 쥔 손의 힘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차빈에게는 나루에게 요사이 손톱 밑의 가시마냥 껄끄러운 감정도 있었다. 어지러운 감정은 싹이 자라기전에 잘라내는 것이 최선책이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아무 뜻도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실수라고요. 정말이지 죽는다는 생각 따윈 해본적도 없습니다. 진짜에요!!” “...........” “나루 부모주는 정말 아무 잘못도 없어요. 그냥 제가 사람들이 많은 게 싫어서 다 물린 거니까, 정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요. 잘못은 내가 했는데 그걸 왜 다른 사람한테 그걸 물어요? 책임은 나한테 있단 말입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차빈에게 매달리는 예서를 보는 나루의 표정은 처연했다. “부모주.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봐요. 왜 그렇게 가만히만 있는 거예요?!! 죽는단 말입니다!!!” 아무 말도 없는 나루가 안타까운지 나루를 보며 예서는 울부짖었다. 나루는 그 눈에 흐르는 눈물보다 가슴에 흐를 피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자신의 죽음으로 힘들어 할 예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루는 너무도 아팠다. “이제부터 저 잘할게요. 뭐든지 열심히 할 테니깐, 시키는 건 다할 테니까요. 정말입니다. 다 할게요.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만해요.” 예서는 차빈의 팔을 붙잡고 오열했다. “더 이상 누가 죽는 건 싫어. 그러니까 제발요.” “예서님.” 한 번도 불러 보지 못했던 이름. 그 이름을 나루는 천천히 불러 보았다. 두 번 다시 부르지 못할 이름이다. 그리고 그 순간 차빈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예서님. 죄송합니다. 약속 못 지켜 드릴 것 같습니다. 제대로 보필 못한 죄. 죽음으로 갚겠습니다.” 나루는 차빈에게 매달려 울부짖는 예서를 보며 나지막이 고했다. 그리고 머리를 땅에 조아렸다. 마지막 인사인 것이다. “안으로 모셔라.” 차빈은 이를 갈았다. ‘이것 또한 신의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 나루는 이 모든 걸 신의 뜻으로 돌리렵니다. 이대로 살아간다면 아마도 어쩌면 전 차빈님을 원망했을지도, 마나힘을 욕심내었을지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루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살벌하게 쳐다보는 차빈을 무심한 눈길로 한 번 쳐다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아악!! 안 돼!! 그만 해!! 그만 하란 말이야!!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죽이지만 마! 죽이지 마! 이젠 정말 싫어!!!! 죽이지 마. 흑흑. 이러면 안 돼요. 제발 부탁입니다. 나 때문에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건 이젠 정말 싫다고요!! 뭐든지 할게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정말 뭐든지 다 할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흑흑. 제발. 아악!!!!!” 예서는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사람들을 밀치며 울부짖었다. 아무도 감히 그런 예서의 몸에 손을 대는 자는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예서의 앞을 막아 설 뿐이었다. 그리고 차빈은 예서의 애통하게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칼끝은 천천히 크게 원을 그리다가 정점에 이르러서 강하고 빠르게 내리 꽂혔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를 들으면서 예서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예서가 본 것은 차빈의 칼날을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피였다. 그리고 차가운 차빈의 한 마디였다. “치워라.” 현실도피 하듯, 정신을 놓는 와중에서도 예서는 자신을 안아드는 팔을 인지했고, 그리고 강하게 풍기는 피 냄새를 맡았다. ‘마나힘... 작은 마나힘....... 나의..... 정인....... 이여. 부디..........’ “...........”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리고 거기에 차빈이 있었다. 바위같이 굳건하고 조금의 흔들림이 없는 차빈을 본 순간 예서는 숨이 턱 막혔다. 예서는 고개를 돌려 그런 차빈을 차갑게 외면했다. 저벅저벅 점점 다가오는 차빈의 발소리는 예서의 목을 움켜쥐고 강하게 조여드는 듯해 예서는 눈을 감았다. “...............” “마나힘.” 차빈은 침상에 앉아있는 예서의 턱을 잡고 시선을 돌리려했다. 그러나, 탁!!!! 예서는 그런 차빈의 손을 강하게 내쳤다. “무슨 일이십니까.” 폭풍처럼 거칠게 일렁이는 분노가 예서의 눈에 가득했다. 그러나 차빈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예서의 턱을 으스러뜨릴 듯이 잡아 올렸다. “글쎄, 무슨 일인 것 같은가.” 그리고 예서를 거칠게 던지듯이 밀어 넘어뜨렸다. 그러나 이를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예서는 빠르게 옆으로 몸을 돌려 침상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차빈이 더 빨랐다.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는 예서의 허리를 잡아 던졌다. 그리고는 예서가 입고 있는 사제의 하의(下衣) 속에 거침없이 손을 집어넣어 브리프를 잡아 뽑듯이 끌러 그것으로 예서의 손목을 침상기둥에 단단히 묶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제복의 하의(下衣)는 장원형(長圓形)의 하얀 무명천을 이어 붙인 소매 없는 옷으로 무릎 위가 그 하한선이었다. 예서의 자리옷을 겸하고 있는 옷이었다. “놔.” 예서의 얼굴이 수치심에 벌겋게 달구어졌다. 커다란 청동 침상의 아름다운 네 기둥은 천장에 닿을 듯이 높이 솟아있었고, 그 기둥 중 하나에 묶인 예서는 침상에 사선으로 눕혀졌다. “풀어!!!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아!!! 아악!!! 풀라니까!!” 손목을 비틀며 그나마 자유로운 다리를 들어 다가오는 차빈을 차내려 했으나 차빈은 가잖다는 듯 가볍게 예서를 제압했다. 예서의 다리 사이에 들어가 앉으며, 차빈은 비릿한 냉소를 흘렸고, 일부러 보란 듯이 사제복 하의를 천천히 걷어 올렸다. “사람을 그렇게 죽이고도 너 참 뻔뻔스럽다. 당장 내 눈 앞에서 꺼져버려!! 비켜!!!” “누가 누구를? 나는 부리는 개 한 마리를 치운 것뿐이다.” “뭐?!! 개?!!!” 차빈의 예서의 하체를 드러내며 예서의 유두를 지분거렸다. “아니며 연인이라도 되나? 응?” “으윽!!!” 차빈은 예서의 가슴을 훑어 내리다 강하게 성기를 그러쥐었다. 악의가 농후한 그 행위는 예서에게 고통을 주었다. “나의 마나힘. 그 개는 그대한테 무엇이었지?” “개라고? 개라고?! 나루 부모주가 개면 넌 뭐냐?! 개백정이냐?!! 이 더러운 피 냄새나 치워!!!” 이를 득득 갈며 예서가 잇새로 밀어낸 말은 차빈이 원한 답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서로서는 차빈이 방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코를 찌르는 듯한, 강렬한 피 냄새가 참을 수 없어 욕지기처럼 내뱉은 말이었다. 실제로 나는 냄새는 아니었다. 그건 예서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뇌리에 박힌 냄새라는 것 정도는. “비켜!! 놔!!” 악에 바친 듯, 발광하듯, 몸부림치는 예서를 내려다보는 차빈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갑고 냉랭하게 굳어있었다. 차빈은 예서에게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안을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저 그 얼굴 한 번 보려 한 것뿐이다. 마음이 껄끄러웠으니까. “하.” 차빈에게서 허탈한 듯, 바람 빠지는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곧 차빈의 살기어린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자신은 예서가 아무렇지 않기를 원했다. 상심하지 않은 담담한 얼굴을 보며 나루라는 존재가 예서에게 아무런 영향력 없는 존재임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건 상심이 아니라 마치 연인이라도 빼앗긴 듯 독기를 품고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침상에서 내려온 차빈은 침상 옆 탁자 위로 손을 뻗었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쟁반 하나가 얌전하게 놓여있었다. 이 작은 쟁반에는 두 사람의 밤을 밝히는 도구들이 항시 있었고, 그 중 작은 병의 마개를 입으로 뽑으며 차빈은 예서에게 돌아섰다. 그리고 보란 듯이 그 손바닥에 오일을 벌컥벌컥 쏟아 흠뻑 그 손을 적시는 모습을 예서에게 보였다. 그예 하얗게 질리며 예서는 있는 대로 몸을 틀어 손목을 구속하고 있는 브리프를 끓어내려 했다. “싫어!!!! 윽!!” 침상에 올라오는 차빈을 예서는 힘껏 차내려 했지만 곧 그 발을 차빈에게 잡혔다. 거칠게 예서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자마자 차빈은 예서의 한쪽 다리를 어깨에 걸치더니 애널에 손가락을 거침없이 밀어 넣었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말란 말이야!!!” 손가락은 곧 하나 둘씩 늘어났다. 애널을 풀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라 고통을 주기 위한 행위였다. “그만!!” 극점을 자극할 때마다 에서의 허리가 튕기듯 휘어졌다. 예서는 미친 듯이 머리를 내저으며 울부짖었다. 예서는 끔찍했다. 자극에 반응하고 신음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암컷만 보면 물불을 가지지 않는 발정하는 짐승과 무엇이 다른가. 예서는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그만 둬!!! 제발.... 윽!!!” 무리하게 허공에 뜬 허리의 고통, 애널에서 나는 질척이는 소리와 자신의 깊은 속을 거침없이 드나드는 차빈. 예서는 그 모든 것들이 멈춰지기를 간절히 원했다. “아악!!!!” 차빈은 예고도 없이 자신의 손가락을 험악하게 빼내었고, 예서의 안을 순식간에 자신으로 채웠다. 차빈이 밀고 들어오는 고통에, 행위에 대한 강한 거부감에 예서의 애널은 강하게 조여들었고, 덕분에 차빈은 자신의 성기가 끊어질 듯한, 지독한 고통을 맛봐야만 했다. “윽.” “하악!!!!” “마나힘.” 차빈은 이를 갈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더한 분노가 그를 덮쳤기 때문이다. “그만!!!!” 차빈은 예서의 상징을 강하게 그러쥔 손아귀에 힘을 넣었다. 예서는 온몸을 들썩이며 그 죽을듯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비문(秘門)에서 힘을 빼. 마나힘 풀어라.” 고통으로 시뻘겋게 핏대를 세운 예서를 내려다보며 차빈은 한층 조용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차가운 분노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 마음에 자신을 들여놓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타는 듯한, 이 모진 목마름을 왜 예서는 채워주지 않는 것일까. 이 허기짐을 왜 모른 척 하는 것인가. “좋아...... 그렇게.......... 하아....” 깨문 입술이 터져 피가 나도록 예서는 안간힘을 쓰며 애널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차빈의 손아귀의 힘이 점점 작아졌다. 차빈은 예서의 상징을 손바닥으로 쓸며 허리를 움직였다. 그러나 곧 강하게 밀어붙였고, 예서의 입에서는 충격으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윽.” 그 순간 애널은 수축하며 차빈의 성기를 강하게 조였다. 그러나 그건 아까의 지옥 같은 조임은 아니었다. 차빈을 깊이 빨아드리며 조이는 그 느낌은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한 맛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강하다. “좋아. 지금.” 차빈은 예서의 성기를 움켜쥐며 손에 힘을 넣었고, 그 순간 차빈을 조이던 힘이 풀어지고 차빈의 성기를 부드럽게 감쌌다. 차빈은 허리를 흔들어 귀두 끝까지 뒤로 빼내었다. “좋았어.” 그 후, 차빈은 예서의 애널에 강하게 박아 넣기를 연이어 했다. 마치 예서의 상징이 배의 키라도 되는 듯, 손아귀에서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며 예서를 이끌었다. 그리고 예서는 온몸으로 애널을 풀었다 조이기를 반복하며 허리를 움직여야만했다. “안 돼! 으윽!!” 그리고 자극은 예서에게도 있었다. 그 와중에 차빈이 극점을 쳐올리자, 예서의 상징이 차빈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서는 침통한 비명을 내질렀다. 이를 사리물고 참으려 해도 불가능했다. “마나힘!!” 그리고 그예 차빈은 이를 갈았다. 이다지도 철저하게 차빈 자신을 거부하는 예서에 대한 갈증에 미칠 것 같았다. 죽일까. 이대로 통째로 삼켜버리면, 내 속에 그렇게 들어놓으면, 그 땐 온전한 내 것이 되는 건가. “그대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차빈은 그 상태 그대로 예서에게서 거칠게 자신을 빼내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타는 듯한, 극한 목마름에 예서는 몸부림쳤다. 온몸을 지배한 쾌락은 해갈을 원하고 있으나 그 어디에도 물은 없었다. 바짝 세워진 성기는 토해내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러나 차빈은 그런 예서의 성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일만 했다. 일부러 인 듯 예서의 극점을 피하다가도 예서가 조금 시들해지면 강하게 쳐올려 예서를 못살게 굴었다. 누군가 툭 한 번 쳐주면 끝을 낼 것 같은 그 감질 나는 행위로 인해 예서의 마음은 좀먹어 들어갔다. 원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안을 채우고 있는 자의 단 한 번의 손길을 예서는 간절히 원했다. 작았던 그 마음은 점점 커져 이제 예서를 집어삼켰다. 온몸을 내달리는 성욕은 이미 진창의 돼지같이 본능만을 요구하고 있었다. “으윽..... 제발.” 예서는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손을 풀려 몸부림쳤다. 자신의 손으로라도 쥐고 흔들어서 해방시켜주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와줘.” “........” “도와줘..... 요....... 제발........... 하아...” “원하나?” “흑.” “말해봐. 마나힘. 누굴 원하지?” “흑흑.” 예서는 가슴으로 흐느꼈다. “나를 원하나?” “...........” 대답대신 자신의 입술위에서 웅얼거리듯 입을 여는 차빈의 입술을 예서는 살짝 핥았다. “원해?” “..........하아......” “누굴?” “다... 당신..... 차빈.......” “하악!” 그 순간 차빈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예서의 성기를 그 커다란 손으로 감싸며 거칠게 위아래로 움직였고, 예서 안의 자신은 예서의 극점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예서 또한 차빈이 그렇듯 움직이자 머리가 하얗게 비며 현실을 잊어갔다. 그런 두 사람 주위에 호리병 하나가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으윽!” 차빈이 깊게 박아 넣는 순간, 예서는 애널을 강하게 조이며 차빈의 손안에 자신을 토해냈고, 동시에 차빈 또한 예서의 안에 쿨룩 쏟아냈다. “하아, 하아.” 예서의 멍한 눈에서는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에 대한 지독한 자괴감과 혐오감에 예서는 혀라도 깨물고 싶었다. 자신은 짐승이다. 자신을 끔찍이도 아끼던, 예서 자신의 마음 한 자락의 위로였던 나루가 죽어 넘어갔는데, 차빈과 이렇듯 몸을 섞고 그 아래에서 헐떡이는 자신은 이미 사람이 아니다. 나루의 피 냄새를 맡으며 허리를 흔든 자신을 예서는 죽이고만 싶었다. “흑.” 예서가 격하게 흐느끼자 차빈은 그 눈물을 핥았다. 그리고 예서를 결박하고 있던 브리프를 끓어내며 파랗게 죽어있는 예서의 손목에 입을 맞췄다. “그 눈물은 누구의 것이냐?” 끊임없이 가져도 목마름은 해갈되지 않았다. 그 몸에 깊이 묻으면 묻을수록 왜 더욱 멀리 떨어지는 느낌일까. 차빈은 태어나 처음으로 좌절감에 치가 떨렸다. 안 주면 빼앗아온다. “그래, 밤은 길지.” 차빈은 예서의 입술을 집어삼키듯이 덮치며 몸을 일으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새 시달린 예서의 몸은 물먹은 솜 마냥 땅속 깊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지친 몸을 뉘일 생각도 못하는 예서의 애널에서는 밤새 차빈이 토해놓은 액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예서의 온몸에는 차빈의 포악한 흔적으로 가득했다. “마나힘?” 정사의 흔적으로 가득한 천으로 대강 국부만을 가린 예서에게는 나른하고 퇴폐적인 냄새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후치는 그런 예서를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사내라면 당연한 반응이다. 눈을 어디다 둬야할지 몰라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후치는 예서의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섰다. 예서에게서 순간 훅하니 짙은 정액의 냄새가 맡아졌다. 그게 이상하게도 예서의 체향과 섞여 묘한 사향 냄새 같아 후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마나힘. 후치라 하옵니다. 저,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사오니, 괜찮으시겠습니까?” “........” “마나힘?” 마주친 시선 속에서 후치는 이 방에 들어선 직후 받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의미로 다시 한 번 더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예서의 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나힘?! 괜찮으십니까?!!” “아...” 후치의 부름에 예서는 얼핏 정신이 든 것 같았다. “누구.......?” 갈라진 입술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그 메마른 입술에서 새어나온 소리는 사막처럼 버석하니 물기 하나 없는 목소리였다. “의원 후치라 하옵니다. 괜찮으십니까? 목욕물을 받아 놓았는데, 가능하시겠습니까?” “후치?” 멍한 모습에 멍한 대답이다. “예.” “나는..... 나는 지금 일어나기가.... 힘들 것 같아서, 그냥 저... 닦을 것 좀.... 고마울 것.... 같아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느리게 이어지는 말은 혼미한 정신을 대변하듯 어눌했다. “마나힘?” “닦을 것 좀.... 그거면 되니까.......” 예서는 지금 절대 혼자서 움직이는 건 무리였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예서는 지금 그 누구도 자신의 몸에 손을 대거나, 옆에 두고 싶지 않았다. 흐릿한 정신 속에서 예서는 그것만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혼자 있고 싶으니까........ 아무도 없게.....” 후치는 예서를 일단 눕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자신이 한 발 앞으로 나서자, 예서의 눈이 형형하게 빛나며 화들짝 자지러졌다. 마치 주인에게 잔인하게 버림받고 상처 입은 짐승처럼 날이 서 있었다. 후치는 놀라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기....... 미안....” 그 흐릿하고 둔탁한 신경에도 후치가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려던 것이 아니라 그저 도와주려는 순수한 의도였다는 것을 느꼈는지 예서는 자신의 반응에 미안해했다. 그러나 그게 후치로서는 더한 충격이었다. 어눌한 목소리에 멍히 혼란스러운 눈으로 미안하다고 하는 그 모습이 의원 후치의 가슴을 털컥 내려앉게 했다. 증후가 수상쩍었다. “조금 뜨거우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후치는 아무 내색하지 않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잠시 침상위에 놓아둔 방안에 들어설 때부터 들고 들어온 의료용 나무 쟁반을 향해 느리게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는 약초를 다린 물속에 자작자작 담겨둔 천을 꺼내어 짜며 여상한 일상의 대화를 나누듯이 예서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도 이것으로 뒤를 닦으시면 좀 편해지실 겁니다. 제가 해드려야 하는데 그건 싫으시지요?” 결이 고운 하얀 무명천은 약초물이 들어서인지 연한 녹색을 띄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내미는 예서에게 후치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눈이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듯해서이다. 천을 받아들곤 잠시 망설이던 예서는 손을 뒤로 하고 닦으려했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허리를 살짝 움직이려는데 통증이 급격하게 몰려왔다. “윽!!” “괜찮으십니까?!!” “아윽!!” 예서는 고통을 죽이느라 시트를 틀어쥐고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저, 괜찮으시다면 저를 붙잡고 하시면 어떠하신지요?” “...............” 물끄러미 후치를 쳐다보다 예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지못해 후치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들부들 흠칫거리며 다가오는 예서의 손을 후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윽.” 예서는 후치의 팔을 잡고 조심스레 자신의 애널을 닦아내었다. 미끈거리는 그 느낌, 흘러내리는 그 느낌이 끔찍했지만, 아픈 신음소리를 참으려 예서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아직 예서는 그 모든 감정을 다스리기에는 너무 어렸다. “흑.” 마치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이, 울음을 흘리며 닦는 손길은 점점 거칠어져만 갔다. 예서가 애널에서 닦아낸 정액은 핏기를 머금어 붉은 빛이 돌았다. 그리고 그 천을 눈으로 확인한 예서는 충격이라도 받은 듯 그것을 두 손에 꼭 쥐고 아무 미동도 없었다. “마나힘?” “시... 싫어...... 싫어........ 아악!!!!!!” “마나힘?!!!” 그리고 잠시 후 벌떡 일어나 예서는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집어던졌다. 자신의 감싸고 있던 천하며 베개며 침상에 있던 것들부터 침상 옆에 있는 탁자를 뒤집어엎다 이를 말리는 후치까지 후려치기 시작했다. “아악!!!! 놔!!!” 밖에 있던 가신들이 황급히 방문을 벌컥 열었다. 그들 손에서 집에서 뽑힌 장검이 들려있었다. 그러나 방안 풍경에 망연자실하며 아무도 예서에게 그리고 아후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일. 듣도 보도 못한 일에 그들은 적이 당황하며 잠시 주춤거렸다. 그 사이에도 여전히 예서는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었다. “무슨 일이냐?!!” 개중 우두머리인가. 급하게 앞으로 나서는 가신에게 아후는 예서를 강하게 끌어안고 외쳤다. “다들 나가주십시오!!” “뭐?” “어서요!!” 단호하고 서릿발 같은 말투와 희번덕거리는 후치의 눈에도 가신들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망설이는 듯 보였다. “의원으로서 명령입니다. 다들 사라져!!! 당장!!! 아무도 들이지 마!! 그게 누구라도 죽여 버릴 테니까!!!!” 그제야 후다닥 모든 사람들이 사라졌다. “마나힘!!!” “놔!!!! 이거 놔!!!!” “마나힘 정신 차리십시오!!!!” “놓으란 말이야!!!” “젠장. 민예서!!!!!!” “싫어!!!” “민예서!!!!” “놔!!!!” 퍽!!!!! “으악!!!! 아이구! 젠장, 이거 아프잖아.” 예서가 자신을 붙드는 후치를 떨어뜨리려 휘두른 주먹에 후치가 정통으로 코를 맞았다. 코를 부여잡고 주저앉아 눈물을 찔끔거리며 후치는 투덜거렸다. 제 정신이 아니어서 그런가. 상당한 힘이었다. “예서!!!!” 그러나 지금은 주저앉아 코나 만질 때가 아니다. 후치는 벌떡 일어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예서의 허리를 뒤에서 매달렸다. “아악!!!! “민예서!!!! 정신 차려!!!!” “아악!!!!!!!” “예서!!!” “놔!!!” “민예서!!!!!!!!” “...............?!!!!” “하아, 민예서.” “하아, 하아. ...............뭐?” “예서야.” “............” 그리고 시작이 ‘갑자기’였던 거처럼 모든 것이 순식간에 멈췄다. 후치는 천천히 예서를 놓아주었다. 예서는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저 멍한 시선으로 후치를 보다 몸을 돌렸다. “하아. 하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눈앞에 남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예서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다. 그런데 기억이 없다. 뭐지? “괜찮으십니까?” “...........죽고 싶어.” 예서는 침상에 털썩 주저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숨을 골랐다.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나 죽어도 돼요?” “마나힘.........?!!!” 후치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휘둥그레졌다. 예서의 입에서 나온 말도 말이지만,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예서의 손목에는 묶인 흔적이 역력했다. 몸에도 정사 외에 다른 흔적들이 있었다. 강제가 분명한 그 흔적들을 보는 아후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단순히 거칠게 안은 것이 아니라 강제였던 거다. 무엇 때문에? ‘강간?!!! 누가?!!! 설마, 차빈님?!! 말도 안 돼!! 왜?!!’ 아후의 어지러운 머리는 쉬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특이한 경우가 아니면, 참상에서 반려를 거부하는 행위는 제국 이루에서는 없다. 그리고 강제로 안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 모든 상황은 있을 수 없는 거다. “........미안하지만, 혼자 있고 싶어요.” “마나힘?” “미안합니다. 소란스럽게 해서, 가슴이 답답했는데, 정신을 잃었나 봐요. 마치고 싶다고는 생각했지만, 미칠 것 같다고는 생각했는데..... 하하하. 아무래도 추해서 안 되겠다.” “마나힘.” “괜찮으니까....” “그럼, 저기 필요하시면 부르세요.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네.”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후치는 물러났다. 예서만 남겨진 방안에는 이제 쥐 죽은 듯 고요만이 있었다. 커다란 청동거울 앞에서 예서는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부끄러운 나신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텅 빈 눈동자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만 볼뿐이었다. 이른 새벽 가노들의 목욕 시중조차 거절하지 않았던 예서였다. 그런 예서의 온몸에는 나흘전의 흔적이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날 밤, 미친 듯이 울부짖고 거부하는 예서를 차빈은 안았다. 그리고 예서 또한 차빈을 품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소박하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본가 모주간 나이는 두 손을 앞으로 공손하게 모으고 평온한 일상의 아침을 대하듯이 예서를 대했다. 가노들은 그런 예서와 모주간 나이 주변을 인기척을 죽이면서 바삐 움직였다. 나이가 지긋한 가노 중 하나가 어린 가노를 앞세우고 예서의 뒤에 섰다. 청동거울을 통해 가노는 예서에게 예를 갖추었다. 어린 가노 손에 들린 것을 받아 노인은 예서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예서의 무릎 사이에 T형의 브리프를 끼웠다. 겨우 국부만을 가리게 되어 있는 브리프였다. 그는 예서의 페니스에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면서 예서의 음모를 갈무리했다. 뒤는 가는 끈 하나로 된 브리프였기에 노인은 예서의 둔부를 살짝 벌리고 그 사이에 끈을 끼워 넣었다. 애널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아직 부어있었다. 마지막으로 밑으로 늘어져 있는 끈들을 서로 묶어 브리프를 골반위로 고정하고 노인은 허리를 숙이고 몸을 물렸다. 예전이었다면, 아니 며칠 전이었다면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다. “차빈님께서는 성인식을 치른 차빈가의 당당한 후계자이시면서 또한 현 황제 폐하의 외종질 되시기도 하시지요. 그런 차빈님께서 혼례의식을 치르셨으니, 폐하께서 그분의 마나힘을 궁금해 하시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요. 사석이라 생각하셔도 무방하실 듯합니다. 그러니 마나힘께서는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되십니다.” “................” 다른 가노 둘이 이번에는 투명하게 비치는 천을 손에 들고 예서의 뒤에 섰다. 이번에도 그들은 청동거울을 통해 예서에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예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가노들은 무릎을 꿇고 예서의 허리에 천을 둘렸다. 어깨에 숄을 걸치듯이 살짝 골반에 걸쳐진 천은 고작 브리프 위에 살짝 얹어질 뿐이었다. 가노들은 그 위에 띠를 둘렀고, 백금의 굵고 화려한 띠는 예서의 골반에 천을 고정시켜 주었다. 그리고 적나라한 브리프와 둔부를 가노들이 작은 가리개로 가렸다. 짧은 두 면이 V자 모양으로 파진 장방형(長方形:직사각형)의 가리개는 앞을, 다른 장방형의 가리개는 둔부를 가렸다. 두 마디의 뱀이 한데 어우러진 모양으로 섬세하게 수놓아진 눈부시도록 하얀 장방형의 가리개는 고작 장정의 커다란 손바닥 하나하고 반 정도의 크기였고, 가리개의 밑단 끝은 은색 술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역시 백금이 어울리시는군요.” “........모주간.” 그 때였다. 그 동안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예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예. 마나힘.” 모주간 나이는 고개를 숙이며 예서의 부름에 답을 했다. “나루 ...부모주는요?” “본성으로 가고 있습니다. 내일쯤이면 아마도 가족들 품에 있겠지요.” “.............” 처음으로 예서가 얼굴에 감정을 드러냈다. 일그러진 그 얼굴은 고통과 슬픔을 여과 없이 드러내 놓았다. 모주간 나이는 그런 예서를 보며 차라리 안도했다. 감정은 풀어 놓아야 한다. “지금은 힘이 드시겠지만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이 나이가 약속드리겠습니다. 부모주는 자신의 길을 간 겁니다. 그러니 눈물을 거두시지요. 차빈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겁니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그 짧은 와중에도 가노들은 바삐 예서를 꾸몄다. 예서의 가슴과 어깨에 둘린 폭이 반 뼘 정도 되는 하얀 비단은 워낙 결이 곱고 얇아선지 여러 번 둘렀음에도 투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 가노의 손에 들린 것은 국부를 가린 가리개와는 달리 정방형(正方形:정사각형)이었다. 크기도 조금 더 컸다. 그러나 같은 재질이었다. 천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죽도 아니었다. 뻣뻣하지도 그렇다고 야들하니 부드럽지도 않았다. 가넷, 남옥, 수정, 금강석, 취옥, 루비, 감람석, 오팔, 묘안석, 터키석, 비취, 토파즈. 그 열두 개의 보석이 한 면에 각각 세 개씩 정방형(正方形) 천의 가장자리를 장식하며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 역시 은실로 수놓아진 두 마디의 뱀이 있었다. 두 개의 아름다운 정방형(正方形) 천은 예서의 가슴과 등을 장식했다. “하지 않겠습니다.” “..............” ‘죽고 싶다. 수치스럽다. 끔찍하다.’ 예서는 튀어 나오려는 생각들을 삼켰다. 굳이 나이에게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리고 예서 자신의 심정을 모주간 나이가 설마하니 모르겠는가. 예서는 자신이 마치 몸뚱이 하나로 먹고 사는 천한 창부가 된 것 같았다. 있는 것들에게 다리 하나 벌리고 빌어먹고 사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어 그리 산다는 늙은 창부. 그래서 먹는 것조차 예서는 끔찍했다. 그 또한 차빈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던가. 예서는 할 수만 있다면 차빈의 흔적이 새겨진 피부를, 머릿속에 박힌 차빈의 모든 것들을, 도려내서라도 차빈의 흔적을 지우고 싶다. “차빈님께서 특별히 오늘을 위해 고르신 겁니다. 열두 개의 보석은 신이 주관하는 세상 만물들을 상징하며, 차빈가를 상징합니다. 차빈가의 주인과 그의 마나힘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의 상징입니다.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지요. 세상에 대한 차빈님의 약속이자, 다짐이라 생각하시고 아무 말씀 말아 주십시오.” “...............” 나이의 차분한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더 이상 대꾸할 말을 잃고 가만히 서 있는 예서를 보며 모주간 나이는 가노들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가노들이 예서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세공이 섬세한 백금의 굵은 줄에는 스물네 개의 술이 달려있었다. 그 술 끝에는 열두 개의 보석과 열 두 개의 아름다운 방울이 있었는데, 술의 길이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그것을 가노들은 예서의 오른쪽 팔뚝, 그리고 오른쪽 허벅지에 각각 치장했다. “차빈님 이십니다.” 문 밖의 기척에 다들 예서의 주위에서 한발자국씩 물러섰다. 곧 문이 열리고 차빈이 들어섰다. 그런데 차빈의 옷차림은 예서와 많이 달랐다. 예서처럼 화려하지도 않았다. 예서처럼 투명한 천도 아니었다. 물론 허리를 가리는 짧은 차림은 같았다. 그러나 예서처럼 호화로운 수가 새겨져 있지도 않았고, 예서처럼 아슬아슬하게 가려져 있지도 않았다. 무장군인처럼 오른 쪽 어깨와 팔꿈치 그리고 양쪽 무릎의 보호대와 금속성의 두꺼운 허리띠가 단단한 차빈의 허리를 장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직 하나, 예서처럼 가슴과 등에 정방형(正方形)의 가리개가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그저 이어 붙인 열 두 조각의 금속 위에 보석을 박아 넣은 것이었을 뿐, 그 어떤 장식도 없었다. “..............” 모주간의 눈짓으로 모든 가노들과 가신들은 인기척도 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이제 방안에는 오직 예서와 차빈 단 둘뿐이다. 차빈은 가만히 서서 청동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는 예서에게로 천천히 다가섰다. 차빈의 부드러운 표정은 만족스러운 그의 마음을 잘 대변해주고 있었다. 차빈은 예서의 어깨 위에 있는 자신이 남긴 흔적을 어루만지다 그 곳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예서는 무감각하게 있을 뿐이었다. “좋군.” 차빈은 부드럽게 예서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예서는 주먹을 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차빈의 시선을 느꼈으나, 그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예서나 차빈, 두 사람 모두 무릎을 꿇고 몸을 세웠다. 단지 예서는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차빈은 올곧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자세였다. 홀에는 황제와 차빈, 그리고 예서 뿐이었다. 지금 세 사람이 마주 대하고 있는 홀은 정무를 보는 홀은 아니다. 사적인 일을 볼 때 황제가 종종 사용하는 곳이었다. “왜 이제야 문안 인사를 하는고. 고얀 놈 같으니라고.” “황공하옵니다. 폐하.” 차빈은 웃으면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 얼굴 보여주기가 아까웠더냐?”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그리 마나힘의 품이 좋더냐?” “.............” 차빈은 황제에게 다시금 짧게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웃었다. 그런 차빈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은 한없이 자애로웠다. “예서라 하였느냐?” “예. 폐하.” “허허허. 그런데 우리 마나힘은 말수가 없구나.” “낯가림이 심하더이다. 그래서 밑에 있는 가신들의 애를 종종 먹이지요.” 차빈은 차분하게 황제의 말에 응대했다. “예서라, 특이한 이름이로구나. 그래, 뜻은 무엇인고?” “슬기로운 책이라는 뜻이옵니다.” 예서는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나지막이 고했다. “그래? 슬기로운 책이라. .......책이라.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이름은 아니로구나. 좋구나. 예서야. 그리 불러도 되겠느냐?” “예. 폐하.” “고개 좀 들어 보거라.” 황제는 부드러운 미소가 인이 박힌 듯한, 그런 인상이었다. 입가나 눈가에 깊게 주름이 팬 얼굴은 편안해 보이기도 하련만 예서는 황제의 모습 속에서 냉혹한 차빈의 모습을 보았다. 예서는 곧 고개를 숙였다. “예서야.” “예.” “차빈은 너 하나니라.” “...............” “무슨 뜻인지 알겠는고?” “...............” “네 손에 차빈이 있다는 것이니라. 그 모든 것이 너 혼자의 것이라는 뜻이니라. 알아듣겠느냐?” 예서는 고개를 들었다. 항상 웃음기가 걷히지 않을 것 같은 황제의 얼굴에 웃음이 없었다. 엄한 눈에 서늘한 기운의 황제는 차빈 개인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예서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내 아들이니라.” 그리고 이는 차빈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네 이름처럼만 살 거라. 알겠느냐? 그럼 차빈이 네 손에 천하를 쥐어줄 것이다.” 황제가 차빈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차빈 또한 그런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내궁에는 역시 황실 여인들의 은밀한 삶이 있어서인지 사람들의 기척이 많지 않았다. 황제를 알현하고 나온 후, 차빈은 말없이 예서에게 내궁을 보여주었다. 후원을 한 쪽에 둔 복도를 걷는 예서 또한 별 말이 없었다. 후원은 온갖 꽃과 나무들로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러다 문득 예서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우뚝 멈춰 섰다. 후원을 내려다보는 예서의 눈에는 그 어떤 감흥도 없이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차빈은 그런 예서를 천천히 훑었다. 굴곡 있고 나긋한 여인의 몸은 정녕 아니다. 그래도 매끈하게 쭉 뻗은 몸은 팽팽한 탄력과 부드러움이 공존한다. 곧은 쇄골과 적당하게 벌어진 어깨하며 분명 사내의 몸이건만, 물론 무인의 몸인 차빈과는 천양지차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 몸은 쉴 새 없이 차빈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아래로 내리던 차빈의 시선은 예서의 중심에서 멈추었다. 차빈은 예서의 중심을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뜨거워졌다. 예서의 뜨거움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혼례의식 후 항상 차빈의 시선은 예서의 중심에 머물곤 했다. 머릿속에 온통 예서를 발가벗기는 생각뿐이라, 어쩔 때는 차빈 자신조차도 자신에게 아연할 때도 있었다. 차빈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예서가 보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차빈의 시선은 곧 예서로 향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흔적을 따라서였다. 차빈의 손이 그 뒤를 따랐다. 숨이 거칠어지는 차빈에 비해 예서의 얼굴은 창백해져 갔다. “후원 안으로 아니 들어가겠나?” “.................” 자신의 귀에 나직이 속삭이는 그 유혹의 말에 예서는 삐거덕거리듯 천천히 차빈을 돌아보았고, 차빈은 한 손을 들어 그런 예서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바람이 두 사람 주위를 간지럽게 맴돌았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작은 마나힘.” 아후였다. 차빈의 손에 이끌려 후원으로 향하던 중, 예서는 뜻밖의 장소에서 그와 맞닥뜨렸다. 크게 떠진 예서의 눈에 비해 아후의 미소는 여유로웠다. “누구냐?” “차빈님. 혼례의식을 경하 드리옵니다. 네르간 상단의 상주 사마힌의 둘째 아후, 차빈님과 마나힘께 인사드리옵니다.” “네르간?” 차빈이 한 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차갑게 내뱉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후는 깊이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예를 갖추었다. “예. 차빈님.” “한낱 상인인 그대가 어찌 마나힘을 알며, 상주도 아닌 자가 내궁 깊숙이 들어온 연유는?” “마나힘은 예전 맥이 장에서 한 번 뵌 적이 있사옵고, 그리고 오늘은 오 황자께서 특별히 주문하신 것을 아버님 대신으로 가져다 드리고 돌아가는 길이옵니다.” “오 황자?” 차빈의 이마가 마땅치 않다는 듯이 살짝 찌푸려졌다. 사치가 심하고 심성이 탁한 오(五)황자는 황제의 세 번째 반려 소생이다. 그리고 황제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차빈은 아후를 맞갖지 않다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표정은 곧 차빈의 무표정 속으로 사라졌다. 누워있는 예서의 다리에 차빈이 손을 대자, 멈칫 하는 것도 잠시, 예서는 순순히 다리를 벌렸다. 차빈은 그런 예서를 보며 소리 없이 짧게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차빈을 보는 예서의 입술은 미세하게 떨렸다. 예서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사리물었다. 어차피 버리기로 한 삶이다. 그래도 예서 자신의 몸을 희롱하는 차빈의 손길을 나신으로 누워서 받아야 하는 수치감은 생생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의문으로 한 쪽 눈썹을 올리며 자신을 보는 차빈의 시선을 예서는 피했다. “그렇단 말이지.” 차빈은 피식 웃으며, 예서의 한쪽 다리를 접어 예서의 가슴 쪽으로 밀었다. 무리한 그 자세로 인해 예서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러나 그런 예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빈은 드러난 예서의 비문을 쳐다보았다. “윽.” 차빈은 혀를 세워 비문을 건드렸다. 그예 예서의 비문이 움찔거리며 차빈에게 반응을 했다. 차빈이 그런 예서의 비문을 이번에는 혓바닥으로 핥자 예서에게서 억눌린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차빈은 비문에서 예서의 중심으로 예서가 허리를 들썩거릴 때까지 집요하게 애무했다. “그만...!!” 이는 예서가 침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행위다. 애널로부터 퍼져나가는, 그 기묘한 감각은 예서 자신에겐 너무도 낯설었기 때문이다. 마치 남자를 원하는 몸이라도 된 양 벌름거리는 애널이 예서는 싫었다. 그러기에 차빈이 더 집착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차빈은 예서의 눈에 생리적으로 맺힌 눈물을 혀로 닦아주었다. 그리고 예서의 입술을 빨았다. 예서의 입안을 탐하면서 차빈은 예서의 비문에 손가락을 하나 밀어 넣었다. 나흘전의 거친 관계로 인해 예서는 차빈의 손가락 하나도 버거운지 헛숨을 삼키며 힘들어했다. 그러나 차빈을 밀어 내지는 않았다. 그저 시트만을 틀어쥘 뿐이었다. “아흑.” 힘들어하는 예서를 보면서도 차빈은 두 번째 손가락을 거침없이 집어넣었다. 손가락을 감싸며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는, 그 야들한 부드러움은 차빈의 욕망을 부채질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속과는 달리 허리를 들썩거리며 거부의 몸짓을 보이는 예서의 배를 차빈은 천천히 쓰다듬었다. 질척이며 드나드는 손가락의 느낌에 예서는 눈을 감았다. 곧 차빈은 손가락을 빼냈다. 그리고 예서는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며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 “악!!” 빠르게 밀려드는 차빈으로 인해 고통으로 진저리를 치면서도 차빈을 밀어내지 않기 위해 예서는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예서의 다리는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켰고, 흐느낌은 이를 악물어도 예서의 입에서 삐져나왔다. 급박하게 몸을 열고 들어오는 차빈으로 인해 경직되어 있는 예서의 턱을 차빈은 강하게 빨았다. 차빈의 혀는 고통으로 악문 예서의 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예서의 혀를 휘감았다. 이제 벌어진 예서의 입에서는 울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예서.....” “하아... 하아.......” “나의 마나힘.” “으윽.” “안아다오.” 예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자신을 빨아들이는 예서의 안을 빠르게 드나들면서 차빈은 예서를 불렀다. “안아다오.” 그리고 예서는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차빈의 땀에 젖은 어깨를 안았다. “안아다오.” 예서는 한 손으로는 차빈의 어깨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차빈의 머리카락 속에 손을 넣어 차빈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제야 차빈은 만족한 것인지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예서의 안에 자신을 털어 내었다. 예서의 몸 위에서 차빈은 만족한 숨소리를 내쉬며, 예서의 목에 입을 맞추었다. 붉은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마른 몸에는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털이 듬성듬성 있었다. 그것도 꼬리에는 아예 없었다. 그래도 뭐가 그리도 좋은지 연신 꼬리를 흔들었다. 하얗게 탈색된 작은 들창코를 끊임없이 벌름거리며 혀를 빼물고 있는 작은 얼굴의 강아지는 어린 사내아이 주위를 맴돌며 뛰어다녔고, 단춧구멍 만한 까만 눈은 주인에 대한 신뢰로 반짝거렸다. 손가락 마디마디 까맣게 묵은 때가 낀 아이는 깨진 주발에 머리를 박고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 연신 작은 고기조각을 골라내어 그런 강아지에게 즐거이 먹였다. 많아야 고작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낡을 대로 낡은 천 조각으로 겨우 국부를 가린 아이의 머리는 언제 빗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엉클어져 있었다. 강아지에게 더 이상 골라 줄 것이 없었던지 아이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강아지의 머리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제야 아이는 깨진 주발의 남은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었다. 남아 있는 음식이라고는 고작 아이의 주먹만큼 뿐이었다. 멀건 국물 속에 몇 개의 푸성귀들이 떠 다녔다. 아이도 강아지도 뼈가 앙상했다. 그러나 따사로운 햇살이 그런 두 생명을 부드럽게 보듬고 있었다. “여기도 많이 바뀌었구나.” 중후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결코 비범하지 않은 음색이다. 그 의외의 목소리에 예서는 파피루스에서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햇빛을 등진 기골이 장대한 남자를 예서가 눈을 깜박이며 실눈으로 쳐다보자, 나지막이 웃으면 남자는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 기척도 없었다. 아니다. 예서가 무방비하게 있어서 기척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예서는 의아했다. 남자가 예서에게 말을 걸기 전까지 예서 옆에 항상 있는 힌두아와 마힌 그리고 여타 가신들에게서 아무런 기척도 아무런 귀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서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힌두아와 마힌이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고 있었고, 항시 무릎을 꿇고 있는 가노들은 아예 땅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예서는 그 심상치 않는 분위기에 벌떡 일어나 찬찬히 남자를 다시 보았다. 인자한 인상에 온화한 미소가 한없이 자애로웠다. 웃음이 눈가와 입가의 굵은 주름에 깊게 자리 잡고 있어서인지 더욱 그리 보였다.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의 건장한 남자는, 그래, 남자라는 말이 맞을 거다. 남자는 나이가 꽤 있어 보임에도 탄탄한 긴장감과 사내의 강인한 체취가 있었다. 예서는 처음 보는 남자를 어찌 대할까 잠시 고민했다. 당당하게 예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 이는 분명 예사 사람이 아니다. 누굴까. “차빈이니라.” “아....?!” 그는 지그시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에는 그 말의 의미를 예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차빈이라니? 그러나 곧 그 이름이 상징하는 뜻을 깨닫자, 예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는...” “허허허. 마나힘이지. 나는 차빈의 아비니라. 그리고 이젠 네 아비도 되겠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호쾌하게 웃는, 자신을 가리켜 차빈의 부친이라 말한 사람은 희한하리만큼 조금도 차빈과 닮은 데가 없었다. 부친은 오랜 세월 깎여지고 다듬어진 바닷가의 돌을 연상시켰다. 기골이 장대한 것만 빼면 그다지 내세울 것이 없어 보이는, 차빈이 눈에 띄게 화려하다면 이쪽은 극히 평범했다. 차빈이 강인하고 날렵한 흑표범 같다면, 이쪽은 초원을 어슬렁거리는 사자 같다고나 할까. 단지 그 인상으로도 사람들을 한 번쯤 뒤돌아보게 만드는 것은 기골도 기골이었지만, 그 속에 서린 평범치 않은 기운 때문이리라. “여긴 전대 마나힘을 위한 곳이었지. 이젠 너를 위한 곳이 되었구나. 나이가 신경을 많이 썼구나.” 감회가 새롭다는 듯, 그는 주위를 느긋한 시선으로 둘러보았다. 그리고 곧 예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 이름이 예서라고?” “네.” 예서는 차분하게 답을 했고, 그런 예서를 보는 부친의 눈은 한없이 넓었다. 그 뒤 그를 따라 예서는 천천히 약초 정원을 산책했다. 부친은 이리저리 정원을 둘러보며 약초들을 어루만지기도 하며 느릿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옆을 예서는 묵묵히 지켰다. 말없는 산책길에 간혹 부친은 예서를 보며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게 뭔 줄 아느냐?” 부친은 평범한 장정 키 만한 나무를 가리켰다. 독특하면서 익숙한 향기와 연한 청색의 꽃이 이채로운 나무였다. 예서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가는 나뭇가지를 꺾어 예서에게 보여주며 부친은 싱긋 웃었다. 광택이 있는 짙은 녹색의 잎사귀의 뒷면은 의외로 하얗고, 솜털과 함께 유점(油點)이 있었다. “미질향이니라.” 그리고 이번에는 뭉쳐서 핀 꽃을 한 움큼 뜯어 예서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 순간 독특한 향내가 예서의 코를 찔렀다. 그러나 마구잡이로 뜯긴 꽃잎은 바람의 장난으로 풀풀 날리며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곧 부친은 허겁지겁 꽃이 풍성한 커다란 가지를 뚝 꺾어 예서에게 덥석 안겨주며 헛기침을 했다. “흠흠, 잎은 육류 요리에 향을 내는데 쓰기도 하고, 차로 이용하기도 한단다. 또 꽃은 설탕 절임으로 과자를 만들고, 향주머니와 향 단지로도 쓰고, 기름을 뽑아 향료로 쓴다는 구나. 전대 마나힘이 좋아했던 나무니라. 버릴 데가 하나도 없다고 말이다.” 그는 자신이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음이 상당히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어린 아들에게 세상을 알려주는 아비 같았다. “이곳에 자주 나오느냐?” “네.” 부친은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는 예서를, 자신의 말에 조심스런 대답은 하면서도 눈을 맞추기 꺼리는 예서의 머리를, 서툰 손을 들어 쓰다듬었다. 그러자 예서가 번쩍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예서의 눈은 놀라움에 잔뜩 커져 있었다. 이때만큼은 부친도 그 동안의 친근한 미소를 버리고 어색한 미소로 예서를 쳐다보았다. 자연스럽지 않은 손길이었지만, 친절한 손길이었다. 그러나 예서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던 손은 곧 사라졌다. 어색함에 머쓱해하는 그의 모습이 순박한 시골 총각 같다. “이렇게 내 아들 녀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보고 싶었느니라. 그런데 못 했지.” “...........” “흠흠. 아까 보니 파피루스를 읽던데 읽을 줄은 아느냐?” 남아있는 서먹함을 떨쳐내려는 듯 헛기침을 하는 부친의 얼굴이 조금 붉었다. 예서의 입가에 미소를 번졌다. “읽기는 하지만 그저 내용 파악하는 정도로 한 반쯤요. 아직은 그 수준입니다. 그나마 쉬운 이야기책이 그 정도에, 아직 모르는 게 수두룩해요. 수(數) 역시 십진법도 아닌 십이진법을 쓰는 것도 그렇고. 모든 게 생소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어렵거나 한 건 아니고요. 쫓기는 것도 없고 꼭 해야 한다고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니니까 배우는 것 자체는 즐겁습니다.” 지금껏 간단한 대답만을 하던 예서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 부친은 즐거움에 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자식이 처음 입을 열어 아비라 말하기라도 한 듯한, 경이로움에 한껏 부푼 시선이다. “그래?” 두 사람을 눈을 맞추며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다. “네.” “그래 글을 누가 가르쳐 주는고?” “이지라는 분이요.” “호오라. 차빈도 아느냐. 이지한테서 네가 글을 배우는 것을?” “네.” “차빈이 권했을 리는 없고, 나이냐? 차빈이 꽤나 진저리를 쳤겠구나.”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부친은 하늘을 보며 껄껄 웃었다. “꽤나 차빈의 애를 먹인 글 선생이니라. 외골수지. 둘 다 외통수다 보니 어찌 아니 부딪히겠느냐. 하루도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었지.” “.............” “예서야.” “네.” “나도 아느니라. 내가 왜 그 성정을 모르겠느냐. 아마 제국 이루에서 그 놈을 감당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게다. 황제 폐하께서도 혀를 내두르신 성품이니, 오죽이나 하겠느냐.” “...........” “그래도 그 놈이 내 나이가 되면 깨닫는 게 있을 게다.” “...........” “그 때까지만 참아 다오.” “...........” 장난스러운 말투에 담긴 간곡함에 예서는 가만히 차빈 부친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젊었을 때는 막무가내였지. 그걸 꺾은 게 마나힘의 죽음이었느니라. 내 뜻대로 아니 되는 것도 있더구나. 그걸 받아드리기가 힘들었지. 받아들이고 이제 좀 편안해져 주위를 둘러보니 차빈이 있더구나. 하나뿐인 아들놈이 네 손을 떠나 훌쩍 혼자 자라있더구나.” “.........” “인생이란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것이더구나.” “...........” “내 아들이 처음으로 반짝거리며 산다하니, 한없이 좋은데 말이다. 너를 보니 걱정이구나.” “...........” “예서야.” “.................” 아무 대답 없이 예서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 예서를 보는 부친의 눈은 많은 생각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쓸쓸한 미소를 짓는 그의 눈에는 회한이 흐르고 있었다. “단단히 미움 받고 있는 게로구나. 내 아들이.” “소금이 폭락한다라......” 손가락으로 커다란 사자대(寫字臺)를 두들기며 골똘하게 무언가를 생각하던 차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사자대(寫字臺)위에는 여러 장의 지도와 수많은 파피루스들이 잔뜩 흩어져 있었다. “원인은?” “갑자기 시장에 많은 물량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차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호흡이 조금 거칠다 싶은 순간, 자신의 뒤쪽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는 가신을 차빈은 고개를 틀어 싸한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그 눈초리에 바짝 얼어버린 가신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소금의 폭락과 폭등은 주기적으로 요 몇 년간 계속된 일입니다.” “앵무새처럼 매번 같은 소리하는 것도 지겹지 않은가 보군. 듣는 난 상당히 지겨운데 말이다. 그래, 지금 이 일이 그저 ‘주기적으로’ 라는 말로 덮을 일로 보이나? 그런 안이한 소리 말고 대책이나 정확한 이유를 가져와!!” “죄송합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풀고 있는 듯합니다.” 차빈의 싸늘한 일갈에 가신은 머리를 조아렸다. 차빈은 짜증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역시 종류는 해염(海鹽)인가.” 차빈은 다시 파피루스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가신의 입에서 작게 안도의 숨이 삐져나왔다. “예.” “해염이라면 그건 국가의 소관이거늘 어째서 근본도 없는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지?” “죄송합니다. 백방으로 알아보고는 있습니다만, 아직까지는 꼬리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차빈은 모든 게 못마땅했다. 해염(海鹽)은 전량 황제의 칙령으로 통제하는 물품이다. 그러기에 자신들조차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있건만, 그것이 지금 민간 시장에 나돌고 있는 것이다. 출처도 당연히 불분명했다. “암염(岩鹽) 광산 쪽은?” “어렵습니다. 물량이 들쭉날쭉이다보니 저희 광산 쪽도 우왕좌왕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암염이라 함은 산에서 캐는 소금을 말한다. 해염에 비해 질은 떨어지나 양이 많고 구하기 쉬워 일반 서민들이 애용하는 소금의 한 종류로, 현(現) 차빈가를 유지하는 커다란 하나의 축이다. 차빈가는 제국 이루의 대다수의 암염 광산을 국가로부터의 임대라는 명목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그래도 그다지 타격이 심하지 않았습니다만, 이번 것은 워낙 방대한 물량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지라.” “그래서 그 동안은 무시했다?” “죄송합니다. 작은 상단들의 농간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암염의 판로가 없다?” 차빈의 냉혹한 시선에 가신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최상품의 해염이 암염 가격으로 시장에서 판을 치다 보니, 암염은 사실....” “황가 쪽은?” “그 쪽도 저희와 마찬가지입니다. 해염이 대량으로 일반 시중에 나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경악하고 있습니다.” “트사리움 쪽은?” 트사리움은 일명 ‘소금 왕국’ 이라 불리는 삼면이 바다인 제국 이루의 이웃 국가다. “아닙니다.” “확실한가?” “예. 그 쪽은 집안 단속만으로도 급급한 실정입니다. 국내 실정이 그렇다보니, 국내 수요도 겨우 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물량이라면 국가의 면밀한 주도하에나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움직임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짠물로부터의 유입으로 추측하고 백방으로 손을 쓰고 있습니다만.” 가신이 입에 올린 ‘짠물로부터의 유입’이란 해상무역을 뜻하는 말이며, 해상무역을 국가의 소관으로 엄격히 관리하는 제국 이루에서 이는 죄명을 씌우기에 따라 반역이라 이름 붙일 수도 있는 행위다. 해염을 짠물로부터 유입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과연 이런 위험한 짓거리를 겁 없이 하는 패거리들이 존재할까. 차빈은 한참 동안을 사자대(寫字臺)에 두 손으로 짚고 그 위의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예감이 안 좋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차빈은 이마를 쓸면서 다시금 천천히 지도를 살펴보았다. 제국 이루는 뒤쪽으로 성산(聖山) 인가(仁家)를 가지고 있어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는 안전지대였다. 그러나 바다는 고작 한 면이었다. 그것도 해안선이 너무 짧아 쓸 만한 항구는 몇 개 되지도 않는다. 그러기에 가폐와 트사리움만을 이웃하고 있는 제국 이루는 의외로 작은 파도에 무방비하게 휩쓸릴 수 있는 맹점을 가진 정체된 나라였다. “트사리움 쪽도 알아보도록. 그 지경이라면 구멍이 나있어도 몇 개는 나있을 거다. 그 중 하나일 수도 있다. 돈이라면 환장한 인간들은 어디라도 있으니. 알아듣겠나? 짠물로의 유입? 너무 희박해. 그 정도의 물량을 배로 들여오면서 황제와 우리의 눈을 피할 수 있다고 보나? 그 정도의 물량이라면 트사리움 밖에 없다. 그리고 일단 광산의 물량은 최소로 하고. 놀리지는 마라. 놀리게 될 경우 심리적인 타격이 더 크다. 이 정도 물량을 누군가 고의적으로 뿌리고 있다면 이건 그냥 단순한 문제가 아니니까.” “예.” 고가의 물품은 많다. 그리고 그 대표로 꼽는 건 역시 향신료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계층의 호화로운 기호품일 뿐이다. 그러나 소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건 군력(軍力), 밀 그리고 소금이다. 그 중 하나의 뿌리가 휘청거리고 있다는 건 아주 주도면밀한 작업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고, 최상층의 비호가 있다는 소리다. 누굴까. 그리고 무엇이 목적인가. 아무리 고요한 제국이라도 완만한 굴곡은 항상 있었다. 세가 약한 황제가 등극하거나, 아니면 한 황제의 권력이 너무 오래되어 물이 고이거나, 변수는 여러 가지였다. 세가 약할 경우, 권신들이 서로의 먹이사슬을 재편하려 들었고, 물이 고인 경우는 신구의 세대교차가 원활하지 못해 피비린내 나는 권력다툼이 일어나곤 했다. 그러므로 권좌는 적당히 강해야하고, 적당히 순환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 황제는 근 사십년의 통치를 하고 있었고, 다음 보위는 너무 약하다. 차빈은 불만스럽다는 듯 이마를 찌푸리며 혀를 찼다. 제국 이루? 그건 차빈가를 위해 필요할 뿐이다. 자신들이 원했다면 이미 오래전 이 땅은 ‘차빈’이라 불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불필요하다 여겼기에 차빈가 수장들은 황제에게 머리를 숙였다. “밀 쪽은?” 차빈은 손에 들고 있던 파피루스를 내려놓고, 사자대(寫字臺) 위의 다른 파피루스를 들었다. “밀 쪽은 아무 움직임이 없나?” “예. 풍작입니다. 하등 걱정하실 게 없습니다.” “풍작이라, 그쪽도 예의 주시하도록. 풍작이라면 농간질을 해도 그다지 큰 타격은 없을 테지만, 또 모르는 거다. 상단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이건 그저 늙은 너구리들의 욕심 사나운 짓거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다. 그러니 이번에는 기필코 꼬리를 잡는다. 알았냐?” 누구도 용서하지 않는다. 그게 비록 황제일지라도. 차빈은 냉랭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정면을 쏘아보았다. “예.” “작년에 우리 배가 습격을 당했었지?” “예.” “몇이나?” “일곱입니다.” “재작년에는?” “다섯입니다.” “그 전에는?” “보통은 두서넛이었습니다.” “두서넛이라.” “다른 쪽 배들은?” “별반 예년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설마 우리인가?” 제국 이루에서 뿐 아니라, 모든 국가에서 철은 곧 군력(軍力)을 상징한다. 그런데 문제는 제국 이루에는 단 한 줌의 철도 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즉, 철을 수입으로만 의존하는 치명적인 약점 하나를 떠안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기에 황가는 철의 확보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그 철을 수입하는 대양무역이 공격을 받고 있다는 건, 그것이 아직까지는 비록 미미할지라도 차빈이 제국 이루에 원활하게 철을 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예 따라 황가에 대한 입김이 작아진다는 것도. 작은 구멍 하나가 모든 것을 망치는 법이다. “예?” “아니다. 나가 보거라.” 만약 타깃이 차빈가라면 차빈으로서는 상황이 더욱 복잡해진다. 천년의 실세를 이렇듯 정면에서 노린 경우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다. “예.” 손가락으로 커다란 사자대(寫字臺)를 두들기며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차빈은 아까부터 장승처럼 아무 말 없는 모주간 나이를 힐끔 쳐다보았다. 차빈은 천천히 돌아서 커다란 사자대(寫字臺)를 등지고 섰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한참을 모주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모주간. 그대는 왜 딴 생각을 품지 않았지? 거의 텅 비다시피 한 우리 가문이었다.” “저는 제 그릇을 압니다.” 나이는 빙그레 웃으며 그제야 몸을 움직여 옆에 준비되어 있던 찐 차를 물에 우렸다. 그다지 달지 않아 제국 이루에서는 즐겨 마시지 않는 차다. 이 차를 의외로 차빈은 즐겨 마셨다. 모주간 나이는 초벌구이만 한 채 유약을 바르지 않은 붉은 토기에 차를 담아 차빈에게 공손하게 올렸다. 그릇은 흰색으로 기하학적인 단순한 문양만이 아로새겨져 있어 상당히 소박해 보였다. 투박하지 않아서인지 단아해 보이기까지 했다. 차빈은 토기그릇에 담긴 온기를 음미했다. “그래?” 차를 마시면서도 차빈은 나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런 차빈을 보며 나이는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시대 정도는 분별 할 줄 알지요. 차빈은 황제폐하의 비호가 있었습니다. 그 비호 속에서 어찌 제가 딴 뜻을 품을 수 있었겠습니까. 차빈님. 충신은 시대가 만들지요. 물론, 간신 또한 매한가지이긴 합니다만, 시대를 이끄는 하늘이 내린 충신은 만에 하나 천에 하나입니다. 전 하늘이 내린 충신은 아니지만 시대는 분별하여 움직일 줄은 알지요.” “그럼, 그대는 시대에 따라 간신도 가능한 사람이라는 거군.” “글쎄요? 차빈님이 보시기에는 어떤 것 같습니까?” “글쎄.” 차빈은 나이를 보며 입가를 풀었다. 그런 차빈의 작은 미소에 나이는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요 몇 년 폐하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면서 흔들리고 있는 겁니다. 유약하신 황태자, 반윤 황자, 오(五) 황자, 칠(七) 황자. 황실에 문제가 많지요. 수많은 패들이 난무하게 된 겁니다. 보위야 당연히 마나힘 폐하 소생인 황태자님 것이지만, 그러나 실권은 아니지요. 실세의 자리다툼인 겁니다. 권력 이양 시기에 항상 있던 일이지요. 단지, 저희 쪽이 약해진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게 문제일 뿐입니다.” “......약해졌다라.” 차빈은 입맛이 썼다. 모주간 나이의 말이 맞다. 자신들은 약해져 있다. 부친 때부터였다. 차빈가의 수장은 전대 마나힘 사후 북쪽 가폐와의 국경선 분쟁 한 가운데에서만 살았다. 황성에 오는 것도 몇 년에 한 번씩 황제의 간곡한 부름이 아니고는 없었다. 어린 차빈을 이끌고 가문을 지킨 건 지금 차빈의 눈앞에 서 있는 세간으로부터 늙은 살쾡이라는 칭함을 듣는 나이였다. 지키기에도 급급한 십여 년의 세월이었다. “황제의 병환이 너무 길었습니다. 아니, 그나마 길어서 저희한테는 유리했습니다. 물밑이 시끄럽다 하나 물위가 아직 건재한대 세를 키우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까지는.” “.................” “...........” “아버님은?” “오시는 중이란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래? 마나힘은?” “약초 정원에 계십니다.” 똑똑. 서고 문 앞에 입성이 단정한 여인이 웃고 있었다. 그러나 방금 길고 거친 여행이라도 하고 온 듯한, 허름한 입성이었다. 화려하지 않은 입성은 먼지로 범벅이었다. 모주간 나이는 황급히 몸을 숙여 여인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그 순간 차빈은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여인에게 고하는 나이의 소리를 들은 것이다. “오셨습니까. 마중이라도 할 수 있게 미리 연통이라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오시겠다는 연락만 하시고 그 후 아무 연통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에 그 아버지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렇게 되는 건가요.” “워낙 뜬금이 없는 분이라 이렇게 오시겠다고 하시더군요. 마음이 급하셨겠지요. 하나뿐인 아드님의 마나힘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급하셨겠지요.” 온화한 인상의 자그마한 중년 여인은 차빈을 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이가 차빈 부친의 두 번째 반려인 모아나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별 말씀을. 항상 있는 일인데요. 그나저나 감축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차빈은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오랜만이지요?” “예.” “한 삼 년만인가요?” “그쯤 될 겁니다.” “죄송합니다. 항상 여주인이 필요할 때 자리를 비워서요.” 차빈은 미안해하는 여인을 보며 괜찮다는 말 대신 잠시 싱긋 웃었다. ‘괜찮다.’라, 사실 차빈이나 모아나나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주고받을 만큼 다정하고 살가운 사이는 결코 아니다. 아마도 그건 여건적인 면이나 성격상의 문제 때문일 것이다. 거의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 없었던 두 사람이고 보면, 워낙 살벌하리만큼 무뚝뚝한 차빈의 성격에 비춰볼 때, 그건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님께서 이번에 헛혼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예. 그러실 모양이십니다. 좋은 일이지요.” 여인은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정하고 소박한 인상처럼 평생을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살아온 여인이다. 혼례 후 오년간은 전대 마나힘의 그늘에 가려있었고, 그 사후에는 전쟁터를 떠도는 남편의 뒤를 말없이 따랐던 여인이었다. “아버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신지요?” “마나힘을 보시고는 조금 전에 입궁하셨습니다.” 단정하고 아담한 미소의 여인은 곧 차빈을 남겨 두고 서고에서 물러났다. 여인은 서고 밖에 서 있던 모주간 나이를 보자, 그 동안 수고했다는 듯 모주간 나이를 향해 작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리고 바로 자릴 떴다. 할 일이 태산인 것이다. 차빈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예서가 있는 곳은 찾기 쉽다. 햇볕이 가장 좋은 곳, 예서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가끔 보면 예서는 눈을 감고 해바라기 마냥 얼굴을 하늘로 향하곤 하는데, 무엇을 보는 걸까. 차빈은 종종 궁금해지곤 했다. 오늘도 차빈은 예서를 찾아 약초 정원을 거닐었다. 멀리서 차빈을 발견한 마힌이 먼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러자 그런 마힌을 눈치 챈 힌두아가 예서에게서 시선을 들어 마힌이 향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힌두아도 마힌과 마찬가지로 정색하며 차빈에게 예를 표했다. 예서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들어 있었다. 손에 파피루스를 느슨하게 쥔 모양새를 보니, 파피루스를 읽다 깜박 잠이 든 모양이다. 차빈은 손을 내밀어 예서의 손에서 파피루스를 조심스레 빼내었다. 파피루스는 의외로 고대 서사시로 대홍수 이전 조상들의 이야기였다. 찬찬히 파피루스를 살펴보는 차빈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차빈은 손짓으로 모든 사람들을 물렸다. 커다란 야우크 털 위에서 두 손을 머리위에 번쩍 들고 쌕쌕거리며 자는 예서의 모습이 마치 아이 같다. 차빈은 바람에 흐트러진 예서의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정돈해 주었다. 예서의 반듯한 이마를 쓰다듬던 차빈은 편안하게 감긴 예서의 눈언저리를 매만지다 예서의 속눈썹이 주는 간지러운 느낌에 소리 없이 웃었다. 부드러운 귓불을 짓궂게 잡아당겨도 예서는 그저 뒤척이기만 할 뿐 깨어나지 않았다. 보석이 화려하게 박힌 예복을 벗은 예서는 단정하고 정결했다. 이제 예서는 더 이상 사제복을 입지 않는다. 누워 있느라 움푹 들어간 배를 쓰다듬던 차빈은 예서의 배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깊고 온화한 숨을 내뱉는 예서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달큼한 숨결이었다. 잠이 설핏 들었던 예서는 자신을 지분거리는 손길에 가만히 자신을 맡겼다. 마치 꿈결 같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생각하기에는 깃털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따사로운 햇살 같아 그 손길이 주는 기분 좋은 감각을 즐기며 예서는 천천히 눈을 떴다. “깨어났는가.” 그리고 눈앞에 차빈이 있었다. 팔을 괴고 옆으로 누워 예서를 내려다보는 차빈의 부드러운 미소에는 애정이 스며있었고, 얼굴을 쓰다듬는 그 따스한 손길은 왠지 편안했다. 아직 잠속에 반쯤 잠긴 예서는 멍히 눈을 깜박였다. 한없이 몽환적인 기분 속에 예서는 무방비한 시선으로 차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예서의 입가를 매만지며 차빈은 예서를 따스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햇빛이 차빈 너머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어제 그다지 심하게 하지는 않은 듯싶은데, 많이 피곤한가.” 나른한 여름 오후가 연상되는 말투였다. 반쯤 몸을 일으켜 예서를 내려다보는 차빈의 긴 머리가 예서의 얼굴에 흩어졌다. 그리고 차빈의 그 한 마디가 예서를 현실로 되돌렸다. 그예 예서는 벌떡 일어나 앉았고, 차빈은 예서에게서 비켜나며 팔을 머리에 괴고 천천히 하늘을 향해 누웠다. “하얗게 때문인가. 선홍색으로 붉어지는군.” 손을 뻗어 자신의 볼을 어루만지려는 차빈의 손을 냉정하게 처내려던 예서가 도리어 차빈에게 잡혔다. 차빈은 예서의 손가락 끝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며, 집요한 시선으로 예서의 얼굴을 쫓았다. “글은 배우기가 어떤가. 나는 꽤나 어려웠는데 말이지.” 자신의 손목을 비틀어 그 손아귀에서 빼내려다 예서는 곧 체념하듯 손에 힘을 뺐다. 생각해보면 별일 아니다. 그저 차빈과 나누는 이런 감정적인 스킨십에 대한 반사적인 반응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런 감정을 이성이 잠재워야 하는 현실이 서글펐다. 손을 내주고 예서는 차빈을 외면했다. “그럭저럭요.” “이지가 칭찬을 하더군.” 그런데 이죽거리는 차빈의 말투가 의외다. 차빈은 마치 심통이 난 어린아이 마냥 퉁퉁 부은 얼굴로 말을 하고 있었다. 예서의 눈길을 느낀 건가. 차빈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 하나가 걸렸다. 예서는 그런 차빈의 모습을 무심결에 빤히 쳐다보았다. 차빈의 미소가 조금 더 깊어졌다. 그리고 예서의 손가락을 만지작대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 힘에 예서의 눈가가 찌푸려지자, 차빈은 곧 힘을 풀고 부드럽게 손톱부터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매만졌다. “어려서는, 그 때는 참 싫었다. 말(馬)이 좋았고, 그 다음이 칼이었지. 그대는?” 올곧은 차빈의 시선이 예서를 향했다. “그대는?” 그리고 생각지도 않았던 차빈의 질문에 예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런 예서를 바라보는 차빈의 눈가가 곱게 접혔다. “나는.....” “지금은 그대가 제일 좋다.” 점점 커다랗게 떠지는 예서의 눈을 보는, 예서를 끌어당겨 자신의 옆에 눕히며 차빈은 즐거움으로 반짝거렸다. “좋아. 그대가. 나의 마나힘이라 다행이다.” 차빈은 예서의 품에 안기며 그 목에 얼굴을 묻었다. “안아 다오. 그대 품에서 한숨 자야겠다. 나도 어제는 좀 무리를 했거든.”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차빈은 예서의 목에 코를 비비며 쿡쿡거리는 낮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편안한 숨소리가 차빈에게서 흘러 나왔다. “...........” “.........................” “..........나는... 나는...... 당신이 싫습니다.” 혼잣말을 하듯 나지막한 예서의 자자드는 목소리는 차빈의 평온한 숨소리 속에 묻혔다. 땔감을 정리하는 연한 고사리 같은 손에 사정없이 가시가 박혔다. 서툰 일을 하는 어린 손이건만 냉정한 나무토막들은 사정 따윈 두지 않았다. 아이의 눈에 찔끔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따끔거리는 손가락을 본능적으로 빨면서도 아이는 차마 일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얼마만의 일이던가. 아무도 일을 주지 않으려 했다. 근본도 없는 아이가 할 일은 없었다. 더러운 비렁뱅이 아이에게 줄 일거리 따위는 없었다. “자. 먹어.”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걸까. 사내아이의 등 뒤로 두어 발자국 멀찍이 떨어져 아이의 손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계집아이는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새침한 표정이 되어 아이에게 불쑥 그릇을 내밀었다. 모락모락 하얀 김이 올라오는 그릇 속에는 깨끗한 나무 숟가락이 있었다. “받아.” 아이는 고개를 연거푸 꾸벅거리며 두 손으로 그릇을 받았다. 아이에게 주발을 넘겨준 계집아이는 냉큼 자신의 옷에 손을 닦았다. “이름이 뭐야? 너 어디서 살아?” 아이는 계집아이의 눈치를 보며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름 없어? 벙어리야?” “...............” “벙어리야?” “........벙어리... 아.... 아니에요......” “이름이 뭐야?” “......이... 름이... 없어... 요.....” 아이는 자라 마냥 목을 움츠리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멀뚱히 아이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계집아이는 곧 아이에게서 화들짝 떨어지며 소리를 내질렀다. “뭐?!! 너 더러운 사생아구나!! 에이. 퇫!!” 계집아이는 호들갑을 떨며 아이에게 침을 뱉었다. 그러나 땅에 뱉는다고 뱉는 것이 그만 아이의 발등이었다. 덜컥 겁이 난 계집아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게다가 아까부터 사내아이 주변을 맴돌던 강아지 한 마리가 그런 계집아이를 향해 다짜고짜 짖기 시작했다. 어린 강아지라 짖는 것이 서툴렀지만, 계집아이의 눈에는 어느 큰 개보다 더 무서웠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네 잘못이야!! 네가 더러운 사생아라서 그래!!” 계집아이는 울먹거리며 뒷걸음질 치다 쏜살같이 달려갔고, 곧 아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리 와. 괜찮아. 괜찮아. 끙~. 구대기도 없고. 와아! 고기도 많아.” 그리고 아이는 곧 계집아이를 잊었다. 항상 듣던 소리다. 아이는 계집아이가 건네주고 간 주발을 내려다보며 아직도 짖고 있는 강아지를 달랬다. 달관한 신선처럼 눈을 반쯤 감고 볕을 즐기는 듯, 혹은 햇빛으로 목욕을 하는 양, 히루나는 대신전 성수(聖水) 옆에서 느긋하게 누워있었다. “...............” “.........................” 그리고 예서를 올려다보는 검은 동자만으로 가득 찬 눈이 잔잔한 물처럼 조용히 웃었다. 예서가 그 편한 미소에 같은 미소로 답을 하자, 히루나의 눈이 반으로 접혔다. “잘 오셨습니다. 심심하던 참이었는데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아니, 마침 신선한 쉬이가 있는데 드시겠습니까? 아침에 공물로 들어온 것 중에 쉬이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느냐?” 히루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예. 히루나님.” 대신전의 견습사제이자, 히루나에게로 예서를 기꺼운 마음으로 안내한 호우는 털썩 히루나 옆에 주저앉으며 싱긋 웃었다. 여드름 가득한 얼굴에 키만 멀뚱하게 큰 호우는 변성기인 모양인지 걸걸한 목소리다. 그리고 호우는 뭐가 그리도 신기한 듯, 예서의 얼굴에서 눈을 거둘 생각을 영 못했다. 하긴 혼례의식을 위해 예서가 대신전에 며칠 머물기는 했지만, 워낙 철통같은 경비로 인해 호우는 얼굴은 고사하고 머리카락 한 올 구경할 수 없었다. 바람결에 들리는 소문만으로 그 왕성한 호기심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을 테니, 그러니 이런 뚫을 듯한, 강렬한 시선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예서는 호우가 보기에 듣던 것보다 의외로, 뭐라고 해야 할까. 물론 피부나 이목구비가 판이하게 자신들과는 달랐지만, 그래서 묘하게 가슴을 설레게 하는 분위기를 풍겼지만, 여자 같은 인상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우락부락한 또래의 모습 또한 아니었지만, 그래도 건강한 사내아이였다. 꽤나 자주 씻는 모양인지 정돈되고 정결한 냄새가 나기 때문일까. 호우의 가슴이 조금 두근거린다. 호우는 코를 끙끙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맡아지는 게 처음이긴 하지만, 최상품의 향유라는 것은 알겠다. “호우, 네 이놈! 뭐하는 게냐?! 냉큼 일어나서 가져오지 않고!” 히루나가 호우의 등을 사정없이 때리며 엄하게 한 소리하자, 호우는 툴툴거리며 마지못해 일어섰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어린 노루 마냥 바위 위를 겅중겅중 뛰는 호우의 모습에 나지막이 웃었다. 호우는 자신의 시야에서 그들이 사라지기 전 흘끔 돌아보았다. 그러나 곧 친구하고 싶다는 뜬금없는 자신의 생각에 화들짝 놀라며 걸음을 재촉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감히 차빈가의 마나힘을 상대로 친구하고 싶다는 시답지 않은 생각을 품다니. 아니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불가능만은 아니다. 뭐, 호우 자신이 대신전의 대사제가 되면 가능할 법도 하긴 하다. 노력해 볼까나. 호우는 성가(聖歌)를 콧노래로 흥얼거리면 잰걸음을 바삐 놀렸다. “이제 열다섯인가요? 아마 그 정도 일겁니다. 신전에 온지도 벌써 삼년이건만 아직 속세의 때를 벗지 못했지요. 같이 들어온 녀석들은 벌써 사제의 품성이 나기 시작한지 벌써 예전인데도 말입니다. 저 녀석은 느긋하지요.” 꽤나 아끼는지 호우를 입에 올리는 히루나에게는 그를 향한 애정이 있었다. “마나힘. 그거 아십니까. 신을 섬긴다는 인간들이 말입니다. 공물은 화려한 그릇에 가득 담아서 상하기 직전의 음식들만 들고 옵니다. 덕분에 저희들은 종종 폭식을 하게 되지요. 들어온 음식은 절대 내갈 수 없다는 게 신전의 규칙이라 상해도 먹어야 하니 그전에 들어오는 족족 먹어 치우게 되는 거지요. 게다가 매일 들어오는 공물의 양이 천지차이다보니 어느 날은 성수(聖水)로만 배를 채우기도 하지요.” 뭐가 그리도 재미있고 신이 나는 걸까. 히루나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껄껄거렸다. “아마도 오늘은 사제들이 물리도록 쉬이를 먹을 겝니다. 자신들이 먹다가 남긴 음식을 싸 들고 오는 인간들이나, 그걸 죄다 먹어야 하는 사람들이나, 세상은 요지경입니다. 마나힘.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재미있는 건 대략 신선도에 따라 사는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겁니다.” “...........” “마나힘. 가난한 사람일수록 신선한 음식들을 가지고 오더군요.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 “웃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작은 마나힘. 그렇게 웃으세요. 웃다 보면 모든 것이 넉넉해진답니다.” “여긴 하나도 변한 게 없네요.” “하하하. 여긴 항상 여전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그냥요. 여기 밖에 갈 데가 없어서요.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는데 생각나는 게 여기뿐이던걸요. 황성 밖으로 나가자니까 다들 사색이 되어 기겁이나 하고, 나이 할아버지만 빼고요. 그 할아버지는 철가면에 철심장이라 그런지 항상 꿋꿋하죠.” “하하하. 그 큰 저택이 답답하셨습니까? 하긴 본성에 비하면 작긴 하죠. 그나저나 작은 마나힘, 발 한 번 담가 보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담가 보시지요.” 예서가 천천히 발을 담그자 차가운 성수 또한 예서가 머뭇거린 만큼 그 만큼 탐색하듯이 예서를 가만히 품기만 하다 그것도 잠시 부드럽게 예서의 발을 어루만졌다. 그 느낌에 예서는 휘둥그레 히루나를 쳐다보았다. 히루나는 그런 예서에 눈을 맞추며 조용히 웃었다. 예서가 발을 까딱거리자 이번에는 손으로 맞장구를 치듯 예서를 살그머니 쳤다. “온화하시지요? 자식을 품는 어미 같은 분이십니다. 화내는 것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성수가 화도 내나요?” “그럼요. 성수는 화가 나면 땅 속 깊이 인간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자신을 숨깁니다.” “물이 화를 낸다니까 저는 그냥 왠지 바다가 생각나는 게, 짠물이요. 음, 화는 폭풍이나 해일을 봐도 그렇고, 바다가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하하하. 성수는 확실히 땅에 속한 물이지요. 하늘을 벗 삼아 땅에서 사는 존재라 제멋대로 자유로운 짠물과는 확실히 그 성품이 다르지요.” “단물과 짠물이라.......” “그러니까 마나힘 혹시 무슨 일이 생기시게 되면, 이곳으로 오십시오. 도와 줄 겁니다. 인간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성수 중 하나이십니다.” “절대입니다.” “정말이냐?” “예. 확실합니다. 맹세하라시면 이 몸의 목숨이라도 걸겠습니다.” “그래? 후후후. 그렇단 말이지.” “예.” “아하하하. 그렇단 말이지.” 아후의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는 키득거리는 야비한 미소로 점점 바꾸어졌다. 그러나 그 미소도 곧 아후의 온화한 가면 속으로 사라졌다. 집안은 어수선하면서도 팽팽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확실히 들떠 있었다. 늦은 저녁임에도 처소로 돌아가지 않고 가신들은 바삐 움직이는 가노들을 독려하며 질책하고 있었다. 평소와는 사뭇 다르게 말을 아끼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예서는 의아해 했다. 그렇게 밤은 점점 깊어갔다. 그리고 늦은 그 밤, 모주간 나이는 예서에게 차를 권했다. 조르륵 차를 따르며 나이는 여상하게 입을 열었다. “헛혼입니다. 마나힘.” “헛혼이요?” 예서는 차빈처럼 찐 차를 좋아했다. 쌉쌀한 뒷맛을 맛있다 하는 예서의 그 이해할 수 없는 입맛에 혀를 차면서도 나이는 즐거워했다. 좋아하는 것이 하나 둘씩 늘어가다 보면 어느새 예서가 이곳 사람이 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니 혼례는 혼례인데, 그 혼례가 혼인이 아닌 것이니 헛혼이라 하지요.” “............?” 예서의 의문에 찬 시선에 모주간 나이는 즐거이 미소를 지었다. 관심 없는 것보다 좋은 일이다. 예서의 손에 따스한 찻잔을 건네며 나이는 말을 이었다. “관례지요. 자식이 없는 과부들은 일가의 남자에게서 씨를 받은 후 죽은 본 남편에게 돌아가지요. 일가는 그렇게 여자가 받은 씨로 더욱 견고한 관계를 가지게 되고, 여인들은 자식을 얻어 자손이 있는 풍족한 여생을 보내게 되는 거랍니다.” 차의 온기가 좋은지 예서의 입가가 풀어졌다. 예서는 소리 내어 웃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간혹 지금처럼 작은 일에 그 입가가 부드러워지곤 했다. 그 사실은 아직 본인도 모르는 듯싶었다. 나이가 듣기로는 며칠 전 대신전 히루나와 웃으며 담소를 나누었다고 하니, 이제 곧 자신들 앞에서도 활짝 웃으리라. 언젠가 환한 웃음이 되리라. “지금 이 집안에 발을 들여 놓는 여인은 이 집 큰 어르신이신 차빈님의 육촌 조카뻘 되는 분의 네 번째 반려입니다. 돌아가신 분의 반려 중에 유일하게 자식이 없는 분입니다.” “.............” “선택은 여인들의 몫입니다. 선택받은 남자는 그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은 누구나 피해갈 수 없지요. 그러니 씨를 받게 되는 가문이나 여인들은 되도록이면 힘 있는 일가를 원하게 되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복잡해 보이는 예서의 얼굴을 보며 나이는 덧붙였다. “그렇다고 핏줄은 아닙니다. 일가끼리 서로 돈독 한다는 의미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인정상 돌아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재혼은요?”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상당한 충격을 받을 듯, 나이의 근엄하던 표정이 삽시간에 깨졌다. “재혼이요.” “그, 혼례를 다시요?” “네.” “사람으로서 혼례는 평생에 한 번 뿐입니다. 다시라니요? 다시라니요?! 다시는 없습니다. 마나힘. 다시는 없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다시라니? 맙소사. 그런 망발을, 그런 망측한 일을 입에 담으시다니요?! 그것도 차빈가의 마나힘께서요!!! 마나힘께서는 이제 저희들의 주인이십니다!! 아시겠습니까?! 주인의 반려는 저희의 주인이거늘, 그럼, 그럼 이 차빈가는 어찌 되는 겁니까?!! 두 번 다시 입에도 담지 마십시오. 아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황망하기는 예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그렇게 큰일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나이 지긋한 양반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울그락불그락하니 일단 져줄 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세상에나, 다시라니......” 꽤나 충격이었나 보다. 나이는 혀를 내두르고 머리를 내저으며 투덜거렸다. “마나힘. 차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예서가 여전히 형형한 눈빛인 나이의 기세에 눌려 두 말도 않고 꼭 쥐고 있던 찻잔을 내밀자, 나이가 씩씩거리며 차를 따랐다. “흠흠. 하여간 서로서로 좋은 겁니다. 큰 어르신 경우 이번이 처음이십니다. 워낙 전쟁터에서 사신 분인데다 뜻대로 함부로 운신하실 수 없는 분이니까요. 그게 차빈입니다. 사실 이번 결정은 의외였습니다. 친가도 아니고 외가입니다. 더군다나 워낙 한미한 가문에 꽤나 먼 핏줄이라 그래서 이례적으로 그 쪽에서 먼저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큰 어르신께 여쭈었다고 하더군요.” 귀를 쫑긋 세우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뚫어져라 보는 예서의 모양새가, 마치 어린 야우크 같다. 굳었던 나이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런 나이를 보며 예서는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큰 어르신께서 의외로 흔쾌하게 허락하셨습니다. 그건 아마도 작은 마나힘 때문인 것 같습니다. 좋은 일에 겹경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좋은 게 좋은 거지요. 그리고 모든 헛혼은 밤에 이루어지며 여인은 아이가 생기는 즉시 본가 죽은 남편 곁으로 돌아가지요. 그래서 차빈님께서 오늘은 딴 방에 드실 겁니다. 헛혼도 혼례인지라, 부친의 헛혼 첫날밤에는 자식은 반려를 취하지 않는 게 또 관례니까요. 아, 저한테 따지시진 마십시오. 언제부터 왜 생겼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작은 마나힘.” “............;;;” 예서가 의원 후치를 따라 나섰다. 약초들을 조금씩 구별하게 된 예서를 정원에서 일하던 후치가 초대한 것이다. 술렁이던 어수선한 밤이 지나고,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본가는 평상시와 같은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앵속입니다. 꽃이 화려해서 간혹 집안을 장식하기도 하지요. 복통이나 각종 만성 내장 염증, 그리고 불면에 좋지만, 중독성이 강해 자주 혹은 많이 사용하면 안 되지요.” ‘앵속’이라는 약초는 윗부분의 가지가 갈라져 있고, 붉은 꽃이 크고 화사했다. 후치가 가리키는 식물을 예서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예서가 구경할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 있던 후치는 예서가 몸을 일으키자 조용히 앞서 걸었다. “형개입니다. 말려서 사용하는데 고뿔로 열이 나고 두통에다 목이 아플 때 그리고 종처(腫處:부스럼이 난 자리)에서 피가 날 때 사용합니다.” ‘형개’라 불리는 식물은 향이 강했다. 털이 있었고 연한 자홍색 꽃이 층층으로 달려 있었다. “그리고 이건 계손입니다.” “붓꽃이네요.” “예?” “이거 말입니다.” “아, 계손이요.” “네. 붓꽃이요.” 후치와 예서는 멀뚱히 서로를 바라보다 씩 웃었다. 그 흐릿한 미소에 후치는 예서 몰래 낮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실 오늘의 산책은 모주간 나이의 명이었다. “계손.... 에.... 그러니까 붓꽃?” “하하.” 더듬거리며 정정하는 후치를 보며 예서는 웃었다. 후치는 마디가 굵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긁적긁적 긁었다. “흠흠. 그러니까 붓꽃은 산기슭 건조한 곳에서 잘 자라는 약초입니다. 피부병에 좋은 약초입니다.”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예서는 신기한 듯 이미 꽃이 져서 씨방 속에 열매를 품은 붓꽃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마나힘.” 힌두아의 부름이다. 예서가 고개만 살짝 돌려 쳐다보니, 20대 중후반의 여인이 힌두아 뒤에 다소곳이 서 있었다. 예서가 허리를 펴고 몸을 돌이키자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추었다. 검붉은 빛의 피부가 고운 여인은 화려한 미인은 아니었으나, 기품 있고 아담한 여인이었다. 몸에 걸친 미미한 채색의 옷은 더욱 여인을 세속과는 거리가 먼 여인처럼 보이게 했다. “작은 마나힘. 담아라하옵니다.” “안녕하세요. 예서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담아를 향해 엉겁결에 같이 고개를 숙이며 예서는 인사를 했다. 부끄러워하는 예서를 향해 담아는 차분하게 웃으면서 다시금 예를 갖췄다. 여자라서 그런가. 자신보다 나이가 꽤 많은 담아의 공손한 예에 예서는 상당히 머쓱했다. 그 리고 담아는 그런 예서를 유하게 쳐다보았다. 익히 소문으로만 듣다 직접 접하게 된 예서가 의외로 허술한 구석이 많고 순수하고 소박해 보인다는 점이 담아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담아는 친정에 있는 덤벙대기 잘하고 사람 좋고 속 좋은 어린 남동생이 생각났다. “당분간 신세를 지게 되어 어른들께 인사를 여쭙고 있습니다.” 그리고 담아 또한 예서가 이제껏 여기서 보아왔던 여타 다른 여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세속을 초월한 듯한, 고고함이 우러나는 소위 귀족가의 여식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깨끗한 입성에 비해 낡아 보이는 차림새가 그다지 넉넉한 집안의 사람이 아닌 게 확연하게 보였다. “그저 머물다 가는 객입니다. 큰 어르신의 너그러운 아량으로 잠시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신경 쓰시게 하지는 않을 터이니 편안하게 대해 주시면 감사하겠나이다.” 고개를 숙이는 여인을 따라 예서는 쑥스러운 고개를 숙였다. 부스럭. “피곤하지 않아?” 건장한 차빈의 팔이 예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나 침상에 앉아 있던 예서가 그런 차빈을 아랑곳하지 않자, 예서의 뒤에 누워서 예서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차빈이 곧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 예서를 품에 안곤 예서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안 졸려?” 차빈의 목소리는 잠에 취해 갈라져 있었다. 눈도 뜨지 못한 차빈은 그대로 예서를 끌어당겼고, 예서는 순순히 차빈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예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차빈은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예서는 쉬이 잠들 수 없었다. “.............” 꿈이 이상했다. 무수한 색깔들이 어지럽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가죽은 단 한 번에 벗겨졌다. 그리 쉽게 벗겨질 줄 예서는 상상도 못했다. 마힌은 익숙한 솜씨로 배를 갈라 내장을 발라내고 토막을 내어 나뭇가지에 끼우고 진한 향의 허브와 함께 소금 주머니에서 소금을 꺼내 그 위에 솔솔 뿌렸다. 고기를 꽨 나뭇가지를 모닥불 주위에 단단하게 세우고 그 주위에 작은 돌 몇 개를 고이기까지 하는 게 상당히 익숙한 솜씨였다. 그것은 뱀이었다. 늦은 오후, 본성으로 가던 일행은 야영을 위해 가던 길을 멈추었다. 일행은 예서가 본가로 가던, 그 조촐한 동행이 아니었다. 부친의 두 번째 반려인 모아나와 함께 하는 길이라 무장한 수행원들과 마차가 딸려있었다. 예서와 모아나는 마차를 탔다. 그리고 간만에 나온 김에 사냥이라도 하겠다고 숲으로 들어갔던 차빈, 힌두아, 마힌의 손에 들려온 것은 살아 꿈틀거리는 뱀이었다. 웬만한 장정의 키는 훌쩍 넘는 길이였다. 머리와 꼬리를 단단히 잡고 예서에게 뱀을 내미는 득의양양한 힌두아를 보며 예서는 할 말을 잃었다. 뱀은 의외로 서늘하고 매끈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담백해서 작은 마나힘 입맛에 맞으실 겁니다. 많이 축나셨을 때는 이만한 것이 또 없습니다. 일부러 차빈님께서 잡아오신 거니, 다 드십시오.” ‘숲에 먹을 게 산인데, 대체 왜 하필 뱀이냐?!!’ 라는 불퉁한 표정의 예서가 자신의 말에 기함하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도 마힌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마힌의 얼굴은 그 어느 때와 다름없이 진지했다. 뭐, 항상 진지한 얼굴의 마힌이니 이 때라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이유가 없겠지만, 예서는 자신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일과 마힌의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은 말에 질린 표정으로 마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힌은 진심으로 다 먹일 생각이었다. 사내란 자고로 주는 대로 아무거나 우쩍우쩍 씹어 먹어야지 힘을 쓴다. 칼 한 번 쥐어본 적 없는 손하며, 근육 하나 없이 미끈하기 만한 몸하며, 한마디로 쓸데가 하나 없다. 앞으로 칼도 가르칠 거고, 탄탄한 남자로 만들 거다. 아니, 먼저 말(馬)부터 가르쳐야 하나. 어차피 이젠 마힌 자신의 주인이니, 멋진 놈이길 바라는 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출출하던 차였는데, 저녁 식사 전에 간단한 요기로 딱 좋겠네요.” 어느 새 다가온 모아나는 굽고 있는 뱀을 들여다보며 자주 있는 일이라도 되는 양 여상하게 말을 내었다. 예서와 마힌은 일어서서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런 둘을 보며 모아나는 미소를 지었다. 모아나의 모든 미소 속에는 항상 넉넉함이 있었다. 세월이 만들어 낸 어른의 미소였다. “작은 마나힘.” 그리고 곧 마힌은 뱀 한 토막을 나뭇가지 채로 예서에게 쑥 내밀었다. 고기 토막은 특유의 누린내와 함께 뱀 자체에서 나온 기름으로 윤기가 흘러서, 그래서 조금은 먹음직하게도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하.하.하. 저는 그다지 출출하지 않아서요. 지금 전혀 배고프지 않습니다. 그럼은요.” ‘구해주세요. 제발!! 저딴 거 절대 먹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부르짖는 절박한 표정의 예서는 모아나를 향해 그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자연스레 웃으려 노력했다. 예서가 눈이 휙 뒤집힐 정도로 석 달 열흘 굶은 것도 아니고, 시퍼렇게 눈을 부라리던 뱀을 잡아먹고 꿈자리가 성할 리 절대 없지 않겠는가. “드셔보세요. 작은 마나힘. 차빈님께서 일부러 잡아오신 거라지 않습니까. 많이 기대하실 텐데요.” “...............” 순진한 얼굴로 함박 웃으며 모아나는 말했고 일행은 예서의 그 일그러진 미소에 웃음을 삼켰다. “우욱.” “괜찮은가.” “......아픕니다.” “아. 그렇군.” 얼마나 힘차게 두들기는지 나오던 것도 고스란히 제자리로 들어갈 지경이었다. 예서는 머리까지 울렸다. 차빈은 이번에는 부드럽게 예서의 등을 문질러주었다. 그러자 예서의 울렁거리던 것이 다소 가라앉았다. 그러나 올리지만 않았을 뿐, 아직도 목 언저리는 울컥거렸다. 그것이 더 기분 나쁘다. 나올 듯 나오지 않는 토기만큼 성가시고 기분 더러운 것은 없으니까. 예서는 큰 숨을 들이 삼켰다. “괜찮은....... 우욱.” 예서는 몸을 돌려 차빈을 향해 이젠 괜찮다고, 그만 두드려도 된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서는 차빈에게서 나는 순간 코로 훅 끼치는 뱀고기 냄새로 인해 목에서 멈춰있던 토기가 바로 올라왔다. “멀미를 심하게도 하는군.” 예서의 등을 문지르며 차빈은 혀를 찼지만 기분은 썩 괜찮았다. 아니, 사실 생각은 고사하고 단 한 번도 남을 돌본 적이 없는 차빈이었던지라, 자신의 손길에 속을 올리는 예서를 보는 것만도 즐거웠다. 무언가 새로운 걸 배운 기분이었다. “우욱.” ‘그게 다 너 때문이잖습니까?!! 억지로 넘기고 있는 사람 코앞에 뱀 껍질을 디밀기는 왜 디미냐고요?!! 우웩!!!’ 예서는 속으로 꿍얼대며, 자신의 입안에서 맴도는 뱀고기 냄새로 인해 다시금 올려야만 했다. 호수는 그대로였다.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물결도, 부드러운 바람도, 그 바람결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잎사귀도, 인기척 하나 없는 고즈넉한 분위기도, 모두 그대로였다. 예서가 기억하는 그대로 말이다. 예서는 물결 따라 흔들거리는 배에 올랐다. 예서가 없는 동안 가노들이 잘 관리한 듯, 배는 깨끗했다. 예서는 천천히 노를 저었고, 호수의 산들바람은 변함없이 그런 예서를 기분 좋게 맞아주었다. “..............” “.....................” 예서가 물뱀의 주위를 맴돌아도 물뱀은 지그시 눈만 감고 있을 뿐, 그 어떤 기척도 내지 않았다. 예서는 그런 물뱀을 싱긋 웃으며 내려다보았다. 분명 물뱀은 자고 있지 않다. “비켜!!! 어떤 놈이 감히 나의 단잠을 방해하는 거야?!!! 햇빛 가리지마!!!” 역시나 그 급한 성격이 어딜 갈까. 물뱀은 예서가 자신의 주위를 채 열 바퀴도 돌기 전에 소리를 고래고래 내질렀다. 그 앙칼진 목소리로 보건대 앙금이 상당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깐일 것이다. 물뱀의 감긴 눈꺼풀이 바르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예서 왔습니다.” 예서는 그런 물뱀을 내려다보며 다시금 씩 웃었다. “예서가 누구야?!! 난 그 딴 놈 몰라!! 저리 가!!” “................” “...........” “저 가요?” “...........” “진짜 가요?” “...........” “정말 갑니다?” 예서가 한 마디 할 때마다 물뱀의 눈꺼풀 속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예서는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감정이 솔직한 물뱀이다. 바로 반응이 올 거다. “가긴 어딜 가!!!!” 역시나 예서의 마지막 한 마디에 물뱀이 드디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예서를 매섭게 노려보며 속사포처럼 예서를 향해 퍼부었다. “돌은 놈이 그렇게 좋았어?!! 돌은 놈이 나보다 더 좋은 거지?!! 여기 생각은 하나도 나지 않았지?!! 혼례의식을 치르고 신방을 차리고 나니까 돌은 놈만 보였지?!!” “........그런 거 아니에요.” 예서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눈앞이 아찔하니 깜깜하다. 노를 잡고 있던 예서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거짓말 마!! 인간들은 혼례만 올리고 나면 그저 그 생각만 하고 산다고 하던데?!! 너도 그렇지?!!” “.........아니에요.” “흥!! 그래도 너무 편한 것만은 아니었나 보네. 얼굴은 왜 그렇게 반쪽이 되어서 왔어?!! 아니, 너무 해댄 것 아니야?!!” “...............” “내 말이 맞지?!! 왜 대답이 없어!! 아주 온몸에 덕지덕지 발라서 왔구만. 이거~ 누군 짝이 없어 몸서리치게 서럽구만!!” “그런 거 아닙니다!!” 예서의 먹먹한 가슴은 큰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숨을 몰아 쉬야할 만큼 가슴이 답답하다. 그러나 악을 쓰듯 외치는 예서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실 차빈은 예서를 시도 때도 없이 안았다. 옆에 누가 있든지 없던지 때가 언제인지 상관하지 않았다. 그렇게 차빈은 아무 거리낌도 없었다. 훑는 듯한, 끈적거리는 시선이 느껴지면 거의 대부분 덮쳐지기 일쑤였다. 자신의 욕망을 차빈은 항상 스스럼없이 드러냈고, 오는 길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옆에 누군가가 있으면 손짓하나로 물리면 그뿐이었다. 심지어 마힌과 힌두아를 물리고 약초정원에서 그것도 한낮에 예서를 안기도 했다. 그 때 느꼈던 예서의 수치심을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골반이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은 느낌은 차라리 양호했다. 밑이 벌어져 내장이 쏟아져 나오는 듯한, 끔찍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침상노예라고 하던가. 자신과 그들과 과연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하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상기시키는 물뱀의 말에 예서는 울컥하는 눈물을 참기 위해 눈을 깜박거려야만 했다. 그러나 곧 멀뚱히 뒤룩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물뱀을 향해 떨리는 입술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씩 웃었다. 물뱀한테 지금의 자신의 처지를 들키고 싶지 않다. 그런 예서의 모습에 머쓱해진 물뱀은 헛기침만을 했다. “흠흠. 그럼 왜 지금 오는 건데?”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립고 보고 싶었다니까요.” 상황을 모면하려고, 그리고 조금의 진심을 담아 물뱀을 놀린 말에 예서는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자신의 팔을 득득 긁었다. 말은 부메랑이었다. 물뱀은 예서의 말에 놀라 사래가 들렸는지 정신없이 기침을 해댔다. “우웩! 이건 진짜 아무나 하는 말이 아니다. 소름이 쫙쫙 끼치는 것이. 으~. 싫다.” “켁켁켁. 케엑~!!! 진짜 꺼져 버려!!” “배내옷입니다.” “...........” “예쁘지요?” 모아나는 손바닥 만한 작은 옷을 예서에게 보이며 환히 웃었다. 이번 달에도 여전히 맥이에서는 커다란 장이 열렸고 그 장에 예서는 모아나를 따라 나섰다. 사제복의 외의(外依)를 걸친 예서와 평범한 범부(凡婦)의 차림인 모아나는 장터를 천천히 걸었다. 어차피 성에 필요한 물품 구입은 가신들의 몫이다. 가신들이 물품을 구입하는 동안 모아나는 예서를 이리저리 데리고 돌아다녔다. 소박한 것을 좋아하는 대갓집 마님이었다. “네. 모아나님.” 예서의 대답에 정신없이 옷들을 들여다보던 모아나는 고개를 들어 예서가 자신의 짧은 질문 속에 담긴 자신의 감정을 읽는 것을 보며 예서를 향해 지그시 미소 지었다. 단정한 모아나의 미소가 오늘은 조금 쓸쓸해 보였다. 모아나는 미련이 남는다는 듯 손에 들고 있던 갓난아이 배내옷을 만지작거렸다. “엄마가 된다는 건 어떤 걸까요.” 모아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반려가 셋이었건만 차빈 큰 어르신의 자제는 고작 둘뿐이지요. 작은 마나힘의 반려 되시는 차빈님과 지금은 돌아가신 세 번째 반려의 따님이신 몽아님뿐이십니다. 작년, 몽아님은 추수기가 열두 번 지나자마자 출가를 하셨습니다.” “...............” “작은 마나힘. 저는 추수기를 스물두 번 지나자마자 차빈 큰 어르신께 시집을 왔답니다. 추수기를 스물세 번 모셨건만, 자식 하나 낳아 드리지 못했습니다. 헛혼으로라도 자식을 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권해 드렸지요.” 모아나는 예서를 보며 담담하고 평온하게 웃었다. “귀족이나 황가의 남자들은 성인식 직후 대부분 신탁을 받지요. 그 신탁을 통해 반려를 맞아들이는데, 어린 경우 심하면 뱃속에 있기도 하답니다. 혼례의식은 말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평생의 한 번, 그 때뿐입니다. 한 번이지요. 평생에 말입니다.” 햇살 아래에서 모아나는 예서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는 배내옷을 샀다. 주인을 불러 셈을 하는 모아나는 꽤나 즐거워 보였다. “이번에 태어날 아이에게 주려고 합니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겠지만, 튼튼한 사내아이였으면 좋겠습니다. 어린 차빈님께 좋은 말동무가 되게 말입니다.” “모아나님의 사랑은요? 행복은요?” 예서 자신이 외람되게 참견한 일이 아니지만 묻고 싶었다. 여인들의 삶이, 그들의 처지가 슬펐다. 반려는 나만의 것일 때 가장 충만함을 느끼지 않을까. 예서 자신은 그랬다. 자신의 여자친구가 딴 놈하고 친구하는 것도 싫었다. 이런 게 남자만의 본능일까. 여자는 아닌가. “.................” “.........................” “그럼요. 이걸 보세요. 그 분이 저에게 주신 징표입니다. 첫날밤에 주신 거랍니다.” 모아나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목에 걸고 있던 둥그런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낡은 가죽 끈에 달린 소박한 목걸이였다. 차빈가의 정식 반려가 하기에는 조금은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제가 달라고 했답니다.” 이른 봄볕 같은 온화한 미소가 모아나의 입가에 있었다. 낯선 골목이다. 정신없이 뛰는 꼬마를 따라와 보니 모든 것이 생소했다. 꼬마를 찾아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 어느 곳에서도 녀석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 때였다. “윽. 아파!” 자신의 어깨를 움켜잡는 강한 손에 뒤가 돌려진 예서는 잔뜩 화가나 있는 차빈을 볼 수 있었다. “무슨 짓이냐?!” “모아나님의 목걸이요.” “뭐?!” “반드시 찾아야 해요.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아주 요절을 내줄 겁니다.” 차빈의 역정에도 굴하지 않고 예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조금 전, 그러니까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면서 모아나가 목에서 목걸이를 빼 예서에게 보여주려는 순간, 어떤 다람쥐 같은 놈이 잽싸게 모아나의 손에서 목걸이 채갔다. “이곳은 이방신의 거리다.” 그리고 그런 예서를 묵묵히 내려다보던 차빈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빈도 예서가 말하는 모아나의 목걸이라면 하나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거다. 차빈은 예서를 바짝 끌어당기며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천민가(賤民街)지.” 예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빈이 이끄는 대로 그 옆에 나란히 섰다. 낯설었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나. 이곳에 온 이후, 단 한 번도 본적도 없는 커다란 가죽 천막에, 좁고 오물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진흙탕 길에, 그 위를 맨발로 뛰는 아이들과 거침없이 다니는 어른들. 그 누구의 발에도 신발은 없었다. 예서는 자신의 발이 부끄러웠고, 자신의 깨끗한 입성을 숨기고 싶었다. 그리고 곱실거리는 짧은 머리카락, 검붉은 회색빛의 피부는 버석거렸다. 더럽고 나달나달한 천막 앞, 화덕도 아닌 그저 돌 몇 개를 괴고 불을 지펴 낡은 토기에다 멀건 국을 끓이는 여인의 눈에는 누런 눈곱이 껴 있었고, 고기 몇 점이 여인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 때문에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천민들이다. 눈을 마주치지 말고 천천히 걷도록.” 입술만을 달싹거리며 차빈은 예서의 귀에 나지막이 말했고, 예서는 사제복 외의(外依) 옷깃을 단단하게 여미었다. 이질적인 자신의 외모가 예서는 처음으로 껄끄러웠다. 그런데 그 때, 또 다른 낡은 천막 앞에 쪼그리고 앉은 온몸에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가득한 여인이 예서를 향해 손짓했다. 여인은 지금 당장이라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것 같은 메마르고 생기 없는 모습이었다. 예서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여인은 더욱 크게 손짓을 하며 심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예서를 불렀다. 늙은 여인의 이마에는 피처럼 붉은 인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여인의 애타는 부름에 끝내 예서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멈췄다. 그래도 차마 시선이 가지는 않았다. 그런 예서를 의아하게 보며 주위를 힐끔 둘러보다 늙은 여인을 발견한 차빈은 낮게 혀를 찼다. 늙은 여인은 차빈을 향해 이빨이 없는 입을 크게 벌려 소리 없이 웃었다. “이리와라.” 쇠를 긁는 듯한,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는 낮고 작았다. 그러나 예서의 귀에는 또렷하게 들렸다. 차빈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주춤거리는 예서를 여인 앞으로 끌고 갔다. 여인은 다가온 예서에게 자신의 두 손을 내밀었다. 난감하게 그 손을 내려다보는 예서 앞에 여인은 더욱 바짝 자신의 손을 들이밀었다. 여인의 손은 가죽뿐이었다. 마치 몸에 맞지 않은 낡은 가죽을 뒤집어 쓴 것 같은 주름진 피부가 뚝 불러진 손 마디마디를 덮고 있었다. 더러운 손이었다. 갈라지고 누렇게 변한 손톱 밑에 시꺼먼 때들이 꼬질꼬질 자리 잡고 있었고, 손끝은 긴 세월의 험한 노동으로 툭하니 불거져 있었다. 예서는 마지못해 늙은 여인의 두 손을 받들었다. 그래도 온기는 있었다. 죽은 자처럼 검회색의 거칠고 메마른 피부에도 따스한 온기가 말이다. 그리고 여인은 예서에게 재촉하듯이 다시금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늙은 여인은 무언가를 원하는 듯싶으나 예서로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처음 만난 사람으로서 예는 표해야 할 듯싶었고, 그렇게 생각하자 어찌 된 건지 그걸 원하는 듯싶기도 했다. 그러나 차마 입으로는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악수는 언감생심이다. 그래서 예서는 자신의 이마에 여인의 손등을 대었다. 조심스레 고개를 드니 여인의 눈이 온화하게 예서를 보며 웃고 있었다. 여인은 두어 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예서의 머리에 손을 얹고 쓰다듬었다. 작게 읊조리는 것은 아마도 축문인 듯싶었다. 잠시 후, 여인은 예서와 차빈을 손짓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을 주시하며 숨죽이던 마을에 숨이 돌아왔다. 활기찬 웃음이 거리에 넘쳤다. 마치 딴 거리 같았다. 회색빛 거리에 색깔이 입혀졌다. “그대가 방금 한 일이 무슨 일인지 그대는 모르겠지.” 차빈은 기분 좋은 듯 예서의 머리를 안고 입을 맞추었다. “이방신의 여사제다. 아마도 당분간 이곳에서는 지금 일을 가지고 꽤나 즐거워들 할거다. 이방의 사제가 자신들의 여 사제에게 공경의 예를 표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축문도 받고.” 차빈은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잘했다. 마나힘.” “저희 어머니께서 흘린 것을 찾다가 멀리서 이 소년이 줍는 것을 보고 따라 왔습니다.” 사제복을 입은 예서를 경계하며 사람들은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섰다. 그건 아이의 양팔을 잡고 있는 사람들도 매한가지였다. 예서는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훔친 게 아니라고?” 걸걸한 목소리에, 커다란 배에, 몸집이 큰 사내가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남자는 번질거리는 이마의 땀을 목에 두르고 있는 낡고 시커먼 천으로 훔쳤다. 몸집도 몸집이거니와 걸걸하고 커다란 목소리가 꽤나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사제.” “네?!” 우연찮게 어른들에게 맞으며 끌려가는 소년을 보자마자, 예서는 무작정 따라가 그들의 앞을 다급히 막아섰고, 그들의 손에는 모아나의 목걸이가 있었다. “이건 알고 있소? 이 거리에서는 거짓말하는 사람의 혀를 잘라 낸다는 걸 말이요. 그게 여기의 법이요. 도적질한 자는 손을 자르고 거짓말한자는 혀를 자르고 간음한 자는 목을 치고. 보아하니 제국 본토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혀를 잘라낸다는 말을 하며 눈을 희번덕 부라리는 우람한 사내의 시선 앞에서 예서는 순간 움찔거렸다. 그러나 곧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애쓰며, 마른 침을 꿀떡 삼켰다. 허리를 곧게 펴고 예서는 천천히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끝까지 우긴다. “저희 어머니 목걸이가 맞습니다. 첫날밤에 아.... 아버지한테서 받은 목걸이입니다.” 그리고 숨을 몰아쉬며 콧구멍이 벌름거릴 정도로 바짝 긴장하고 있는 예서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던 남자는 피식 웃었다. “차빈님. 잘 오셨습니다.” “간만이다. 호룸.” “이젠 이거 놔!!” 자신을 잡고 있는 사람들의 손을 쳐내며 소년은 모든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예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년은 어이없어 하는 사람들의 눈초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가는 줘요. 주워 줬잖아요. 금화 한 닢이면 돼요.” “..............;;;” “그런데 이 자식이 감히 누구한테 건방이냐, 건방이!!!” “아야!!! 왜 때려요?!!” “살려주신 걸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감히 누구한테 그 더러운 주둥이를 나불거려 나불거리긴?!!!” 가마솥의 뚜껑을 연상시키는 시꺼멓고 두툼한 손을 들어 소년의 등을 힘껏 후려치며 호룸은 으르렁거렸다. 그예 눈을 홉떠 호룸을 노려보던 소년은 이내 눈을 내리깔고 등을 움찔거리며 입을 실룩거렸다. “씹할, 이거 진짜 아프네?” 퍽!!! “아프라고 때렸다!!” “하지 마!! 내가 개 새끼야?!! 왜 자꾸 때려?!!! 이 쌍!!” 소년의 거친 욕지기에 한 손으로 소년의 뒷덜미를 들어 탈탈 털던 호룸은 이내 소년을 멀찌감치 집어 던지며 손을 털고 돌아섰다. 그리고 차빈에게 고개를 깊숙하게 숙였다. “경하 드리옵니다.” “아악!!! 두고 보자!!! 호룸!!!”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 꺼져!! 나야말로다!! 너 나중에 두고 보자!” 바닥에 주저앉아 시뻘게진 얼굴로 소년은 악을 썼다. “하하. 그래.” “꺼져!!!” 차빈에게 인사하느라, 예서를 향해 헤벌쭉 웃느라, 소년에게 읍박지르랴, 호룸은 바빴다. “베!!!” 곧 소년은 벌떡 일어나 일부러 인 듯 먼지를 풀풀 날리며 탈탈 턴 후, 혀를 길게 빼물고는 쏜살같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다. “허허허.” 호룸은 허리에 손을 얹고 그 모습을 보며 호탕하게 웃어 재꼈다. 그리고 예서와 차빈, 두 사람을 향해 씩 웃었다. “마나힘 잘 봐라. 이들은 가노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다.” 앞장서 성큼 걷는 호룸의 뒤를 따르며, 차빈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이들에게 천민이라 이름 붙인 건 우리다. 허나, 이들은 자신들을 누구인지 알거든. 강제로 끌려왔다 해도 자신들의 조상들이 누구였음을 잊지 않고 사는 자들이다. 종족에 대한 자긍심, 신에 대한 열망, 높은 규율, 자유에 대한 의지. 비록 우리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때론 우리 손에 목숨을 내어맡기고는 있지만 이들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다. 그래서 흥미 있는 존재들이지.” 차빈에게서 들은 말의 의미를 되새기는 듯, 예서는 차분한 시선을 들어 차빈을 바라보았다. 그런 예서에게 차빈은 부드럽게 웃었다. 마음이 통한다는 게, 혹 이런 건가. 말하고, 듣고, 이런 것이 이렇게 설레는 건가. “이게 이들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칼로 다스려야 하는 자들도 있지만, 이들처럼 버려둠으로 다스려지는 자들도 있다. 마나힘. 그대는 배워야할 게 너무 많다. 내가 피를 흘릴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그러니 그대는 누구보다도, 그 어느 때라도 나를 믿어야 한다.” 지독히도 진지한 눈이 예서를 가득 담고 있었다. 커다란 침상 위에서 육중한 몸집의 남자가 아직 채 여물지 않은 어린 소녀 위에서 짐승 같은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아이는 많아야 고작 열셋이나 열넷 쯤 되어 보였다. “아악!!!” 남자는 끈적이는 기름 덩어리 같은 두껍고 털이 수북한 손으로 아직 채 자라지 않은 가슴을 있는 힘껏 움켜주었다. 마치 어린 가슴을 터뜨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가슴을 움켜쥔 남자 때문에 어린 소녀의 입에서 새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녀는 남자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서 뜯어내려고 용을 쓰나, 남자는 우습다는 듯 비릿한 웃음을 지을 뿐 손아귀의 힘을 풀지 않았다. 남자는 그렇게 아이의 비명소리를 한껏 즐겼다. 조금 전, 두려움과 고통에 떠는 아이를, 벌거벗은 등을 한껏 웅크리고 있는 아이를, 나누는 인정사정없이 밑구멍만 필요하다는 듯 아이의 다리를 활짝 벌리고 비열하게 들여다보다 급히 뚫고 들어와 단숨에 유린했다. 아이는 그저 병든 아비의 약값이 조금 필요했을 뿐이었고, 굶주려 우는 동생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악!!!! 엄마. 엄마!!” 고통으로 다물어지지 않는 아이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침이 흘렀고, 남자의 육중한 몸에서는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잠시 후, 남자는 짐승의 단말마 같은 신음을 끝으로 몸을 떨었다. 그리고 곧 아이에게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남자가 일어나 침상에 앉자마자 남자의 정사 내내 침상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가노가 남자의 분신에서 정액과 피를 닦아내었다. 이 남자가 오(五) 황자 나누다. “괜찮으셨습니까?” “좋아.” 며칠 전에 비하면 오늘은 상당히 만족스럽다. 그 때는 밑구멍에 넣어보기도 전에 쿨룩 쏟아놓지 않았던가. 그래도 이번에는 꽤나 오래 있었다. 한 열 댓 번쯤은 움직였나. 어쨌든 그래도 맛은 보았다. “저희가 드리는 것은 항상 최상품입니다. 전하.” 침상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 나누의 정사를 지켜보던 아후가 한발 앞으로 나왔다. 고개는 여전히 공손하게 숙이고 있었다. “맛이 쫀쫀해서 괜찮았다.” 나누는 커다란 반지를 낀 손으로 피와 정액으로 흠뻑 젖은 아이의 몸 깊숙한 곳에 손목까지 집어넣고 휘저으며 야비하게 웃었다. 고통으로 오줌을 지리는 아이에게서 폐부를 찢어내는 듯한,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침상에는 이제 땀과 정액 그리고 피비린내와 지린내가 진동했다. 나누는 그 소리를 듣는 것이 즐겁다는 듯 웃었다. 나누는 곧 아이의 속에서 손을 빼내었다. 그리고 잠시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다 아이의 입에다 넣고 휘저었다. 아이는 토기가 올라오는지 괴로운 소리를 내었다. 나누가 아이의 입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자 그 손을 가노들이 재빠르게 달려들어 닦았다. 나누는 커다란 검은 개를 데리고 서 있는 건장한 가노 둘에게 손짓을 했다. 가노들은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고 개를 데리고 다가왔다. 나누는 육중한 나신 그대로 거침없이 일어나 침상 옆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재미있는 장난감을 보듯이 침상을 바라보았다. 가노들은 침상에 너부러진 아이의 다리를 높이 들고 자신들의 주인이 좀 더 자세하고 편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각각 아이의 마른 다리를 하나씩 잡아 벌리며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검은 개가 알아서 아이의 국부를 핥기 시작했다. 곧 방안은 온통 개가 내는 젖은 소리로 가득 찼다. 개는 아이의 국부 깊숙이까지 혀를 집어넣었고, 아이의 입에서 자지러지는 비명소리가 다시금 흘러넘쳤다. 아이는 끊임없이 개를 피하고자 몸을 들썩거렸다. “재미있지 않나.” 손에 턱을 괴고 나누는 흥미롭다는 듯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는 나누의 남근이 힘을 받기 시작하자, 가노 중 하나가 그런 나누의 검붉은 남근을 거침없이 입에 물었고, 나누는 눈을 감고 그 감각을 즐겼다. “젊은 마나힘이다.” 나누는 으르렁거리는 늙은 짐승과도 같은 신음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원하시는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지 가져다 드려야지요.” “한 번 본적이 있지. 늙은 호랑이를 알현하려고 왔더군.” 눈을 감고 있는 검붉은 나누의 얼굴은 쾌락으로 번들거렸다. 그러나 탁한 신음소리와 함께 급작스럽게 찾아오는 배설로 인해 곧 그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노의 입에 털어내느라 몸을 부르르 떨던 나누는 곧 털썩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예. 그 날 저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마나힘은 그 어떤 경우에도, 설혹 자식이 없다 하더라도 취하실 수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아후는 속을 알 수 없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나누에게 속삭였다. 아후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 야비한 웃음을 흘리며 나누는 입을 열었다. 모르는 바도 아니다. “이것을 작은 마나힘에게 넣으면 어떤 얼굴을 할까. 얼굴은 꽤나 담백하고 단정한 인상이었는데 말이야.” 나누는 축 쳐진 자신의 남근을 빠는 가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머지 한 손으로 비정상적인 남근모형을 들고 이리저리 음미하듯 훑었다. 보통 사람의 한 배 반은 더 됨직한 크기와 굵기의 발기한 남근모형은 철 구슬이 여러 개 박혀 있어 끔찍하리만큼 무시무시한 모양이었다. “눈이 깊고 맑더군요. 그렇듯 하얗다 못해 파란 흰자위는 처음 보았습니다.” “그래?” 아후가 대답했다는 것이 의외라는 듯 나누는 흘끗 아후를 보며 되물었다. 그런 나누에게 아후는 지그시 머리를 조아렸다. “예. 탐나는 물건이긴 하지요.” “아후. 나는 말이다. 그 정갈한 얼굴로 어떻게 했기에, 항상 금욕적인 얼굴로 나를 벌레 보듯 하는 놈의 흔적을 잔뜩 묻히고 있는지, 어떤 몸이기에 그 놈이 정신을 못 차리는 걸까. 그 얼굴이 음란하게 변하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 맛이 어떤지 심히 궁금하다.” 나누는 강박적으로 성에 대해 집착했다. 그러나 그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나누는 본인 자신의 의지로 사정을 조절한 적이 없으니까. 삽입하자마자 배설하거나, 아니면 넣어보지도 못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삽입해도 기껏해야 대여섯 번이나 허리를 흔들까. 아후를 만나기전까지 나누는 지옥에서 살았다. “불공평하지 않나. 그런 최상품을 혼자만 누린다는 건 말이야.” “차빈가의 마나힘입니다.” “나도 안다.” “헛혼도 안 되는 차빈가의 마나힘입니다.” “그래서?” “더군다나 황가의 씨는 일반에 함부로 내리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차빈을 일반이라고 하면 안 되지. 황가의 일가다. 아니 그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나누는 아후를 쳐다보았다. 아후가 하나의 문제를 놓고 이렇듯 오래 시간을 끄는 것은 그 문제의 해답이 가지고 있다는 뜻임을 몇 년간의 경험으로 익히 잘 알고 있는 나누였기에 나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야비함과 비열함이 묻어나는 미소였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나누 전하.” 아후는 그런 나누를 보며 여유만만하고 나긋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나누는 천천히 그리고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겠다는 신호다. “버리시지요. 나누 전하의 작은 걸 하나 버림으로 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버리므로 얻는 거지요.” “무섭군. 내 목숨인가.” “설마 하니, 그런 큰 것이겠나이까. 아주 작은 것입니다.” 아후는 나른하게 그러나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리고 세상 모든 것에는 대가라는 게 있게 마련이지요. 마나힘을 얻기 위해 나누 전하가 작은 것을 버리듯이 저 또한 목숨을 거는 일에 얻는 게 있어야 마땅한 이치겠지요.” “어떤 것이냐?” “차빈 본성 정도는 받아야겠습니다.” “네 놈이 드디어 간이 부었구나.” 나누는 커다란 손으로 턱을 만지며 비열하게 웃었다. 그건 긍정의 뜻이었다. 차빈 본성을 받겠다는 아후의 소리는 나누에게 빼앗아 달라는 게 아니라 아후 자신의 힘으로 본성을 취할 때 나누는 그저 가만히 눈감고 있어달라는 묵인의 청인 것이다. 아후가 나누를 정면으로 내세우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고작 계집을 대는 상단에게 자신의 목줄을 내어줄 자 있겠는가. 이 또한 아후도 잘 아는 사실이다. “글쎄요?” 아후가 차빈가의 마나힘을 핑계로 무언가 거하게 벌린 모양임을 어림짐작한 나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누 자신은 그저 앉아서 개가 물어온 고기만 먹으면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일절 손해가 없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놈의 눈앞에서 마나힘을 취하겠다. 그 거만한 자존심이 과연 어떤 얼굴로 바뀔지 자못 궁금하군. 할 수 있겠나? 마나힘이다. 반려가 죽었다 해도 받을 수 없는 존재다. 그 놈과 그 놈의 마나힘, 그리고 나의 안전까지. 본성이면 그 정도 값은 된다고 보는데.” 나누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아후를 쳐다보았다. “저는 차빈의 본성을, 전하는 마나힘을 받으시는 겁니다. 물론, 작은 걸 대가로 말입니다.” “그나저나 나머지 하나는?” “이 쪽으로 오시지요.” 나누는 남근모형으로 다른 손바닥을 툭툭 치며 천천히 아후를 따라 갔다. 욕실이었다. 욕실에는 열여덟 정도의 곱고 풍만한 여자가 나신으로 무릎을 꿇고, 커다란 욕조 옆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이번 것도 충분히 만족하실 겁니다.” 또 한 가지, 나누는 풍만하게 무르익은 여인의 젖가슴은 빨아도 결코 그 안에 자신을 묻지 않았다. 여인의 속을 채우는 것은 언제나 나누가 가지고 있는 무수한 남근모형들이었다. 남근모형이 마치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양 나누는 그것들로 여인들을 탐했다. 아이는 기꺼워해도 나누는 여인은 두려워했다. 아니, 증오했다. 단 한번만으로도 자신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알아챌 여인들이 나누는 반가울리 없다. 그들을 멸시하며 학대를 하는 것으로 그 분을 푸는 나누는 더러운 가노들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순백의 아이 앞에서만이 그나마 사내구실을 했다. 이렇듯 아이의 맛을 알게 된 것은 약과 함께 항시 끊이지 않고 최상의 것들을 대령하는 아후의 도움이었다. “암염 광산이 멈추었습니다. 모주간 나리.” “무슨 소리냐?” “방금 광산이 멈추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어찌 차빈님의 허락 없이 멈출 수 있으며, 내가 그걸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는 결코 헛소문이나 뜬소문을 물고 들어오는 뜨내기가 아니다. 모주간 찬마밀이 십년이 넘게 믿고 데리고 있는 자다. 그런 자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말을 굽히지 않음에도, 그럼에도 모주간 찬마밀은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알았다. 나가 보거라. 자세한 사항은 내가 내일 사람을 보내 알아 볼 터이니.” “예. 모주간 나리.” 사내는 곧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휴우.” 눈을 감고 있는 모주간 찬마밀의 굵은 주름은 깊은 고뇌로 웃음과 빛을 잃고 슬픔으로 메말라 있었다. 모주간은 자신의 야윈 얼굴을 두 손으로 쓸었다. 찬마밀은 차빈을 보는 것조차 괴로워 병환을 핑계로 문안도 하지 않는 상태다. 차빈가의 가신으로 평생 이다지도 흔들리고, 고통스러웠던 적은 있었던가.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가장 자신을 닮은 아들이었다. 아직 젊어 세상과 타협하기보다는 꺾이기를 원하던 올곧던 생시의 모습으로 아들은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고 찬마밀 자신을 괴롭혔다. 우담궁 부모주로서 작은 마나힘을 옆에서 보필하게 된 것을 기뻐하던 생전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하아.” 깊은 탄식과 함께 찬마밀은 바짝 메마른 두 손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책상에 놓여있는 촛대의 촛불은 미약하게 들어오는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닫힌 방안 어디서 들어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이었다. 겨드랑이는 이미 오래전 차빈의 타액으로 흠뻑 젖었다. 혀에 감는 것이 여의치 않자 차빈은 이빨로 털을 잘근잘근 씹었다. 혀끝에 있는 예서의 잘려진 털을 보란 듯이 엄지손가락으로 훑으며 차빈은 씩 웃었다. 그런 차빈을 보지 않으려 예서는 아예 고개를 돌렸다. 차빈이 팔을 내리누르고 있어 꼼짝달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서는 고스란히 차빈이 하는 대로 당해야만 했다. 진정 힘뿐인 놈이다. 차빈의 미소가 짙어졌다. “윽!” 그리고 곧 차빈은 그런 예서의 겨드랑이에 코를 박고 웃었다. 간지러운 그 느낌이 주는 수치심에 예서는 얼굴을 붉혔다. 겨드랑이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목으로 천천히 혀를 미끄러뜨리는 그 행위가 꽤나 자극적이다. 차빈은 예서의 귓불을 혀로 핥다가 귓속 깊이까지 혀를 넣었다. 귀속에서 울리는 젖은 소리에 예서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하하. 부끄러워하지 마라. 그대의 그런 모습을 보면 짐승이 되는 느낌이다. 그대의 온몸을 자근자근 씹어 먹고 싶어진다고.” 예서에게 나지막이 귓속말을 하다 차빈은 마치 짐승 마냥 혀로 볼을 핥고 입술을 핥았다. “그럼, 핥지를 말던가. 으악!!!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강제로 눈을 뜨게 하고 흑요석 같은 예서의 검은 눈동자를 차빈은 꺼칠한 혀로 집요하게 핥았다. 자지러지는 예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올 때까지. “읍!! 읍!!!” 차빈은 예서의 코를 한 입 베어 물다 불쑥 콧속에 혀를 넣었다. 싫어서 고갯짓을 하는 예서를 보며 더욱 짓궂게 깊이 집어넣다 그대로 예서에게 입을 맞추었다. 차빈은 예서의 혀를 휘감아 빨며 뒤섞인 타액을 빨아들이기도 하고 때로는 예서에게 마시게도 했다. 손가락으로 굴리던 유두가 봉긋하게 성이 나기 시작하자 차빈은 이빨로 씹으며 더욱 즐거이 가지고 놀았다. 잘 익은 살굿빛의 고운 유두가 짙은 붉은 색을 띌 때까지, 예서의 입에서 그만 하라는 애원이 나올 때까지 차빈은 예서의 유두를 희롱했다. 한편, 차빈의 손은 가슴에서 옆구리로 그리고 그 아래로 부드럽게 내려왔고, 그 색기어린 손길에 예서의 얼굴이 다시금 활활 타올랐다. “으웩!!” 차빈은 아무 거리낌 없이 예서의 엄지발가락을 덥석 물고 빨았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예서로 하여금 지켜보게 했다. 그예 더럽다 질겁하며 발버둥 치던 예서도 그 진지하다면 진지한 모습에 잠시 멀뚱한 얼굴로 이게 정상적인 관계인건가를 헛갈려하며 자신을 내맡겼다. 그러나 차빈은 이내 그 덤덤한 표정을 지우고 소리 내어 웃었고 예서의 얼굴에는 온몸의 붉은 피가 잔뜩 몰려들었다. 차빈은 그런 예서의 발등에 입을 맞추다가 허벅지에 이를 박기도 하고, 복숭아 뼈를 빨다가 예서의 발바닥을 핥기도 했다. 차빈의 그런 행동에 얼굴을 붉히며 성을 내는 예서를 차빈은 갑자기 뒤집어 엉덩이를 물었다. 이상한 밤이었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그런 야릇한 밤이었다. 잘 웃지 않는 차빈이 소리 내어 웃고, 차빈에게 눈도 맞추기를 꺼려하는 예서가 차빈에게 화를 내기도 하는 그런 밤이었다. 반쯤 서 있는 예서의 페니스를 만지작거리며 차빈은 예서의 고환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그것을 혀로 굴리기도 하고 이빨로 살짝 살짝 긁기도 했다. 그러나 거칠어지는 호흡 속에서도 예서의 입에서는 좀처럼 신음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참고 있는 거다. “마나힘, 지금 나하고 해보겠다는 거냐?” “.....뭘요?” 잔뜩 억눌린 목소리를 목에서 밀어내며 예서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트집이라고 생각하나?” ‘어떻게 알았어?’ 라는 순진한 얼굴로 헐떡거리면 대체 어쩌자는 건지, 차빈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내려 애널로 향하는 길을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지압하듯이 혀끝을 세워 누르자, 그제야 예서의 입에서 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점점 뜨거워지는 자신이 두려워 예서는 몸을 틀며 거부했다. 그러나 차빈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예서의 비문이 차빈의 굵은 손가락 하나를 부드럽게 삼켰다. “........!!” 차빈이 그런 예서의 극점의 쳐올리자 예서의 허리가 튕기듯, 활시위같이 휘였다. 땀에 젖은, 그 탄력적이고 유려한 선이 아름답다. 건강한 싱싱함을 온몸에서 발사하는 예서의 몸은 이제 손가락 하나둘 정도는 쉬이 받아들인다. 야들한 뜨거움이 가득한 예서의 몸속으로 드나드는 자신의 손가락을 보는 차빈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청명한 냄새의 오일로 젖어있는 예서의 몸은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윽!!!” 산더미 만한 파도와도 같은 본능이 순식간에 차빈을 덮치자 차빈은 급하게 손가락을 빼내고는 예서의 몸에 자신을 묻었다. 고통스러운지 예서는 시트를 틀어쥐었다. 자신의 아래에서 몸부림을 치는 예서를 보는 것만으로 차빈은 갈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 예서의 몸을 꽉 채우고 잠시 가만히 멈춘 차빈은 예서의 상징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 손길에 헛숨을 삼키며 예서가 눈을 감고 숨을 고르고 있을 때, 귀두 끝이 아팠다. 그리고 예서가 눈을 떠서 보게 된 건 놀랍게도 차빈이 그 끝에 들꽃 하나를 꽂고 있는 모습이었다. 보라색 꽃은 조금 시들했다. “빼!!! 다... 당장!!! 윽!!!” 바르작거리며 일어나려는 예서를, 경악하며 꽃을 낚아채려는 예서의 손을 잡고, 차빈은 짓궂게 웃었다. “예쁘군. 한 번 해보고 싶었다.” 예서의 페니스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놀라 뻐끔거리는 예서를 보면서 차빈은 방긋이 웃었다. “하아. 하아. 미칠 거 같아.” 녹진하게 녹아버린 것 같은 뜨거운 예서의 뱃속은 움찔거리며 차빈을 빨아들이고 놓기를 반복했다. 더불어 부드럽고 느리던 것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으응~.” 그러나 차빈이 지금껏 건드리던 극점을 일부러 피하자 안달이 나는 듯 예서가 허리를 돌렸다. 예서는 자극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예서의 허리에 차빈은 아득해 졌다. “할..... 하아..... 것 같아.......” 발갛게 상기된 얼굴, 쾌감으로 풀어진 눈동자, 그런 자신에게 당황해 하며 울고 싶어 하는 듯 보이는 표정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차빈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차..... 빈.... 하아... 음.....” 예서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중심을 붙들었다. 단 한 번도 차빈과의 잠자리에서 보이지 않던 모습이었다. “내가 해 주마.” 갈라지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중심을 흔드는 예서의 손을 차빈이 잡았다. 차빈은 다른 날과 다른 예서를 자신의 힘만으로 보내주고 싶었다. 사내의 자존심이랄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차빈 자신도 지금 당장 예서의 안에 쏟아 붓고 싶은 욕망을 견디기가 버거웠지만, 차빈이 빨아주는 게 아니면 반응하지 않던 예서다. 그런 예서가 자신을 담고 욕망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거다. 차빈은 이를 악물고 예서의 극점을 향해 달렸다. 예서의 입에서는 곧 쏟아내지 못한 욕망으로 인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차빈의 눈앞에 아름다운 보라색 꽃이 춤을 추고 있었다. “하악!!” 그리고 그 순간 예서의 눈앞이 하얗게 변했고 그대로 숨이 멈춰졌다. 예서가 눈을 감았다 뜨니 방안이었다. 예서의 가슴에는 튀어 오른 정액과 꽃이 얌전히 놓여있었고, 차빈은 그런 예서의 가슴 위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잘했다.” 땀에 젖은 차빈의 머리카락들이 그의 상체에 달라붙어 있었다. 차빈은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예서의 눈동자가 좋았다. 체액으로 범벅을 한 예서만큼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것이다. “잠.... 깐!!” 차빈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예서는 그런 차빈으로 인해 몸을 굳히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쾌락에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예서는 차빈이 극점을 빠르게 쳐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헐떡거렸다. 온몸을 뒤덮는 자극은 예서 자신을 잊게 했다. “매달려라. 다른 데는 손대지 말고 내 몸에만 손을 대.” 짓궂은 차빈의 말이 예서의 귀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예서는 그저 차빈이 이끄는 대로 차빈을 끌어안았다. 차빈은 예서의 다리를 들어 자신의 허리를 감게 했다. 그리고 예서의 입에 깊이 입을 맞추며 예서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상한 밤이었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그런 야릇한 밤이었다. 잘 웃지 않는 차빈이 소리 내어 웃고, 차빈에게 눈도 맞추기를 꺼려하는 예서가 차빈에게 화를 내기도 하는 그런 밤이었다. 새벽하늘이 희뿌옇다.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던 차빈은 이내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허리가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묵직했다. 그리고 그런 차빈의 옆에는 기절한 듯 곤한 잠에 빠진 예서가 누워있었다. 차빈은 뒤에서 예서를 안고 있었고, 아직도 예서의 안이었다. 마지막 체위 그대로 두 사람은 딱 달라붙어 있었다. 차빈이 살짝 허리를 움직여도, 그 짓궂은 몸짓에도 예서는 움찔거릴 뿐, 곤한 잠을 이기지 못했다. 밤새 시달린 예서의 몸은 차빈과 마찬가지로 체액으로 범벅이다. 방안은 온통 땀 냄새와 정액 냄새, 그리고 후끈거리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차빈은 싫지 않았다. 남자를 미치게 하는 지독한 사향 냄새 같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차빈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 때였다. 밖에서 나는 인기척에 차빈은 떠지지 않는 눈을 떠야만 했다. 다급한 듯 인기척은 다시 한 번 더 차빈을 불렀다. “들어 와라.” 차빈은 예서의 팔에 입을 맞추고, 자신과 예서의 하체를 커다란 천으로 가렸다. “죄송합니다. 본가로부터 급한 연락입니다.” “뭔가?” 차빈은 시트 속, 흠뻑 젖은 예서의 중심을 손바닥으로 쓸며 예서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방안으로 들어온 가신 따위는 신경 쓰지도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다급한 일이니 속히 올라오시라는 전갈입니다. 시급을 다툰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일이신지는 말씀하시지는 않으셨고?” “예.” “알았다. 나가보도록. 지금 곧 움직인다.” “예.” 차빈은 가신이 나가자 예서의 둔부를 벌렸다. 그리고 예서의 안에서 조심스럽게 나왔다. 차빈은 몸을 일으키며 잠든 예서의 젖은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나의 그대가 많이 피곤한가 보군. 이 몸을 하고서도 정신없이 자는 것을 보면 말이야. 금방 다녀오마. 당분간 못 볼 텐데. 아쉽군.” 차빈은 예서의 입술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마음껏 몸부림치고 싶으나, 갇혀진 몸은 원대로 되지 않았다. 한없이 소리라도 지르고 싶으나 숨 쉬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도 큰 괴로움이었다. 심장은 이미 몸 밖으로 튀어 나가서 귀에서 울렸다. 그런데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눈물이 흘려 넘쳤다. 밤새 계속된 고통은 죽음을 생각하게 했다. 요 몇 달간 밤마다 가위에 눌리듯이 가슴이 답답했다. 그 강도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고 드디어 오늘은 눈을 뜨고 있음에도 그것은 당당하게 물뱀을 엄습했다. 그리고 그 답답함이 고통으로 바뀌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숨은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턱에 찼고, 이젠 헉헉거리는 것조차 힘에 버거웠다. 움직일 수 없는 몸은 더욱 고통을 가중시켰다. 물뱀은 누군가의 이름을 간절히 불렀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인지 물뱀 자신도 모른다. 그저 온 마음을 다해 부를 뿐이었다. 태양이 점점 호수를 깨우기 시작할 때, 검었던 물이 점점 창백한 파란색으로 바뀌기 시작할 그 때였다. 물뱀의 몸이 갑자기 바닥에서 스르르 빠져나왔고, 고통 또한 언제 왔던가 싶게 감쪽같이 사라졌다. 물뱀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창백한 파란색의 물결이 물뱀의 눈에 들어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이었다. 물뱀은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룬나.” “.............” “룬나.” 물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머리맡에 히루나가 쪼그리고 앉아서 벙실거리고 있었다. “재수 없는 꿈이다. 저런 늙은 성수 쪼가리나 나오는 꿈이나 꾸다니. 도대체 이놈의 가위는 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만 괴롭히는 게야. 오늘이 그 중 최고로세~. 아주 끝을 보는 구나.” 물뱀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룬나.” “저리 가!! 피곤해!! 밤새 시달렸어!! 그리고 왜 자꾸 나한테 룬나라고 하는 거야. 이 노망난 늙은이야!!!” 히루나를 노려보다 물뱀은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룬나.” “..........” “룬나.” “......................” “룬나.” “..................... 지금 ....뭐라고......했냐?” 물뱀은 천천히 히루나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목이 마치 기름칠을 못한 문짝처럼 삐거덕거렸다. “룬나.” “..........맙소사.” 물뱀은 입을 벌리고 뜨거워지는 이마로 손을 가져가다 자신에게 손이 달려있음을 불현 듯 깨달았다. 물뱀은 히루나를 황망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히루나는 처음 그 자세 그대로 룬나를 보며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손이 달려 있잖아.” “그래. 내 아들.” “왜?!!! 내가 당신 아들이야!!!!” “당연하지 않는가. 네게 이름을 주지 않았느냐.” “말도 안 돼!! 누가 너 따위한테 이름을 받고 싶다고 했어?! 아악!!” 누워서 히루나를 향해 룬나는 핏대를 세웠다. “그 이유가 지극히 간단하고 당연하다. 너한테 이름을 주고 싶어 하는 성수는 나밖에 없더군.” “.......젠장.” “일어나라. 나의 아들. 두 발로 서 보거라.” 히루나는 히죽이 웃으며 룬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몇 달 동안 물속에서만 보던 하늘을 맞닥뜨려 보게 되자 그게 무에 그리 신기한지 룬나는 물에 둥둥 떠서 빙글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히루나가 그런 룬나를 향해 아버지로서 첫 번째 발복을 했다. “짐승처럼 살아라. 성수도 짐승이니라. 인간처럼 연으로 살려하지 마라. 그건 패악이니라.” “...............” “그런데 패악의 뜻은 뭔지는 알고 있겠지?” “...................” “.........................” “...............” “미안하다. 내가 너를 너무 과소평가했군.” “......................” “.........................” “지금 뭐라 했느냐?!” “차빈님.” “다시 말해 봐?!!! 이 내가 누굴 어떻게 했다고?!!!” 격노하는 차빈의 목에서는 듣기 싫을 만치 평상시와는 다르게 반듯하지 못하고 껄껄한 소리를 내었다. 차빈은 자신을 냉정히 가라앉히기 위해서 있는 힘껏 주먹을 주었다. 그러나 끓어오르기 시작한 맹렬한 분노는 숨을 몰아쉬며 누르려 해도 불가능했다. 차빈은 눈앞에 있는 사자대(寫字臺)를 힘껏 내리쳤다. 쾅!!!!! 그 후 서고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본가 모주간 나이가 그런 차빈 앞에서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깊고 으슥한 밤, 자신을 은밀히 부른 황제 앞에 차빈 부친은 예를 갖추어 몸을 낮췄다. 그러나 옥좌에 앉은 황제는 아무런 기척 없이 그저 오롯이 눈만 감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홀 내를 짓눌렀다. 그리고 홀 안에는 황제와 차빈 부친 외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이 부름이 얼마나 은밀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예다. 황제가 정무를 보는 커다란 홀에는 그렇게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은밀함의 무게만큼 갑작스럽고 급한 부름이었다. 시중에 일파만파 번지고 있는 해괴한 소문을 듣고 다급한 전갈을 아들 차빈에게 띄운지 고작 이틀도 채 되지 않아 황제는 아직 아들과 대면조차 못한 그를 불러들었다. 소문이 소문이다 보니 황제의 부름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했다. 마주 대하고 있는 두 사람 모두, 황제나 그나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먼저 꺼낼 수 없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전대미문의 일이다. 물오리의 발처럼 지금 두 사람의 마음과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들이 난무했다. 홀을 밝히는 석대(石臺)위의 불은 보통 때와는 다르게 음산하고 불길해 보였다. “차빈의 아이니라.” 무거운 침묵 후, 황제가 먼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차빈 부친은 마치 들어야 할 선고를 들은 것 마냥 담담해 보였다. 그러나 하얗게 움켜쥔 주먹은 지금 그가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차빈 부친은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그리고 여러 번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이내 결심이 선 듯 고개를 들고 황제를 보았다. 그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잠시 그렇게 뜸을 드린 차빈 부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나이다.” “내 딸이니라. 황녀니라.” “폐하.” “겁탈이라고 했다.” 여전히 황제는 눈을 감고 있었고, 꺼림이 전혀 없는 평상시와 같은 목소리였다. “폐하.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국법이 겁탈을 어찌 다루는지 너무도 잘 아는 차빈이옵니다. 결코 그럴리 없나이다. 그 아이가 자신의 마나힘을 어찌 생각하시는지 아시지 않사옵니까. 그런 아이가 그럴리 만무하나이다.” 거칠어만 가는 숨을 고르며 차빈 부친은 황제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고했다. 그의 입안은 가뭄의 들판처럼 바싹 타 들어가고 있었다. “폐하. 차빈은 본래 황궁은 고사하고, 황성 본가에도 오기를 꺼려하던 아이이옵니다. 요 근래 차빈이 황성에 든 것은 고작 두어 번뿐이라고 들었사옵니다. 차빈이 황궁에 든 것 또한 한 번으로 알고 있나이다. 황성에 온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황궁에 누구와 입궁 했었는지 누구보다 폐하가 아시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대는 지금 내 딸이 나를 능멸하고 거짓을 고한다고 내게 말을 하는 겐가. 지금 황녀가 무고한 차빈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거짓을 이 황제에게 고한다고 하는 겐가?!!” “그게 아니옵니다.” “지금 그대의 말은 그것이 아니고 무에야?!!” “폐하!!” “듣기 싫다. 황녀가 겁탈을 당해 아이를 가졌다. 이 일을 어찌 할 것인가?!!” “황제 폐하!!” “그 상대가 차빈이라는 구나.” 높았던 황제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분해졌다. 눈 또한 언제 노기를 띤 적이 있었냐는 듯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그것이 더한 두려움으로 차빈 부친을 덮쳤다. 얼굴은 온화했으나, 황제의 눈은 광기로 번뜩였다. “황제 폐하!!!” 억지임을 황제 자신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더불어 황녀 주위의 떠도는 지저분한 추문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허나, 황제는 침묵했다. 그 누가 황녀를 반려로 맞이할 때 신탁의 뜻을 거부할 것이며 또한 누가 감히 황녀의 처녀성을 가지고 논하겠는가. 황녀의 기질이 다소 방탕하다고는 하나 황녀를 얻으므로 해서 갖게 되는 권력은 충분한 보상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늦게 본 황녀에게 황제는 더할 나위 없이 약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탐이 났던 차빈이었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황제는 생각했다. “폐하!! 황궁이옵나이다. 그것도 황궁 가장 깊숙한 내궁이옵나이다. 통촉하옵소서. 어떤 자가 감히 황녀를 겁탈할 수 있겠나이까. 불가능하옵니다.” “그래. 그대 말이 옳지. 가장 깊숙한 곳이지. 차빈이 아니라면, 그 누가 가능하다는 말이냐. 차빈이 아니라면, 그 누가 감히 황녀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다는 말이더냐.” 이젠 황제의 말속에 마치 상대를 달래는 듯한, 온화한 빛마저 감돌았다. “폐하!!” “혼례의식을 거행하라.” “폐하!!” “하거라.” 단호한 황제의 모습 속에서 차빈 부친은 커다란 낭패감을 맛봐야만 했고, 그는 암담함에 눈을 감았다. 황제의 은밀한 부름을 받을 때부터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진실은 하나다. 그리고 결론도 하나다. 차빈 부친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눈에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폐하. 부정의식을 윤허하여 주옵소서.” “..............?!” “황제 폐하. 차빈가의 수장이 머리 숙여 고하나이다. 가문의 수치를 면케 하여 주옵소서. 부정한 자는 부정의 길로, 정한 자는 정한 길로, 국법대로 처단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뭐라 했느냐?!!” 황제는 옥좌에서 벌떡 일어나며 눈을 부릅떴다. “부정의식을 거행하도록 윤허하여 주옵소서.” 큰 호흡을 하며 차빈 부친은 결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의외의 발언에 황제는 경악했다. 그는 지금 황제에게 평생 불명예를 짊어진 삶을 차빈에게 주느니, 차라리 황녀의 죽음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황제의 눈은 분노로 검게 가라앉았다. 부정의식이란, 정함을 의심 받는 여인이 자신을 변호하는 의식으로 부정을 의심받아 죽음에 내몰린 여인은 맨발에 상복을 입고 자신의 억울한 죽음에 곡을 하며 대신전으로 나아가 자신의 분함을 신에게 고한다. 그러면 사제들은 여인의 억울함을 신에게 묻는 것이다. 의식은 의외로 간단해서 신전에 도착한 여인은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기록한 파피루스를 신전 뜰에서 태워 그 재를 성수에 타서 마시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부정하고 거짓을 고한 여인은 반드시 열흘 안에 독창에 걸려죽었다. 지금 차빈 부친은 그걸 행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어찌 보면 고도의 심리적인 암시와도 같은 것으로 모든 이들의 믿어 의심치 않는 절대적인 신심에 입각한 신의 지혜였다. “신의 뜻에 따르겠나이다.” 머리를 조아린 그의 말은 매우 단호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차빈 부친과 황제, 두 사람 사이에는 차가운 살기만이 맴돌았다. “황제 폐하. 폐하는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아시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누구보다 저희 집안을, 그리고 차빈을 아끼시지 않사옵니까. 폐하 통촉하옵소서.” “그대는 지금 황녀를 죽이려는 겐가.” 황제의 음성은 지독하게 싸늘했다. 평생을 권력의 한 가운데에서 권신들과 싸운 황제의 목소리는 차빈 부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음성에 그의 가슴에는 찬 기운이 서렸다. 그러나 물러 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들은 하나밖에 보지 않는 성품이다. 만에 하나 자신이 받아들인다 하여도 아들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자신 또한 결코 이런 굴욕은 인정할 수 없었다. “내 딸이니라!!” 부정한 여인은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리고 부정한 남자는 이름을 빼앗겨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산다. 그것이 법이었다. 밀 수확 때의 너른 들판은 언제나 즐거움과 노래로 가득하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황금의 들녘에는 땅 위를 고단하게 떠돌던 가난한 사람들의 잔치 마당이 벌어졌다. 차빈가의 전통 때문이었다. 밀 수확 시, 차빈가는 결코 땅에 떨어진 나락을 다시 줍지 않았다. 떨어진 나락은 땅의 것, 신의 것, 그리고 모든 생명들의 것임을 믿었기에 차빈가는 추수 후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것은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추수하는 농노들을 따라 헐벗고 배고픈 자들이 밀밭을 헤치며 나락을 주어 고픈 배를 달랬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축제인 것이다. 그 축제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때론 농노들을 시켜 군데군데 나락들을 일부러 흩뿌리기까지 했다. 가난한 자들은 흥을 돋우며 나락을 줍기도 하고 땅에 떨어진 낟알 하나하나를 소중히 거두며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차빈가를 축복했다. 이때는 철없는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 사이를 뛰놀아도 뭐라 꾸중을 듣거나 핀잔을 듣지 않았다. 도리어 어른들은 너그러운 웃음으로 깔깔거리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웃음에 화답했다. 조금 큰 아이들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부모의 뒤를 따라 낟알을 줍고 땅을 어루만지며 어른들을 쫓아 기도문을 외웠다. 더불어 농노들의 마을에도 토담 너머까지 그 구수한 냄새가 끊이지 않는, 일 년에 한 번 있는 그런 넉넉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불이었다. 지독히도 빠른 불은 미친 말처럼 너른 들판을 뛰어다니며 모든 것을 불태웠다. 너무도 빠른 그 속력에 사람들은 그저 땅을 치며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뿐, 그 누구도 감히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더불어 청명한 마른 대기는 채찍이 되어 불에게 더욱 빠른 뜀박질을 시켰다. 사람들은 그저 주저앉아 하늘만을 쳐다보거나, 우왕좌왕하며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들판에서 사람들을 쫓아내고, 새들을 쫓아내고, 어린 짐승들을 쫓으며 불은 너른 들판을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죽음이었다. 무딘 칼은 어린 아이들의 연한 살을 단칼에 베었고, 가슴이 도려진 젊은 아낙네 옆에는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어린 사내아이가 울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서러움의 눈물을 닦아줄 어미는 없었다. 그 두려움을 털어내고 안아줄 아비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그 아이는 곧 어미 품에 안겨 영원한 잠을 자야만 했다. 눈을 부릅뜨고 죽은 남편 옆에서 젊은 새색시는 수많은 짐승들에게 능욕을 당했다. 사랑하는 남편은 그저 그런 그녀를 말없이 지켜 볼 뿐, 짐승들의 손아귀에서 구해주지 않았다. 임산부의 배는 갈리어지고, 살아있는 어린 태아는 탯줄을 매단 채 토담에 던져졌다. 토담은 무너지고, 밀 더미로 엮어진 지붕은 순식간에 재로 화했다. 노인들도, 아이들도, 여인들도, 그리고 남정네들도 피에 굶주린 짐승들의 무딘 칼날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들판 곳곳에는 배가 갈라져 내장을 쏟아내고, 팔다리가 뒤틀린 시체들이 쌓여갔다. 그저 주인을 잃고 집을 잃은 짐승들만이 애처롭게 울뿐이었다. 그들을 그렇게 죽음으로 내몬 것은 곡괭이였다. 죽음은 그렇게 그 누구도 피해가지 않았다. 불의 지옥 뒤에 또 다른 지옥이 그렇게 사람들을 덮쳤다. 벌판을 태우는 시뻘건 불보다 더한 광기를 눈에 담은 짐승들이 인간을 죽였다. 그리고 그 광기어린 짐승들은 자신들의 마지막 먹이를 향해 오직 앞으로 나아갔다. 곧 차빈의 외성이 그들의 붉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어떠하신지요?” 아이의 짙붉은 구릿빛의 피부는 윤기가 흘러 한없이 건강해 보였다. 그러나 이제 겨우 열 서넛 정도의 벌거벗겨진 어린 몸은 화려한 방안과 주변 사람들이 풍기는 위화감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괜찮군.” 그리고 먹이의 크기를 가늠하는 뱀의 차가운 눈이었다. “앞에 달린 것만 빼면.” 입에서 나오는 비릿한 말과는 달리 나누의 입매는 만족감에도 비틀린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누는 떨고 있는 아이를 감상하며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그리고 나누의 옆에서 그의 심기를 주의 깊게 살피던 남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나누의 앞으로 살짝 밀었다. 나누는 무시무시한 모형 성기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아이의 성기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아이의 성기가 나누의 눈앞에서 오그라들었고, 그 모습에 나누는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대신 잘 생기지 않았나이까. 이만하게 생기기도 힘들지요. 아후님께서 신경 써서 직접 고르셨습니다.” 쪼그라든 아이의 성기를 힐금 내려다보며 남자는 말을 이었다. 아이의 그것은 채 다 자라지 않아 써보지도 못한 물건이었다. “그렇군.” 사내아이의 부드러운 몸은 확실히 굴곡 있는 여인들의 몸과는 사뭇 달랐지만, 그렇다고 울퉁불퉁한 사내의 몸 또한 아니었다. 갸름한 얼굴선이 고와 보이는 아이의 반쯤 내리 감은 눈은 크고 맑았다. 그리고 그 눈동자가 두려움에 흔들리는 것은 꽤나 자극적이었다. “맛보시겠습니까. 계집의 고기 맛하고는 확실히 다르실 겁니다.” 나누의 옆에서 그의 기색을 살피는 중년의 남자는 끝이 쳐진 눈과 부드러운 미소가 밴 입매가 지극히 평범하고 선량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였다. 이가 아후의 오른 팔인 무흔이라는 자다. “한 번 맛들이시면 계집 따위는 잊으실 겁니다.” 무흔은 몸을 숙여 조용하고 음밀한 목소리로 나누의 귀에 속삭였다. 풍만한 계집에 대한 두려움에 가까운 열등감보다 농밀한 사내들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열등감이 더욱 큰 나누다. 그러기에 자기보다 약하고 힘없는 자를 짓밟는 것을 낙으로 여기며 사는 나누가 눈앞에 먹음직한 먹이를 물지 않을 리 없다. 어린 사내아이. 무흔으로서는 자멸로 가는 나누의 어리석은 탐욕이 눈에 빤히 보였다. “보여 드려라.” 나누의 욕정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보며 무흔은 옆에 서 있던 가노에게 짧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자 가노는 아이를 뒤로 돌려 엎드리게 했고 둔부를 벌려 애널이 훤히 드러나게 했다. 여타 성인들과는 달리 주위에 털이 없는 애널은 곱게 다물려 있었다. “깨끗하군.” 나누는 거부감이 들지 않는 자신에 대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그렇습니다. 쓰지 않은 물건이지요. 처음이신데, 쓴 물건을 대령할 수는 없지요. 전하.” 무흔은 흐뭇한 표정의 나누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배설의 충동과 자신의 뒤를 꿰뚫는 고통에 몸을 틀었다. 새된 비명은 입이 막혀 아이의 입 언저리만 맴돌 뿐이었다. 오일이 발라진 사내들의 번들거리는 손가락은 끊임없이 아이의 애널을 드나들었다. 아이의 애널을 풀고 있는 가노들의 손가락은 능숙했고, 쿨룩거리는 젖은 소리만이 쥐 죽은 듯한, 고요한 방안에서 나는 유일한 소리였다. 잠시 후 가노 중 하나가 보란 듯이 아이의 둔부를 끈적거리는 혀로 핥으며 희롱했다. 그예 아이는 더한 두려움으로 허리를 틀며 몸부림을 쳤다. 천에 막혀 제대로 나오지 않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아이의 애널에서 나는 질척거리는 소리는 나누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검은 동굴은 점점 모양새를 갖추어 갔다. 더불어 가노들의 혀와 손가락은 더욱 바빠졌고, 나누는 커다란 의자에 앉아 그런 사내아이의 둔부를 바라보았다. 나누는 풀어지고 있는 아이의 애널뿐 아니라 덜렁거리며 흔들리는 아이의 작은 성기 또한 대단히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발기된 나누의 구부러진 남근을 가노가 빨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본성은...” “작은 마나힘은 아후님의 손에 있을 겁니다.” 무흔은 나누가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했다. “그래.” 예서의 몸을 떠올리면서 나누는 침을 삼켰다. “멍청한 계집.” 그리고 뜬금없이 떠오르는 동복누이의 얼굴에 나누의 이마에 설핏 주름이 잡혔으나, 곧 무흔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나누는 자신의 누이를 머리에서 지웠다. “성문이 어찌 열린단 말이냐?!!!” 본성 모주간 찬마밀의 노성에 그의 앞에 도열해 있던 가신들은 침통한 심정으로 침묵했다. 고개를 드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을 둘러보는 찬마밀의 눈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내통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게 말이 되느냐?!! 내통자라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느냐?!! 누구냐?!!! 그 자가 대체 누구냐?!!!” “...............” “.................” “누구냔 말이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찬마밀은 더한 분노로 소리를 높였다. “...............” “...................” “...............” “어서 말하지 못할까?!!!!” 찬마밀의 살기어린 무서운 일갈이었다. “...................” “...............” “쿤푼이옵니다. 나리” “...................?!!!!” “...............” “..........지금 뭐라 했느냐?” 그 순간 모주간 찬마밀의 귀에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앞이 캄캄했다. 찬마밀은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가신들을 멀뚱히 쳐다보며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자신이 제대로 들었나를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들었나를 생각했다. “누구라고?” 그리고 그 찰나의 시간에 모주간 찬마밀의 눈앞에 그 자신의 부친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생전의 근엄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누구라고?!!!!” 외성이 열렸다. 천 년간 굳게 닫혀있던 문이다. 그 누구도 연 적 없고, 열 생각도 감히 못하던 성문이었다. 그게 지금 자신의 대에서 열린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아들의 손으로. 찬마밀이 이마를 짚고 비틀거리자, 옆에 서 있던 부모주간이 그런 그를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찬마밀은 그 손을 거부했다. 방안은 헤어 나올 길 없는 깊은 심연 같은 침묵 속에서 신음했다. 그들은 의심조차 끔찍해서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누군가의 입을 통해 나오자 넋을 놓고 망연자실하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쿤푼은 자신들의 친구이자, 동료요, 형제와도 같은 자였다. “지켜라.” 찬마밀은 사자대(寫字臺)에 손을 집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눈을 홉뜨며 호령했다. “너희들의 시체를 쌓아서라도 지켜라.” “예. 모주간 나리!!” 모주간 찬마밀의 서릿발 같은 명에 방안에 있던 젊은 가신들은 비장한 눈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뒷모습에 찬마밀은 아들들을 죽음의 길로 내모는 아비의 심정으로 가슴을 쳤다. 너무도 아까운 죽음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모주간 찬마밀이 이 싸움은 그들에게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 만무하다. 그건 결연한 의지로 방안을 뛰어나가는 젊은 가신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들 입을 다물고 말을 아낄 뿐, 아니 입을 열어 기정사실화하기를 두려워할 뿐, 암묵적인 침묵 속에서 그들은 알고 있었다. 싸울 수 있는 자들은 사병이건 가신이건 평민이건 간에, 고작 천이 되지 않았다. 가축과도 같은 가노들은 그저 우왕좌왕하며 두려움에 몸 둘 바를 몰라 할 뿐이었다. 그러나 미친 폭도들의 수는 족히 자신들의 열 배는 되어 보였다. 믿을 수 없는 숫자였다. 이는 암염광산의 가노들을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결코 단순한 폭동이 아니었다. 누군가 뒤에 있었다. “말도 안 돼.” 젊은 가신들이 빠져나간 텅 빈 서고 안에서 찬마밀은 사자대(寫字臺)를 집고 서서 신음했다. 찬마밀의 입에서는 상처 입어 죽음을 눈앞에 둔 짐승의 애절하고 침통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찬마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고 안을 빠져나왔다. “쿤푼.” 복도를 걷던 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이내 찬마밀은 노구를 이끌고 뛰었다. 찬마밀의 눈에는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눈앞에서 우왕좌왕하며 살 방편을 찾고자 안간힘을 쓰는 자들을 거칠게 치고 지나치며 오직 하나만을 생각했다. 쿤푼. 나루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 고통스러워했고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찬마밀 자신의 마음 약한 큰아들. 쾅!!!!! 그러나 방문을 힘껏 열어 제친 찬마밀은 아프게 뛰는 가슴을 움켜쥐어야만 했다. 방안에는 그의 아들 쿤푼이 있었다. 작은 미동 하나 없이 뻣뻣하게 매달려 파란 혀를 빼문 쿤푼의 부릅뜬 눈에는 마치 찬마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할 말이 있었는데 왜 이제야 왔느냐는 듯, 원망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죽은 쿤푼이 흘린 오물이 고여 있었다. 털썩. 늙음이 삽시간에 덮친 것처럼 찬마밀의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찬마밀은 주저앉아 망연자실 쿤푼을 올려다보았다. 나루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보이던 쿤푼이었다. 이런 결과를 충분히 예감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어리석은 것. 차빈 본성이 차빈가의 것이더냐. 우리의 집이지 않았느냐. 너희들이 태어나 자란 곳이니라. 너희들의, 너희들의 자식들의 집이거늘. 이 어리석은 것. 왜 그걸 잊었느냐.” 회한의 눈물 한 줄기가 늙은 모주간 찬마밀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찬마밀은 피를 토하는 자신의 가슴을 쳤다. 모주간의 자리에 앉은 자가 왜 흔들렸던가. 왜 한 집안의 우두머리인 자가 남겨진 가족들의 고통을 돌아보지 못했던가. 모주간 찬마밀과 그의 수하들은 일단 자신들의 식솔들을 포함해서 모든 외성의 사람들을 다리를 건너 내성 안으로 대피시켰다. 사람들은 공포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도 늙은 부모를 부축하고 두려움에 떠는 어린 자식들을 품에 안고 뛰었다. 그리고 발에 치이는 가축들을 몰며 내달렸다. 사람들은 그런 존재였다. 죽음밖에 더 기다리는 것이 없는, 희망 없는 길을 감에도 실낱같은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린 자식들을, 그 자식들의 미래인 가축들을 그렇게 챙기고 있었다.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전멸을 예고하는 전투는 어김없이 왔다. 전술도 전략도 없었다. 가신들은 바다의 밀물처럼 거침없이 집어삼키려 밀고 들어오는 폭도들에 맞서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고 창을 던지고 활을 쐈다. 온몸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자 몸부림을 쳤다. 자신들의 옆에서 소중한 동료가 사랑하는 형제가 죽어나가도 잠시잠깐 돌아볼 여유 따윈 없었다. 오직 그들을 애도하는 피눈물을 흘리며 외마디 괴성과 함께 폭도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폭도들을 벨뿐이었다. 수가 적은 가신들은 서로의 등을 보호하기 위해서 등을 맞대고 싸웠고, 날아오는 곡괭이를 피하며 폭도들을 베었다. 곧 그들의 발밑에는 무수한 피 웅덩이들이 생겨났다. 튀는 핏물로 인해 시야가 가려도 미처 닦을 사이도 그리고 생각도 없었다. 자신들이 무너지면 내성이 무너진다. 내성 안에는 사랑하는 자신들의 식솔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 가신들은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폭도들은 자신들의 동료의 죽음 앞에서도 조금도 주춤거리는 기색 따윈 없었다. 도리어 마치 피만이 자신들의 최고의 기쁨인양 미쳐 날뛰었다. 피라면 동료든 적이던 상관없는 쾌락의 촉매제인양 그들은 핏줄이 터져 벌게진 눈으로 죽음의 향연을 즐겼다. 광기의 눈들을 희번덕거리며 누런 이빨을 상처 입은 짐승처럼 드러내며 괴성을 질렀다. 피 묻은 곡괭이 한 자루가 눈앞에 빠르게 다가 왔으나, 다른 것을 막느라 알면서도 피할 수 없었다. 통탄의 고통이 이름 없는 가신의 가슴을 빠르게 치고 지나갔다. 무너져가며 그는 마지막 눈을 들어 붉은 핏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하늘은 곧 검게 변했다. 힘에 부친 한 쪽이 그렇게 무너지자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무너지고 부상을 입은 가신들을 폭도들은 사정없이 무딘 칼과 곡괭이로 내리쳤다. 죽은 가신들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팔 다리가 잘리어도 그들은 멈출 줄 몰랐고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 동료를 죽이는 일이 생겨도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피와 살점을 뒤집어 쓴 폭도들의 괴성이 온 성을 뒤덮었다. 폭도들은 미리 준비되어 있는 배를 타고 해자를 건너 내성으로 진입했다. 굳게 닫힌 내성의 성문 따윈 쳐다보지도 않았다. 폭도들의 손에 들린 횃불은 대낮처럼 해자와 내성을 밝혔고, 그들의 뒤에는 외성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처연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가셔야 합니다.” “.........” “마나힘. 가셔야 합니다.” “...........” “어서요. 저는 괜찮습니다.” “...............” 호수 앞에서 모아나는 예서의 손을 굳게 잡고 간곡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예서는 묵묵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가셔야 합니다. 저는 마나힘을 지켜야 합니다.” “모아나님, 룬나님을 부탁드립니다. 룬나님, 모아나님을 부탁드릴게요.” 무표정하게 서 있는 룬나를 향해 예서는 어렵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모아나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어 힘껏 그 손을 그러쥐었다. “마나힘?!!!” 예서의 강한 손에 모아나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이 순수한 의지 앞에 늙은 자신이 무릎을 꿇을 거라는 확신과도 같은 절망감이 순간 모아나의 가슴을 때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예 핏기가 가신 모아나를 향해 예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작게 웃었다. 모아나는 가슴이 저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아나님. 실은 엄청 겁이 나고 무서워요. 비명이 여기까지 꽉 차서 누가 한 번만 꾹 눌러주면 바로 튀어 나올걸요.” 예서는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싱겁게 웃었다. “그런데 지금은 갈 수 없습니다.” 그 담담함에 모아나는 더욱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내 마른 침을 삼키며 억지로라도 말을 내려했다. 그러나 예서가 먼저였다. “이걸 아이한테 전해 주셔야 하잖아요.” 예서는 모아나가 얼마 전에 구입한 배내옷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흔들리는 모아나의 눈에 곧 굵은 눈물이 맺혔다. 갑자기 늙어 버린 듯한, 생기 잃은 모아나의 눈물은 너무도 구슬퍼 보였다. 예서는 모아나를 끌어안았다. 모아나를 안는 예서의 핏기 없는 차가운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살고 싶지 않다면 그건 더한 거짓말일 것이다. “사실은요. 혼자 남겨지는 게 두렵고 용기 없어서 이렇게 비겁하게 모아나님께 다 떠맡기는 거니까요. 모아나님. 죄송합니다.” 다른 길은 없었다. 깎아지른 듯한, 가파른 절벽이 성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차빈 본성은 철옹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성이었다. 그래서 인간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아니, 오직 성문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성문을 폭도들이 장악하고 있는 이때에 빠져나갈 길은 오직 하나였다. 호수. 성수 룬나의 도움으로 열 수 있는 유일한 문인 호수뿐이었다. 그러나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성수(聖獸)가 자신을 열쇠로 해서 성수(聖水)의 문을 연다 해도 그 문은 아주 잠깐 동안이고, 그 한시적 시간에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두 사람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 힘이 약한 룬나는 룬나 자신이 같이 가야만 그나마 안전하게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니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더 이상 지체하실 시간이 없습니다.” 다급하게 입을 여는 모주간 찬마밀의 하얀 머리는 온통 붉은 피로 젖어 있었다. “놈들이 곧 들이닥친 겁니다.” 이렇게 뜸을 드릴 시간이 없다. 그러나 찬마밀 자신은 선택할 수 없었다. 예서나 모아나 모두 주인들의 반려이지 않던가. 밑에 있는 자가 누구를 선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폭도들의 괴성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지러진 횃불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예서와 모아나를 둘러싸고 있던 가신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사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아시겠습니까?!” “네. 모아나님.” “약속하셨습니다.” “네.” 붉게 충혈된 모아나의 눈에 아픈 눈물이 흘러넘쳤다. 다짐은 그렇게 받았으나, 대답은 그렇게 했으나,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너무도 자명한 현실이었다. 모아나는 품안에 잘 갈무리하여 간직하고 있던 단도를 꺼내어 예서의 손에 쥐어주었다. 모아나 자신이 쓰려했던 칼이다. 잠시 주춤하던 예서는 떨리는 손으로 그 칼을 받았다. 그리고 모아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 때는, 그 때는... 살아서 저를 보시면 한 번만 ......한 번만 어미라 불러 주시겠습니까?” 예서는 나오려는 눈물을 참느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모아나의 손을 힘껏 잡았다. 룬나와 모아나가 서 있던 곳의 작은 빛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그렇게 룬나도 모아나도 예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호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잔잔한 물결만이 바람 부는 대로 찰랑거렸다. 그러나 예서는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예서는 어이없게도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예전 저 곳으로 사라졌을 때도 저런 빛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뜬금없이 쿰이 생각이 났다. 예서가 본가에서 본성으로 돌아 왔을 때도 변함없이 환한 미소로 자신을 맞이했던 소중한 친구. 이 경황 중에 미처 챙기지 못했던 쿰과 쿰의 어린 동생 키쿰이 무사히 도망갔기를 예서는 간절히 기원했다. 예서는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감청색의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죽기에는 나쁘지 않은 날이다. ‘엄마, 미안하다. 이번에는 진짜 같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폭도들이 삽시간에 예서들을 둘러쌓다. 무장한 가신들이 매서운 눈초리로 예서를 감싸며 그들을 노려보았고, 그 속에는 모주간 찬마밀도 있었다. 횃불의 흔들림 속에서 피를 뒤집어쓴 폭도들은 마치 악귀들 같았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폭도들은 예서들을 위협하며 도발할 뿐 공격은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웅성거리는 소란과 함께 폭도들이 내어준 길을 뚫고 한 사내가 천천히 예서 쪽으로 걸어왔다. “그 동안 평안 하셨는지요? 작은 마나힘.” 그는 아후였다. 말들은 거친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을 가르고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리고 그렇게 달리기 시작한지 벌써 만 하루가 지났음에도 대열은 흐트러지거나 어지러운 구석이라고는 어느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차빈가의 수장은 그런 자신의 수하들을 묵묵히 이끌었고, 그들 속에는 평소와 다르게 침통함과 비장한 기운이 함께 있었다. 황성에 있는 본가로 본성이 폭도들에게 함락 당했다는 소식이 들어온 것은 사흘 전이었다. 기별을 전해 받은 즉시 차빈가의 수장으로서 그는 황성 외곽에 주둔하고 있던 자신의 사병들을 이끌었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기에 갑작스러운 출전 명령에도 그의 사병들은 빠르게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는 아들 차빈을 본가에 놓아둔 것은 황명 때문이었다. 황녀와의 문제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워워.” 멀리 지평선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보이자, 차빈 부친은 손을 들어 사병들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급한 멈춤에 흥분한 말들은 심하게 투레질을 하며 짜증을 부렸다. 커다란 코를 벌름거리며 콧김을 내는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그는 지평선에서 예리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가느다란 선이 기마대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워~.” 일정거리에 이르자 히김은 손을 들어 자신의 기마부대를 멈추었다. 황성 제 2 수비대장 히김과 그의 기마부대. 거칠고 용맹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부대다. 그런데 그들이 왜? “히김, 그대가 여긴 어인 일인가.” 히김이 홀로 말을 몰아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 또한 히김을 맞이하고자 말을 움직여 히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두 장수는 창끝을 내밀면 닿는 거리, 즉 전투 거리 그 앞에서 서로의 말머리를 마주대고 섰다. “무슨 일인가.” 자신을 직시하는 그러나 그 어떤 표정도 없는 히김을 보자 그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께름칙했다. 히김은 문벌이 변변치 못한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그런 자신을 일으켜 황성 제 2 수비대 대장의 자리까지 오른 어찌 보며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큰 단점이 하나 있었다. 누구보다 탁월한 장수이긴 하나, 본성이 너무 사납고 잔인해 황제조차도 그를 가까이 두지 않았다. 그런 자가 지금 차빈가의 수장, 그의 앞에 서 있는 거다. 맹수들의 힘겨루기 같은 날카로운 기운 속에서 차빈가의 수장과 히김은 서로를 탐색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한 치의 꿀림도 비켜섬도 없었다. 순간 확신과도 같은 불길함이 차빈가의 수장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건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무인의 날카로운 예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로 차빈가 사병들의 얼굴이 불편함과 불쾌함으로 점점 험악하게 우그러졌다. 왜냐하면 응당 히김은 말에서 내려 자신들의 주인에게 예를 표해야 하는 위치임에도 도리어 대등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들의 주군은 역정이나 꾸지람을 내리기는커녕 무례한 언동을 하고 있는 히김을 불언(不言)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이라, 그들은 속으로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히김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차빈. 황명이다.” “히김 장군!! 지금 감히 누구한테 하대를 하는 것이요?! 당장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시오!” 차빈가의 부관 중 하나가 살기등등하게 자신의 주인 앞으로 나서며, 히김을 향해 근엄하게 일갈했다. 자신들의 주인에게 예를 표하지 않던 히김에 대한 불쾌함을 참지 못하고 분출한 것이다. 그러나 히김은 그런 그의 말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할 말만을 했다. “그대는 황제 폐하의 윤허를 받지 않고 사병을 움직였다. 반역으로 다스리라는 황명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윤허를 받지 않았다니? 나는 분명 황제 폐하의 윤허를 받았느니라.” 차빈가의 수장은 벼린 칼날 같은 히김을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대했다. “차빈, 그대는 무례하게도 새 황제 폐하가 등극하시자마자 윤허도 없이 사병을 일으켰다. 이유를 불문하고 본보기로 처단하라는 새 황제 폐하의 엄명이시다.” “...........?!!!!!” “...............??!!” “지금 뭐라 했느냐?!! 새 황제 폐하라 했느냐?!!!” 경악으로 부릅떠진 눈과 창백한 안면, 그리고 확연하게 겉으로 드러나는 경직된 몸은 차빈가의 수장과 그의 수하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가를 여실히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럼, 폐하께서는?!!!” “승하하셨다.” “........?!!!!” 차빈 부친은 순간 덮치는 아찔한 현기증에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곧 그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무너지고 흔들리기 시작한 자신의 마음을 지금은 그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히김을 본 순간 느꼈던 불길함은 이것이었던가. “다음 보위는?” “반윤 폐하시다.” “맙소사!!!” 히김의 한 마디에 차빈가 사병들은 무섭게 흔들렸다. ‘반윤’이라 하면 마나힘 폐하의 두 번째 자제로 황태자 반이의 아우 되는 이다. 유약한 황태자에 비해 사람들을 휘어잡는 제왕의 기질을 타고난 황자나, 야망이 너무 크고 호전적인 인물이라 차빈가는 항시 그를 예의 주시하며 경계했다. 그런 자가 황태자를 밀어내고 황제의 위에 오른 것이다. 찬탈(簒奪)인가. 하룻밤사이에 천년 제국 이루 역사상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심지어 저작거리의 범인조차 예견하던 일이 아니던가. 천년 제국의 변혁을 눈으로 보게 되리라 다들 기대 반 우려 반이지 않았던가. 문제는 그런 그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차빈가를 눈엣가시로 여긴다는 점이었고,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차빈가의 수장이 그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황태자 전하는?” “보위를 보윤 전하께 위임하셨다.” 설마, 황제 시해(弑害) 후 찬탈(簒奪)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단 하루사이에 어찌 그렇게 쉽게 황태자가 자신의 자리를 내놓을 수 있던 말인가. 차빈 부친은 알 수 없는 진실에 갑갑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히김을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히김의 눈 속에는 그 어떤 대답도 없었다. “말을 돌리겠다. 가서 새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직접 사정을 아뢰겠다.” 차빈 부친은 조용한 어조로 타이르듯이 말을 내었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속은 견딜 수 없는 불안과 초조함, 그리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생각들로 용트림하고 있었다. “이유 불문하고 단 하나도 살리지 말고 처단하라는 새 황제 폐하의 황명이시다.” 그러나 히김은 그런 그에게 이를 드러내며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뭐라?!” 차빈 부친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런 그에게 히김은 단호하게 다시 한 번 더 말했다. “반역으로 다스리라는 황명이 계셨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눈엣가시라 한들 이렇게 단 칼에 황가가 차빈가를 버릴 수 있단 말인가. 황가와 차빈가는 제국 이루의 양 날개거늘, 그 하나를 자르겠다고? 반윤 황제. 그대는 무엇으로 날려는가. 폐부를 찢는 듯한, 처절한 신음소리가 차빈가 수장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지금 반역이라 했느냐. 황명이라 했느냐.” 그리고 차빈 부친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다.” “......말도 안 돼.” 그는 자신의 뒤에서 그의 부관 중 하나가 망연자실 내뱉는 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전개될 일을 선명하게 떠올렸다. 자신과 수하들, 차빈가 그리고 아들 차빈과 또 다른 아들인 예서, 그들의 뒤틀린 운명을 말이다. ‘신이여.’ “황명으로 그대를 처단한다.” 히김은 칼을 뽑아 칼끝을 그에게 향했다. 그러자 도열해 있던 양쪽 군사들의 칼집에서도 동시에 칼이 솟구치듯이 뽑혔다. 그러나 차빈가 수장은 손을 들어 자신의 사병들의 칼들을 물렸다. 그의 사병들은 상대를 향했던 칼끝을 땅으로 향해 내렸다. 그러나 칼을 잡고 있는 손은 긴장으로 단단했고 눈매는 매서웠다. “다시 한 번 더 말하겠다. 나는 분명 전 황제 폐하의 윤허를 받았느니라. 칼을 내려라.” “나는 모른다. 나는 단지 황제의 명을 받드는 군인일 뿐이다.” 눈을 감지 못한 자는 하늘을 향해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있는 대로 부릅뜨고 있었고, 배가 갈린 자는 쏟아지는 내장을 주어 담으려는 듯 자신의 터진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머리가 쪼개져 뇌수를 흘리고 있는 자의 벌어진 입에서는 검게 썩은 피가 고여 있었다. 인간들에게 생명을 주던 선홍색 피는 오갈 데를 잃고 땅에 고여 썩은 내를 풍겼고, 땅도 그 피는 받아 마시지 않았다. 질척거리는 썩은 피를 반기는 것은 오직 더러운 파리 떼뿐이었다. 그 누구의 얼굴에도 죽음이 주는 평안한 안식은 없었다. 고통과 슬픔, 분노들이 뒤섞여 피비린내와 함께 대지를 더럽힐 뿐이었다. 그저 죽은 말들만이 안식 없는 주인의 그 서글픈 죽음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로지 들쥐들과 들개들만이 죽은 자들 속에서 간만에 주어진 포식을 즐길 뿐, 깃발들은 피로 물들어 본래의 색을 잃었고, 땅에 홀로 꽂힌 채 주인 잃은 칼에서는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자의 목에서 나는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저승 문을 넘고 있는 소리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그는 곧 허겁지겁 죽을 자들을 따라 갔다. 이제 이곳에서는 땅을 딛고 제 발로 서 있는 자는 없었다. 호흡이 그 코에 있는 자, 또한 없었다. 무자비한 살육의 현장이었고, 전술도 전략도 없는 짐승들의 몸부림이었다. 오직 죽이고자 하는 자들의 살기만이 난무했고, 살고자 하는 자들의 공포만이 충만했다. 그리고 그 곳에 차빈이 있었다. 차빈이자, 차빈의 부친이자, 차빈의 아들이었던 자. 그리고 이제는 전대 차빈이 되어 버린 자. 차빈의 군사 중 살아남은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방안은 평온했다. 마치 며칠 전의 일은 예서가 악몽을 꾼 것뿐이라는 듯, 본성에는 아무 일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는 듯, 예전과 다름없는 평온이 있었다. 그렇게 겉으로는 한없이 평화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조용함 가운데 아후는 천천히 차를 음미했고, 예서는 그런 아후 옆에서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조금의 미동도 없는 예서의 입술은 바짝 메말라 있었고, 얼굴은 초췌하고 해쓱했다. “역시 차빈 본성이라 그런지 최고급 차들이 즐비하더군요. 또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아니 드십니까? 소인이 듣기로는 꽤나 즐겨하신다고 들었는데요.” 아후는 향과 맛에 취한 듯 반쯤 눈을 내리깔고 찻잔을 매만지며 나른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러나 그의 신경은 예서의 시선을 정확히 읽어내며 마치 차를 즐기듯이 예서를 음미했다. 그런 느긋한 아후와는 달리 예서는 강한 혐오와 두려움으로 창백했다. “식사를 아니 드신다고 하더군요. 드시는 것이 좋습니다. 아니면, 제가 씹어서 마나힘의 입에 넣어 드릴까요? 저야 물론 좋습니다만.” 비아냥거리는 말속에 풍기는 묘한 성적인 뉘앙스에 예서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아후는 눈만 살짝 치켜 뜬 채 그런 예서의 얼굴을 보며 싱긋 웃었다. 예서는 아후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이렇듯 비웃음을 참는 것으로, 이렇듯 굴욕을 참는 것으로, 일각일각 목숨을 구걸하며 연명하고 있다. 파랗게 이는 울분을 감추고자 예서는 눈을 내리감았다. 비참하다. 이렇게라도 살고 싶어 하는 자신이 예서는 싫다. 그런 한 편 뿌리가 뽑혀 공중에 허우적거리는 마른 나무 같은 느낌이라 혼자라는 것이 너무도 두렵고 끔찍했다. “연기도 많이 가라앉아 쾨쾨한 냄새도 많이 가셨습니다. 산책이라도 나가 보시렵니까? 방안에만 있기가 답답하실 텐데요.” ‘싫다. 싫거든. 그러니까 나다니고 싶으면, 너나 나다려라.’ 예서는 아예 귀를 잘라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저 따윈 미친 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 아닌가. 예서의 앞을 막아선 찬마밀을 비롯하여 나머지 가신들이 제압당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예서에 대한 염려와 회한으로 차마 눈을 감지 못하던 찬마밀과 잔인하게 도륙당한 가신들의 시체 속에서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쓰던 그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예서는 망연자실 홀로 서 있어야 했다. 모아나의 칼은 무용지물이었다. 검을 배워본 적도 잡아본 적도 없는 예서가 살아야한다는 절박감과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두려움 속에서 장검도 아닌 기껏 여인의 호신용 단검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 상대를 악에 바쳐 위협하며 접근을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성안의 모든 남자들은 깨끗하게 죽임을 당했다. 전투 중에 죽은 자들은 그나마 축복이었다. 사로잡힌 자들은 어린 아이이건 노인이건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폭도들은 아무도 가리지 않았다. 거기다 여자가 거의 없던 광산의 가노들에게 남자란 또 다른 계집이었기에 어린 사내아이들은 대부분 그들의 노리개로 죽어나갔다. 아이들은 남자들의 더러운 체액을 뒤집어쓰고 눕지도 앉지도 그렇다고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온몸의 피를 쏟으며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어갔다. 여자라고해서 그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낱같은 생명이 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언제 끊어질지 알 수 없는 위태하게 매달려있는 생명이었다. 살아있는 남자라고는 예서가 유일했다. “웃으시지요. 작은 마나힘은 웃으시는 게 보기 좋으십니다.” 아후는 더욱 하얗게 질린 예서를 야릇한 시선으로 내리누르며 웃었다. 그 때였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아슬아슬하게 겉돌고 있던 여유롭고 평안한 기운이 순식간에 깨졌다. 예서는 긴장으로 몸을 굳혔고, 아후는 차가운 눈으로 문 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후.” 열려진 문 앞에는 핏발이 선, 광기어린 눈의 사내가 있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몸, 누런 이빨, 오랫동안 감지 않아 떡이 지고 엉킨 머리의 사내는 아무 거리낌 없이 방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예 아후의 눈이 점점 검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사내는 그런 아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릿하고 거만한 표정으로 아후를 향해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사내의 오랫동안 씻지 않은 몸에서는 악취와 피비린내, 그리고 교접의 지독한 냄새가 났다. 낡고 더러운 천 조각 하나만으로 겨우 가리고 있는 사내의 국부에는 검붉은 피와 축축한 체액으로 얼룩져 있었다. 예서는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와 구역질에 고개를 돌렸다. “넘겨주기로 했잖아.” 이를 가는 남자의 목소리는 쇠를 긁어 대는 거친 소리와 흡사했다. “..............” 그러나 아후는 조금 전과 다름없이 그저 차를 홀짝거릴 뿐 사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넘겨주기로 했잖아!!!” 남자는 아후의 손에 들린 찻잔을 쳐냈다. 그예 아후가 아닌 예서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사내는 핏발이 선 번들거리는 눈으로 입에 거품을 물곤 예서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나 곧 그 걸음은 아후 뒤에 있던 자들 중 하나로 인해 막혔다. “왜 안 넘겨?! 이건 누이의 몫으로 나한테 주기로 했잖아!! 고작 열여섯이었어. 세상이 온통 무지갯빛으로 되어있는 줄 알던 아이였단 말이다!! 비천하다 손가락질 받던 가노였지만, 그 누구보다 순수했고 그리고 예쁜 아이였는데, 그걸 꺾은 게 그 놈이었어. 주인이라는 자가 꺾어 버렸다고!!! 살려 달라는 나를 광산에 처넣은 것도!! 아악!!!! 나는 내 아버지가, 내 어머니가 광산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나가는 것을, 어린 동생들이 배고픔에 허덕이다 죽은 쥐 한 마리 때문에 몸을 파는 것을 봐야 했다. 왜 어째서 우리들은 죽어야 했지?! 단지 내 동생은 사랑을 한 것뿐이었는데, 그러니까 나는 갚아야겠다. 그러니까 저 놈을 내 놔!!” 당장이라도 찢어죽일 듯 사납게 일렁이는 눈으로 예서를 보며 사내를 울부짖었다. “축제는 이 정도에서 끝을 맺는 게 좋겠군요.” 서슬이 퍼런 사내로 인해 기가 질려 하얗게 바랜 예서를 보며 아후는 부드럽게 달래듯이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남자에게 짧게 손을 들어보였다. “주인에게 짓는 개 따위는 필요 없으니까요.” 아후의 작은 끄덕거림에 아후 뒤에서 존재감 없는 그림자처럼 팔짱을 끼고 있던 사내의 칼집에서 칼이 빠져나왔다. 그리고 단 한 번이었다. 죽어가는 사내의 믿을 수 없다는 경악에 찬 눈을 보면서도 아후의 미소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런 사내와 아후를 번갈아 보는 예서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고, 덜덜 떨리는 다리로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방안에 진동했다. “사람은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그걸 모르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지요. 두 오누이는 그걸 몰랐던 겁니다. 열여섯 밖에 안 된 계집은 반반한 얼굴 하나 믿고 주인의 침실로 뛰어 들어가 죽었고, 그 계집의 오라비라는 자는 그 주인의 마나힘을 탐내다가 죽은 것이지요.” 방안은 오직 쥐 죽은 듯한, 싸늘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곧 예서는 속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먹은 것이 없기에 그저 헛구역질만 할 뿐이었다. “그 점에서 전 마나힘의 주인을 높이 삽니다. 가노의 계집 따위를 취하는 것은 쓰레기들뿐입니다. 쓰레기는 치워야 하지요. 안 그렇습니까? 작은 마나힘.” “..........너 미쳤어.” “그런가요? 글쎄요.” 아후는 그저 덤덤한 시선으로 피식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차빈 본가는 황량한 폐가처럼 을씨년스러웠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죽음과 새 황제의 등극 후 반역으로까지 몰리며 차빈 부친이 그의 사병들과 함께 도륙을 당했다. 그리고 본가에 감금된 차빈은 새 황제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처지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 모든 일이 고작 열흘 상간으로 생긴 일이었다. 차빈의 방문 앞에는 항시 무장 군인들이 굳건하게 지키며 그 누구의 출입도 금했다. 오직 하루 두 번 식사를 위한 출입만이 허용될 뿐이었다. 식사 시중을 드는 아이는 고작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어린 사내아이였다. 황명으로 황궁 수비대가 본가를 접수한 날, 수비대 책임자는 땔감을 정리하고 주방의 허드렛일을 도와주며 밥을 얻어먹고 사는 아이에게 차빈의 식사시중을 들게 했다. 그리고 아이는 힘겹고 서툰 걸음으로 매번 군소리 없이 이 일을 했다. 스윽. 밖에서 들리는 기척에도, 방문이 허락 없이 열리는 것에도, 차빈은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미동도 없이 묵묵히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는 차빈의 얼굴은 창백했다. 아이는 그런 차빈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며 쟁반을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리고 한참을 안절부절못하던 아이는 눈을 내리깔고 겨우 용기를 내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나리께서 ....조 ...조금 ...이라도 ......드시라고 ...했어요.” “.............” “드시고 기운 내시라고.......” 차빈의 눈치를 보는 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차빈은 천천히 눈을 떴다. 쟁반 위의 음식은 역시나 오늘도 경비병들이 샅샅이 뒤진 흔적이 역력했다. 차빈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차빈의 목에서는 갈라지고 컬컬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어가거라. 생각이 없다.” “사... 살아 계시다고 ....전하라고 ....했어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부들거리는 두 손을 마주잡고 아이는 간신히 입에서 말을 밀어내었다. “지금 뭐라 했느냐?!” 아이의 말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차빈으로 인해 탁자 위의 쟁반이 뒤집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그러나 차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살아 계신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그러니까........ 어르신께서도 사셔야 한다고......” 오직 아이의 말만이 귓속을, 머릿속을 울릴 뿐이었다. “집어 치워!!! 당장!!! 다른 것으로 가져와!!!” 한참을 손에 잡히는 대로 사납게 집어던지던 여인은 이내 지쳤는지 씩씩거리며 의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피해있던 가노들의 쪼르륵 다가와 재빠르게 움직이며 그녀가 어지럽힌 것들을 치웠다. 여인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런 가노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쥐새끼 같은 것들. 물이나 가져와.” 그러나 곧 여인은 지겹다는 듯 손을 내저었고, 그런 여인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가노 중 하나가 황급히 잔에 물을 담아 여인에게 공손하게 바쳤다. “윽! 네 이 놈!! 이것도 물이라고 가져온 게야?!!!” 한 모금 입에 머금자마자, 서늘한 기운이 사그라진 역한 물 냄새가 입안에 감도는 듯한, 불쾌함에 여인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잔을 가노의 얼굴에 집어 던지며 악을 썼다. “이런, 이런 어찌 이리도 화가 나셨습니까?” 무흔은 언제 들어온 건지, 기척도 없이 여인의 뒤에 서 있었다. “대체 아후의 생각은 뭐야?!! 차빈가를 그렇게 망가뜨려서 어쩌겠다는 거야?!! 누가 그 따위로 망가진 것을 가지겠다고 했어?!!” 이 여인이 나누의 동복누이인 마누아다. “설마요. 버릇을 가르치는 중입니다. 그렇게 뻣뻣해서야 어찌 황녀의 반려로 합당하겠나이까.” “잘 전해.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알겠습니다.” 무흔은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황녀에게 예를 표했다. 황녀는 그런 무흔을 매몰차고 사나운 눈초리로 노려보다 곧 비릿한 웃음을 입가에 떠올렸다. 그리고 도톰하게 부르기 시작한 배를 어루만지며 달콤한 목소리로 황녀는 입을 열었다. “이젠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어.” 나른하고 농염하게 자신의 배를 쓰다듬는 황녀에게 무흔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가볍게 끄덕였다. 그 확신에 찬 대답에 만족한 듯 황녀는 지그시 웃으며 몸에서 힘을 빼며 노곤한 숨을 내뱉었다. “전해. 내 뱃속의 아이 아버지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시에는 그만한 대가를 확실히 치러야 할 거라고 말이야. 알아듣겠어? 나는 가져야겠어. 그러니까 내 것에 하나라도 흠집을 내지마.” “여부가 있겠나이까.” “나가봐.” 무흔의 뒷모습에 마누아는 포만한 웃음을 띠며 천천히 일어나 침상 쪽으로 걸어갔다. 마누아가 침상에 드리워져 있던 커튼을 걷어 올리자 침상에 누워있던 벌거벗은 사내 둘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황녀는 요염하게 웃으며 천천히 침상으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털 하나 없는 민머리에 두꺼운 입술과 툭 튀어나온 광대뼈의 험상궂은 사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황녀는 남자의 옆에 누웠다. “차빈이 너만은 해야 하는 데 말이야.” 비정상적으로 큰 사내의 남근을 만지작거리며 황녀는 웃었다. 꽤나 오래전부터 침을 흘리고 있었음에도 마누아는 막말로 차빈을 후릴 수가 없었다. 혀를 내두를 만큼 잔인한 그 성품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강직하고 금욕적인 성격 때문이었고, 그 호락호락하지 않은 성품만큼 그 집안의 위용 또한 만만치 않아서였다. 그래서 차빈을 본 날은 더욱 침상에 노예들을 끌어들이며 그 어떤 광란의 짓거리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그 차빈이 조만간 자신의 것이 된다. 마누아는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마누아는 미치도록 궁금하다. 그 몸은 어떨까. 마누아는 차빈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몸이 뜨거워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몸이 절로 떨렸다. 밑이 벌름거리며 순식간에 젖어들었다. “그래. 너만은 해야겠지.” 마누아는 자신의 손길에 벌써 힘을 받는 침상노예의 남근을 만지작거리며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침상에서는 교접하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더... 좋아...... 하앙.......” 민머리의 사내는 황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박고 마누아 아래에 달려있는 팽만한 입술을 벌려 그 곳을 개처럼 핥았다. 황녀의 밑은 남자의 타액과 자신의 애액으로 질척거렸다. “하악!! 좋아!! 좋아!! 더!! 더!!!! 아악!!!” 사내의 혀가 마누아의 속을 드나들자, 황녀는 유연하게 허리를 흔들며 새된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다른 사내 하나는 그런 황녀의 가슴을 빨았다. 황녀는 자신의 가슴을 빨고 있던 사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황녀는 스스로 몸을 돌려 엎드렸다. 그러자 황녀의 밑을 빨던 사내가 단숨에 마누아의 안을 채웠다. 마누아는 자신의 안을 꽉 채운 남자를 물어뜯듯이 빨아들이며 허리를 미친 듯이 흔들었다. 벌름거리며 감질나던 감각은 이내 뜨거움에 화끈 달아올랐다. “하악!!!” 엎드려 있는 황녀의 몸속으로 빠르게 드나들던 사내가 단말마의 신음과 함께 배설하고 황녀에게서 떨어져 나가자 다른 사내가 곧장 황녀의 몸으로 들어왔다. 황녀는 새로운 사내가 자신에게로 들어오자 더욱 교성을 지르며 격렬하게 허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내가 강하게 밀어붙이며 마누아의 몸속에 토정하자 마누아는 허리를 활처럼 휘며 외마디 신음을 내질렀다. 사내가 떨어져 나가자 마누아는 남자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자신의 애액과 사내의 정액으로 더러워진 남근에 춥춥거리는 음란한 소리를 내며 빨았다. 또 다른 사내는 성기가 훤히 보이도록 엉덩이를 높이 들어 흔들며 남근을 빨고 있는 마누아의 밑을 핥았다. “킥킥. 그러고 보니 새삼 아후의 몸이 그립군.” 그리고 뜬금없이 생각나는 아후로 인해 마누아는 야비할 정도로 낮은 웃음을 흘렸다. 몇 달 전, 단 한 번 아후가 마누아를 품은 적이 있었다. “불러들일까.” 그 때, 차빈의 반려로 인해 발광하는 마누아 자신에게 아후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를 가지라고. 그러나 마누아는 그 얼토당토하지 않는 말을 꺼내는 아후에게 포악을 부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후는 단 한 번도 허튼 소리를 그 입에 담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의 입만은 정직했다. 도리어 그 음흉한 목소리에 차갑게 노려보는 마누아를 보며 아후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후에 떨어진 아이를 가지면 차빈을 마누아의 품에 안겨 주겠다는 아후의 달콤한 덧붙임에 마누아는 망설임 없이 그 날 처음으로 남자들의 정액을 자신의 몸에 뿌렸다. 방탕한 생활 속에서도 아이에 대한 두려움에 항상 몸 밖에다 배출하게 했지 절대 허락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사내들의 정액이 몸에 퍼지는 순간 마누아의 입에서는 키득거리는 섬뜩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빈을 갖는 도구로서 아이라, 의외로 괜찮았다. 이 아이가 누구의 씨든 관계없다. 어차피 자신의 핏줄로 차빈의 뒤를 이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정사를 보면서도 조금의 동요도 없는 그 얼굴을 무너뜨리고 싶어서 마누아는 명령을 했다. 자신을 안으라고. 그래서 지금 누구의 씨인지 알 수 없는 뱃속의 아이를 아후에게 밀어 붙이며 채근할 수 있는 건 그 때문이었다. 일종의 담보라고나 할까. “좋아.” 자신의 혀 놀림으로 불뚝거리는 남자의 남근에서 고개를 들며 마누아는 눈앞의 남자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영문 몰라 하면서도 침상노예는 마누아를 향해 백치 같은 웃음을 흘렀다. 이 침상에서 넷이 뒹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노예의 정액이 흥건한 자신의 속을 드나들던 아후의 표정을 마누아는 잊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아후의 몸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꽤나 여자를 안아본 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금 마누아의 밑을 핥고 있는 노예에게 깔려 헐떡이던 아후의 얼굴이 더 큰 즐거움이었다. 자신의 치부를 마누아에게 적나라하게 내보이며 고통과 수치로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아후의 얼굴이 말이다. 그리고 사내의 정액으로 가득한 나루의 애널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휘젓는 행위도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킬킬. 다음에는 말이야. 내가 품어야겠다. 남근의 대체물 따윈 주위에 깔렸으니 말이다. 아니 그러느냐?” 마누아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다리를 벌려 자신의 치부를 당당하게 내보였다. 자신의 아래에 있는 팽만한 입술을 벌려 사내들에게 보이며, 자신의 애액과 사내들의 정액으로 흥건한 자신의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황녀는 허리를 돌렸다. 마누아의 개들은 그녀의 치부를 보며 침을 흘렸다. 마누아는 자신의 밑만 봐다 발정하는 이 짐승들이 좋았다. 그 누구와는 다르게. 개들은 곧 황녀의 손짓에 그녀의 몸속에 자신을 묻었다. “하아, 애를 가져서 좋은 건 더 이상 애가 생길까 하는 걱정이 없다는 거다. 하하하.” 같은 시간, 자신의 손에 들린 파피루스를 최대한으로 작게 마는 후치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것은 고작 어른 손가락 만한 두께와 길이였다. 후치는 그걸 얇은 기름종이에 싸서 그 위에 오일을 발랐다. 후치가 작업하는 탁자 위의 촛불은 조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엎드려. 엉덩이 더 들고.” 후치의 말에 사내아이는 엉덩이를 봉긋 세웠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있는 힘껏 엉덩이를 높이 쳐든 그 모습에 후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러나 곧 모주간 나이의 매서운 눈초리에 후치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좀 아플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알았지?” 후치는 어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작은 두루마리 위에 다시금 오일을 바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내아이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후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아이의 몸속에 집어넣었다. “아이고.” 이물감에 아이는 걷기가 영 힘들었다. 그러나 혹여 빠질 새라 순간순간 멈춰 서서 애널에 힘을 주었다. 참을 수 없는 배설의 욕구로 인해 아이의 얼굴은 뻘겋다. 몸을 말고 겨우겨우 걸음을 옭기는 아이의 손에 들린 쟁반은 위태위태했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방문 앞에서의 검문은 엄했다. 사내아이는 간당간당한 걸음으로 방안으로 들어서자, 곧 아이 뒤로 방문이 닫혔다. 아이는 방문 옆에 급히 쟁반을 내려놓고 차빈에게 건성인 고개를 숙였다. “전갈.... 끄응. 이래요.” 아이는 잰 걸음으로 방안 구석으로 가서 그대로 쪼그리고 앉아 배에 힘을 주었다. 힘을 잔뜩 준 항문만큼 아이의 얼굴 또한 비장하고 진지했다. 그러나 마르고 작은 어깨는 한줌도 안 되어 보였다. 앙상히 드러난 갈비뼈에 머리카락은 푸석거리고 입술은 메말라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그런 얼굴 정 중앙에 있는 코는 오뚝하고 반뜻했다. 비루한 아이가 천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코 때문인 듯싶다. 잠시 후, 아이는 부끄럽다는 듯 자신의 몸속에 있던 것을 차빈 앞으로 내밀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 파피루스를 펼치며 무심히 묻는 자신의 말에 대답이 없는 아이를 차빈은 힐금 쳐다보았다. 아이는 아이 자신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듯이 푹 수그리고 있었다. 차빈은 의아한 눈빛으로 아이를 쳐다보았다. “묻지 않느냐?” “.........그런 거 없어요. 어르신.” 아이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답을 밀어내었다. 차빈의 꾸중을 각오한 듯 아이의 어깨는 잔뜩 움츠려 있었다. “왜냐?” “.....................” “그런가.” 이름이 없는 이유는 하나다. 차빈은 이름이 없다는 아이의 말을 흘려들어 아이에게 되묻게 된 게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차빈은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을 지웠다. 이름이 없는 존재는 가노보다 더 천한 존재다. 차빈은 파피루스에 집중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차빈의 손이 부들거리며 파피루스를 움켜쥐었다. 차빈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런 차빈의 손아귀에서 아이는 냉큼 파피루스를 빼앗아 목으로 삼켰다. “나이 나리가 어르신께서 다 읽으시면 먹어 치우라고 했어요.” 이 세계에서는 물이 담긴 모든 곳에는 각이 없었다. 룬나의 호수도, 신전의 레탁크도, 그리고 지금 이곳의 욕탕까지. 그것은 차빈의 본가나 본성에서도 매한가지였다. 욕탕 주위에 있는 보초병처럼 목을 세운 네 마리의 커다란 뱀의 입마다 네 개의 휘어진 이빨이 날카롭게 버려진 칼처럼 솟아있었고, 그리고 그 입안에서 탕으로 끊임없이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꽤 많은 양의 물이 한꺼번에 탕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지만, 탕은 넘치지 않았다. 거기다 탕 안에는 이름 모를 하얀 꽃들과 무수한 작은 잎사귀들이 물결에 빙그르르 떠다니며 은은하고 나른한 향을 풍기기까지 했다. 그런 탕 주위를 가노들이 기척을 죽이고 돌아다녔고, 예서는 지친 듯 탕 안의 한 쪽 구석에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잠시 후, 나이가 지극한 가노 하나가 예서를 욕탕에서 말없이 일으켜 세웠다. 가노라고 하기에는 단아한 품격마저 느껴지는, 일반 가노들과 확실히 격이 달라 보이는 노인이었다. 노인은 예서를 욕실 제일 구석진 곳, 사방이 투명한 베일에 가려져 있는 곳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커다란 침상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목욕을 마친 예서의 하얀 몸은 발그스름하게 혈기가 돌아 붉은 구릿빛의 사람들 속에서 유독 더욱 또렷해 보였다. “이건 안 되는데요.” 예서는 허리에 둘린 수건을 치우려는 가노의 손을 막았다. 벌거벗은 사내 몸을 왜 그리도 못 봐서 안달들일까. “그럼, 그건 그대로 두시고, 이리로 일단 누우시지요.” 예서는 피곤한 몸을 침상에 털썩 뉘였다. 몸보다 정신이 더 너덜너덜해진 예서는 그저 깊은 잠속에 빠져 모든 것을 잊고만 싶었다. 예서는 왜 이 밤 황궁에 들어와 단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보다 확신에 가까운 불길한 예감이 먼저 들었다. 영 뒤가 좋지 않다. 그러나 곧 예서는 마음을 비웠다. 의문은 앞으로 나가다보면 풀릴 터이고, 일이 닥치면 닥치는 대로 부딪히면 그뿐이다. 예서는 그렇게 자조했다. 아무리 지금까지 당한 일보다 더한 일도 있으랴. “윽!” 고운 토기 그릇에 담긴 반투명한 젤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끈적거림과 함께 곧 사그라졌다. 한결 매끄러워진 예서의 피부에는 예서가 탕에서부터 묻혀온 나른한 향을 솔솔 풍기고 있었다. 가노들은 엎드린 예서의 발가락 하나부터 손가락 하나까지 세심하게 예서의 피부를 손질했다. 그러나 수건 속 둔부로 불쑥 들어온 가노의 손길에 놀란 예서가 “으웩!!”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벌떡 일어나 그 손을 뿌리치자 도리어 다른 가노들이 그런 예서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예서를 강제로 눕히며 둔부를 그 어느 곳보다 세심하게 쭈물거렸다. “한 번만 더 해라. 그럼 아주 그 손목을 아작 내줄테니까.” 예서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 모아 그들을 밀치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씩씩거리며 주위를 둘레둘레 둘러보며 무기를 찾았다. “너희들은 그만 나가 보거라. 그리고 마나힘께서는 그거 내려놓으시지요.” 노인은 두 손을 모은 공손한 자세와는 달리 목소리는 굵고 근엄했다. 예서는 슬그머니 젤이 담긴 토기를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허리 아래를 겨우 가린 예서를 청동거울 앞에 세운 가노들은 예서에게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가노 중 하나가 앞의 국부만을 가리는 이곳 특유의 속곳을 들고 예서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건 제가 합니다.” 예서는 브리프를 들고 있는 가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노는 예서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 노인이 자신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예서의 손에 브리프를 넘기고 물러났다. 예서가 브리프를 걸치자, 노인이 예서의 허리에서 수건을 치웠다. 그러자 가노들이 기다렸다는 예서의 허리에 투명하게 비치는 천을 둘렸다. 이는 예전 예서가 한 번 본적이 있는 천이었다. 그리고 그 짧은 하의를 고정하는 굵고 화려한 백금의 띠도, 적나라하게 비치는 브리프와 둔부를 가리는 흰 장방형(長方形)의 가리개도, 가슴과 어깨를 감싸던 결이 곱던 비단도, 열두 개의 보석이 아름답던 정방형(正方形)의 가슴장식도 예전 예서가 본가에서 입궁을 위해 입었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더불어 오른쪽 팔뚝, 그리고 오른쪽 허벅지를 장식하던 액세서리마저 그 때와 같았다. “역시. 다시 봐도 구미가 당기는군요. 한 번 품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아후다. 아후는 거침없이 방안으로 들어서며 빈정거리듯 과장된 감탄을 내뱉었다. 느물거리는 표정으로 아후는 보란 듯이 일부러 예서를 훑으며 예서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나하고 같은 물건 달린 사내새끼가 찝쩍거리는 거 하나도 반갑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냥 꺼져라.” 이제 예서가 하루가 다르게 느는 것 책 읽는 속도와 독기(毒氣)뿐이다. “그렇습니까?” 예서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아후를 예서가 살벌하게 쏘아보며 ‘탁’ 소리가 나도록 그 손을 쳐내자, 아후는 자신의 두 손바닥을 들어보였다. 그리고 이빨을 보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가노를 취하는 자는 쓰레기다. 같은 사내에게 다리를 벌리는 자 또한 매한가지다. 그런데 어째서 이 이계인은 신경이 쓰이는 걸까. 왜 끊임없이 아후 자신은 이를 보면서 이가 쓰레기임을 자신에게 주지시키고 있는 걸까. “오늘밤은 아주 즐거우실 겁니다. 작은 마나힘.” 예서의 귀에 아후는 이죽거리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왜 나는 발정을 하는 거지? 차빈은 구역질이 날 만큼 역한 냄새도 인식할 수 없었다. 당연하다. 맡아지지 않았으니까. 차빈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건 오직 하나였다. 예서라는 존재,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앞장서 걷는 아이는 불안한 시선으로 그런 차빈을 확인하고자 어수룩한 발걸음으로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아이에게 차빈은 고개를 끄덕여 주며 안심시켰다. 그렇게 구름에 가려진 흐릿한 달빛에 의지하며 차빈과 아이는 하수도를 걸었다. 주변에서 인기척이라도 날라치면 차빈은 아이를 품에 안고 그늘에 숨어 그 숨을 죽였다. 하수도는 정문을 빼고 본가 내에서 밖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기에 하수가 빠져 나가는 본가 담벼락에도 철저한 감시가 뒤따랐다. 장정 가슴 높이의 하수도로 인하여 차빈은 허리를 펼 수 없는 낮은 자세로 걸어야만 했다. “두렵지 않느냐?” 차빈의 질문에 아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진짜 두렵지 않아?” 이번에는 작은 고갯짓을 하며 아이는 연거푸 끄덕였다. “배고픈 게 제일 무서워요, 어르신. 배고플 때는 막 여기가 아파요. 얼마나 아픈데요.” 아이는 자신의 명치를 가리켰다. 그리고 차빈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가 좋아요. 밥도 넉넉히 주고, 구대기도 없어요.” “그래?” “여기가 정말 좋아요. 마구 욕은 해도 안 때려요. 사람들은 이상해요. 아픈데 제가 아프다고 하면 더럽다고 더 때려요. 그래서 전 가만히 있어요.” “왜냐?” “그래야 덜 때려요. 맞는 게 얼마나 아픈데요.” 아이는 질문을 하는 차빈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여기서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저 일도 잘 해요. 진짜에요.” 아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간절하게 말했다. “..............” 차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가노나 그 이하의 인간들에 대해서 자신은 단 한 번도 그 마음에 담아둔 적 없었다. 마음 쓸 이유가 없지 않는가. 부리는 가축에게 주인이 주는 건 애정과 관심이 아니라, 그저 먹이와 명령일 뿐이라 생각했다. 기르는 존재와 키우는 존재는 엄연히 다르다 여겼다. 그러나 이도 사람이었던가. “그래. 그러마.” 차빈은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툭툭 쳤다. “가자.” 지금 두 사람이 지나는 이 길은 아이가 의원 후치에게 무심결에 알려준 길이다. 항상 혼자 있던 아이는 심심하면 본가의 외진 곳들을 이곳저곳 살피며 돌아다녔고, 하수도 또한 예외는 아니었든지 어찌하다 그 곳에서 작은 틈 하나를 발견했다. 하수도의 일부는 덮개가 없이 흐르고 있지만, 그 구간은 매우 짧았다. 틈은 덮개가 덮여있는 부분, 그 중간쯤이었다. 일부러 만든 그 오래된 틈새의 용도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존재조차도. 감시병 또한 하수도 입구만을 지킬 뿐, 그 내부까지는 확인하지 않았기에 차빈으로서는 이만한 희소식이 없었다. 틈은 장정이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작은 횃불에 의지해서 차빈은 걸었다. 오래된 벽은 들러붙은 오물로 미끈거렸고, 바닥은 고여 썩은 물로 질척거렸다. 숨쉬기가 곤란한 정도의 악취가 풍겼다. 그리고 시궁창 쥐들은 처음 본 빛으로 우왕좌왕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도망갔다. 감시가 심해 그 누구도 아이가 말한 이 틈을 확인할 수 없어 차빈은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앞세워 본가를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길에도 끝이 있었다. 바깥이었고, 황성 성벽 아래였다. 하나의 거대한 금 세공품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방은 대낮처럼 밝힌 횃불로 인해 눈이 부셨다. 그 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정 중앙의 거대한 침상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오 황자 나누가 있었다. “커다란 진주를 그대로 조각해서 떠놓은 것 같군.” “..............” 눈앞의 거대 비계 덩어리는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다. 예서가 방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끈적이는 눈으로 잡아먹을 듯이 훑더니만 지껄이는 소리가 고작 저건걸 보면 말이다. 거기다 이젠 한술 더 떠 뭐 씹은 듯 잔뜩 일그러진 떨떠름한 예서의 표정도 보이지 않는 건지, 돼지는 침 흘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나힘. 나는 오 황자 나누다. 전 황제의 아들이고, 현 황제의 형제지. 그대를 너무 오래 기다렸더니 허기가 져서 쓰러질 지경이야.” 예서의 하얀 피부가 조금 전의 손질로 인해 원래의 건강한 빛이 더욱 화사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부드럽게 착착 감기는 농염한 여인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예서가 아무리 덜 여물었다고는 하나, 건강한 사내아이지 않던가. 여인보다 딱딱하고 단단하다. 그러나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손등으로 예서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누는 감탄했다. 예서는 나누를 똑바로 노려보며 그 역겨운 손을 쳐냈다. 사내를 사내로 보지 않는 이 빌어먹을 나라에 예서는 진저리가 쳐졌다. 도대체 자신의 어디가 이들의 구미를 당기는 걸까. 피부 색깔이 다른 이계의 인간이라는 것? 고작 그 걸로? “돌았군. 비렁뱅이라 진주를 구경도 못해봤냐?” 그러나 그런 예서를 보며 나누는 낄낄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한 발자국 떨어져서 예서의 전신을 핥듯이 훑었다. 그 진득이는 느낌에 예서는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었다. 시원스레 한 대 패면 어떻게 될까. 아니다. 패자. 패고 나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럼 벌려 볼까. 간혹 형들과 벌이는 드잡이에선 늘 맞는 역이었지만, 그래도 확실히 한 대는 팼다. 쥐도 죽을 때는 찍소리를 낸다. 하물며 사람인데 ‘나 잡아먹어라.’ 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겠는가. 단지 무지하게 맞는 가운데 때리는 한 대라, 그다지 효율적이라 할 수 없긴 하겠지만. “하하하. 작은 마나힘. 제법이구나. 나쁘지 않은 걸.” 나누는 예서의 옆으로 다가와 드러나 있는 예서의 골반을 쓸며 침을 삼켰다. “손 치워라.” “뭐라~.” 그리고 예서의 노기 품은 음성에도 나누는 그저 능글거릴 뿐이었다. “못 들었냐? 이 손 치우라고. 위로 쏠리거든. 아니면 그 더러운 면상에다 해 줄까.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이 더러운 개자식아.” 예서는 이를 갈며 나누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골반을 매만지는 나누의 손을 차갑게 쳐냈다. 예서는 보란 듯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후후후. 마나힘의 값을 하는 건가. 재미있군. 더러운 개라.......” 나지막이 웃는 나누의 목소리에는 저 바닥에서부터 뭉클뭉클 피어오르기 시작한 위험스러운 살기가 서리고 있었다. 얼굴은 평온했으나, 눈은 광기로 번뜩였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예서가 긴장한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치고 들어왔다. 그 육중한 몸에서 나온다고 결코 상상할 수도 없는 빠른 속도였다. 퍽!!!! 미처 피하지 못한 예서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넘어진 예서의 배를 나누는 거침없이 짓밟았다. 그리고 자신의 화가 풀릴 때까지 예서에게 잔인한 폭력을 가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나누는 몸을 구부리고 기침을 해대는 예서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윽!!!” “나는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다. 그대를 기다린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지 않나. 허나 건방진 건 못 참아. 나는 그대의 고운 피부를 예뻐해 주고 싶은 거지 상처를 내고 싶은 것은 아니야. 알아듣겠나?”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는 예서를 보며 나누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예서의 피를 찍어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맛있군.” 예서는 소름이 끼쳤다. “입술이 마치 꽃잎 같구나.” 나누는 느물거리는 음성으로 예서의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 예서의 귀를 핥았다. “아악!!!! 소름 끼치는 그 따위 소린 집어 치워!! 귀가 썩을 것 같잖아!! 이 돼지 놈아!! 비켜!!” 예서는 고개를 휘저으며 악을 썼다. 버둥거리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나누의 손을 뜯어내려했다. 그러나 나누는 야비하게 웃으며 손바닥으로 예서의 얼굴을 후려칠 뿐이었다. 예서는 나누의 난폭한 폭력에 머리를 바닥에 심하게 부딪쳤다. 예서는 구토가 이는 몸을 옆으로 말고 헛구역질을 했다. “욱!!” “앙탈이라......” 그런 예서의 턱을 움켜쥐며 나누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빌어먹을.” 예서는 끔찍했다. 차빈이 자신을 건드릴 때도 싫었지만, 진저리가 날 정도로 이런 참혹한 기분을 맛보지는 않았었다. 나누가 만지는 지금처럼 자신이 더럽혀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견딜 수 없는 모멸감과 수치심으로 예서는 주먹을 움켜쥐고 그리고 나누를 후려쳤다. 퍽!!!!! 그리고 의외로 방심하고 있던 나누의 턱에 예서의 주먹은 정확하게 꽂혔다. 애석하게도 누워있는 자세로 인해 완전하게 체중을 실은 주먹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혼신을 다한 일격이라 육중한 그 몸이 휘청거리며 나누의 손에서 힘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 틈에 나누를 밀어내고 예서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조금 전 머리를 심하게 바닥에 부딪힌 것이 문제였던가. 아찔한 현기증에 예서는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아픈 부위를 만진 손에는 피가 흥건했다. 그리고 그 틈을 나누는 놓치지 않았다. “윽!!! 이거 놔!!!” 피에 젖은 예서의 머리카락을 거칠 것 없이 움켜쥐곤 아무 망설임 없이 나누는 예서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네 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내가 할 소리를 왜 네 놈이 하냐?!” 악귀같이 예서에게 으르렁거리며 나누는 달려들었고, 예서도 지지 않고 사지를 휘둘렀다. 두 사람은 엎치락뒤치락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나누의 의중을 알기에 예서는 더욱 발악했다. 그렇지 않았다만, 맞는 것이 싫어서라도 예서는 말로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놔!!! 비켜!! 아악!!!!!” 그러나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사람이었다. 차빈도 컸지만 나누는 거대하기까지 했다. 차빈의 다부지고 군살 없는 몸에 비해 나누는 거대한 비계 덩어리였다. 예서의 힘으로는 버거웠다. 몸부림치는 예서를 누르며 나누는 예서의 옷을 뜯어냈다. “침상보다 여기가 더 자극적이군.” 나누는 예서를 내리누르며 입기보다 벗기라고 입은 듯한, 가벼운 옷을 잡아 뜯었다. 예서는 수치스러움에 몸부림을 쳤다. 차빈은 한 번도 예서 자신의 나신을 남에게 보인 적이 없다. 대낮, 그것도 약초 정원에서 차빈에게 안길 때조차 예서는 지금만큼 수치스럽지는 않았다. 몸부림치며 모질게 발악하는 예서의 중심을 나누는 움켜잡았다. 그예 예서의 눈이 경악으로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색깔이 다르군. 갓난아이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색이다. 여자들도 가지지 못한 색이지.” 자신의 중심을 꾹꾹 누르며 잡아 뜯듯이 주물거리는 나누로 인해 예서는 헐떡거렸다. 지독히 아프다. 발을 들어 차내려 해도 여의치가 않았다. 예서의 다리가 몸서리쳐지는 고통으로 자꾸 오그라들었기 때문이었다. “건들지 마!! 허억!!” 예서의 반항이 점점 자자 들었다. 중심을 잡힌 예서로서는 반항하기가 수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몸을 틀며 나누의 손에서 벗어나려는 예서의 허벅지를 나누는 자신의 다리로 내리 눌렀다. “그럼. 그곳도 같은 색이겠군.” “비켜!! 비켜!!!! 아악!!!” 나누는 예서의 중심을 보란 듯이 만지작거리며 몸을 숙여 예서의 귀에 속삭였다. 눅눅하고 축축한 입김에 예서는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예서는 울부짖었다. 그런 예서의 턱을 잡고 나누는 비열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예서의 입술을 빨았다. 그러나, “욱!!!” 나누는 예서의 입술에서 황급하게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예서는 피 섞인 침을 나누의 얼굴에 뱉었다. 그리고 나누는 거침없이 예서의 얼굴을 후려쳤다. 예서는 부들거리는 입술을 악물고 시립도록 차가운 눈으로 나누를 노려보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예 더한 분노가 나누를 집어삼켰고, 나누는 자신의 화가 풀릴 때까지 예서의 얼굴을 후려 갈겼다. 그런 나누에게 주먹을 휘두르던 예서는 곧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그 손길을 피하려했지만, 나누는 예서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예서의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그렇게 계속되는 폭력에 예서는 정신을 잃었다. “...............” 아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작은 마나힘은 되도 안 되는 저항 따위를 하는 걸까. 어차피 사내 아래에서 신음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던가. 그것이 차빈이던 나누던 그다지 의미가 없을 터인데, 무엇 때문일까. 아후는 정녕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왜 자신은 지금 나누를 죽이고 싶은 걸까. “하아. 하아.” 늘어진 예서의 머리를 거칠게 패대기치며 따끔거리는 자신의 입술을 나누는 천천히 손가락으로 확인했다. 그 손가락 끝에 피가 묻어났다. 그 피를 나누는 자신의 손가락으로 비비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밑에 깔려있는 예서를 내려다보았다. 피가 묻은 나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퍽!!!! 퍽!!!!! 퍽!!!!!!! 무자비한 나누의 폭력으로 예서의 온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피멍으로 얼룩졌다. 그리고 예서는 몸을 말고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나누의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폭력에 정신을 잃은 예서는 또 다른 폭력으로 깨어났다. 악몽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주위의 그 어느 누구도 그런 나누를 말리지 않았다. 주먹과 발길질에 지친 나누는 손에 잡히는 모든 것으로 짐승의 괴성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예서에게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했다. “윽!” 폭력에 지친 나누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예서에게 다가가 가느다란 신음을 내뱉고 있는 예서의 머리카락을 다시금 움켜쥐었다. 떠지지 않는 눈을 떠서 예서는 나누를 여전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런 예서를 보며 나누는 이를 갈았다. “이 내가 직접 길들여 주지. 마나힘. 내 발바닥을 핥게 만들어 주마. 반드시.” 나누는 예서의 머리카락을 움켜준 그대로 일어섰다. 머리카락이 뽑혀져 나가는 듯한, 그 지독한 아픔에 예서는 나누의 손을 풀려고 발버둥을 쳤다.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차도, 그러나 나누는 요지부동이었다. “하나도 안 웃기거든. 그러니까 이제 그만 작작 해!!” 나신의 예서는 지금 자신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정신이 없었다. 극심한 고통에 뼛속까지 저렸다. 나누는 성큼성큼 걸어가 예서를 침상 위로 집어던졌다. 그 때였다. 방문이 벌컥 열렸고, 그리고 거기에 분노한 차빈이 한 손에 칼을 들고 서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나누는 차빈을 보고서도 놀라기는커녕, 도리어 반갑다는 듯이 입을 비틀었다. 예서는 눈을 깜박이며 차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차빈도 예서를 보았다. 바닥에 흩뿌려진 피와 예서의 엉망인 몸은 그 동안 얼마나 격렬한 저항을 했는지, 얼마나 모진 폭력에 시달렸는지,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차빈은 이를 악물고 칼을 고쳐 쥐었다. “...........늦었잖아. .......기다렸다고요.” 예서는 차빈을 본 순간, 자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불현 듯 깨달았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그래도 의지가 되는 건 저 사람뿐인가. 참 박복도 하다. 피식 웃음을 흘리는 예서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리고 희미한 그 목소리는 차빈의 가슴 정 중앙에 깊이 박혔다. “칼을 버리는 게 좋을 게다.” 나누는 예서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차빈에게 말했다. 통증에 예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러자 칼을 쥔 차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짓이냐? 나누. 네 놈이 감히 지금 누구를 희롱하고 있는 줄 알기나 하고 있느냐?!” 칼을 든 수십의 군사들이 어느 틈엔가 차빈을 둘러쌌다. “글쎄.” 예서의 중심을 깔고 자신의 허리를 돌리며 나누는 차빈을 비웃었다. “윽.” 예서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쾌락의 소리가 아니라 고통에 찌든 소리였다. 더불어 차빈의 입에서도 폐부를 찔린 듯한, 아픈 소리가 악문 잇새로 비집고 나왔다. “황궁, 그것도 감히 황자의 침실에 허락 없이 침입한 죄는 각오하고 있겠지.” “너야말로 감히 차빈가의 마나힘을 욕보이려 한 죄는 각오하고 있겠구나.” 차빈의 눈은 격렬한 분노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차빈의 손에 들린 칼은 나신의 예서를 깔고 앉아 더듬으며 희롱하는 나누를 죽이고자 살아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런 차빈을 나누는 조용히 비웃었다. “마나힘? 하하하. 누가 차빈가의 마나힘이더냐. 이 아이는 그저 길을 잘못 든 이계의 아이일 뿐이다. 안 그러느냐? 아후.” “예. 나누 전하.” 아까부터 이 모든 일의 원흉이면서도 한 걸음 떨어져 이 모든 것을 지켜보기만 하던 아후에게 나누는 물었다. “하, 네 놈이 정녕 실성하여 헛소리를 내뱉는 걸 보니 죽을 때가 된 모양이구나. 당장 그 더러운 주둥이 닥치고 나의 마나힘에게서 떨어져라.” 그리고 지독히도 매서운 차빈의 일갈에도 나누는 전혀 개의치 않고 비열한 웃음만을 흘릴 뿐이었다. 무엇이 이다지도 나누를 차빈 앞에서 당당하게 만든 것일까. 나누가 누구인가. 그 고고한 황가의 핏줄을 받았음에도 상상할 수도 없는 비루함을 지녀 모든 이의 경멸의 시선을 받는 자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런 자가 어째서? 한 줄기의 싸늘한 불길함이 찰나의 순간 차빈의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누가 마나힘이며, 누가 차빈이더냐. 차빈가는 이미 그 명맥이 끊어졌거늘.” “네 놈이 이제 정녕 피를 볼 생각이더냐?!” “내 눈앞에 있는 것은 고작 성수(聖獸) 히루나의 사생아뿐이거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한, 격노로 차빈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차빈은 핏발이 선 눈으로 나누를 찢어죽을 듯이 노려보았다. “훗. 몰랐더냐. 너의 태생을. 너는 차빈가의 마나힘이 성수(聖獸) 히루나와 통간하여 낳은 사생아니라.” “그렇게 원이라 하니 죽여주마.” 남자에게 있어서 자신을 품었던 어미에 대한 모욕보다 더한 모욕이 있을까. 더군다나 차빈의 모친은 황가 마나힘의 소생이자, 전 황제의 동복누이다. 여자로서 이보다 더 고고한 신분은 제국 이루에서 결단코 없다. “의심조차 아니 하였더냐.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제국 이루가 세워진 이래 황가의 피를 받은 자에게 이계의 인간을, 그것도 남자가 반려로 신탁이 내려온 일이 있었더냐. 더군다나 하나뿐이라니. 웃기는 일이지.” “닥쳐라!!!!” 차빈은 포효했다. 분노는 극에 달해 눈앞에 모든 것을 부수지 않는다면 꺼지지 않을 듯이 타올랐다. 그러나 그 만큼의 부드러움으로 나누는 차빈을 눌렀다. 이긴 자의 여유였다. 그리고 그걸 차빈은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저 비겁한 자가 확실한 패가 아니면 감히 차빈을 상대로 이런 일을 벌일 수 없다. 황제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제국 이루에서 황가와 어깨를 겨루는 또 다른 실세가 차빈가다. 비록 현재 그 뿌리의 반이 잘려나갔다 해도 아직은 건재하다. 왜냐하면 차빈가의 진정한 힘은 제국 이루가 아닌 차빈가를 자신의 근본이라 여기는 사람들에게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아직 건재하다. 그러기에 마음 한 구석에는 나누가 자신에게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인정하려는 차빈이 있었다. 차빈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런 차빈은 보는 나누의 미소는 승리감에 취해 더욱 짙어졌다. 저 밑바닥에서부터 알 수 없는 공포가 스멀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하나의 점이었던 그것은 무섭게 커져갔고, 차빈이 난생 처음 겪는 두려움의 색깔은 온몸을 옭아매는 진득진득한 검은 색이었다. 그 검은 어두움은 수많은 촉수를 거느리고 차빈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밀려오는 현기증에 차빈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자신에게 달려드는 커다란 촉수 하나로 인해 이내 차빈은 눈을 홉떴다. 그리고 그 순간, 나누의 말은 진실이 되어 차빈에게 선명하게 스며들었다. 그것은 떨쳐내고 싶으나, 자신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 지독한 절망이었다. 차빈은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며 자신을 다스렸다. 그러나 잠시 후 차빈은 이를 악물고 눈을 치떴다. “그 따위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네 놈의 그 너절하고 추저분한 목이나 내어 놓아라.”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이대로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 지금 예서가, 자신의 마나힘이 자신의 눈앞에 있지 않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후후후. 그게 히루나의 농간이었다는 구나. 널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느냐. 성수의 혼혈은 격세 유전한다는 사실을. 그러니 네 놈은 자식을 봐서는 안 되지. 암, 그렇고 말고.” 나누는 너무도 즐거웠다. 항상 자신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던 차빈이 아니었던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가진 자. “하, 그런 거짓말이 나한테 통하리라 믿었느냐. 성수는 신탁을 받을 때 거짓을 말할 수 없다. 성수는 신의 통로일 뿐 신이 아니다.” 칼을 쥔 차빈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차빈은 이를 악물었다. “푸하하하. 거짓을 말하지 않을 뿐, 거짓을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왜 인줄 아느냐.” 점점 창백해져가는 차빈을 보며 나누는 통쾌했다. “그건 생명의 언약 때문이지. 거짓은 곧 자신의 소멸을 뜻하기 때문이거든. 너도 알겠지. 언약(言約)의 성수는 신이 곧 자신의 생존, 그 자체라는 사실을 말이다.” 차빈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기 시작했다. “너한테는 처음부터 반려도, 그리고 마나힘도 없었다. 왜냐하면, 너한테는 신탁 그 자체가 없었으니까.” 차빈은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을 산 채로 뜯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예 차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터져 나오려는 신음소리를 차빈은 이를 사리물고 참았다. “네 이놈!!! 감히 차빈을 사칭하여 차빈가 뿐 아니라, 황가도 능멸한 죄 죽어 마땅하거늘, 하물며 이 황궁에 침입하여 황자의 잠자리를 더럽히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게 뭣들 하느냐?!!! 저 놈을 당장 잡아 무릎을 꿇려라!!” 나누의 그 기세등등한 명령에 차빈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군사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선뜻 어느 누구도 먼저 차빈에게 덤비는 자는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차빈은 제국 이루에서 손으로 꼽는 검사가 아니던가. 차빈은 살기등등한 눈초리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군사들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리고 서서히 주위를 돌아보며 그들과의 거리를 점쳤다. 그 때였다. “흡!!” 군사 하나가 기압소리와 함께 먼저 차빈을 향해 칼을 높이 쳐들었으나 그 칼을 여유롭게 피한 차빈에 의해서 그의 허리는 단 칼에 베어졌다. 군사는 경악과 공포로 가득 찬 눈을 부릅뜨며 차빈을 쳐다보다 이내 꼬꾸라졌다. “그렇게 원이라니, 그럼 해 볼 밖에.” 그리고 그 일을 시작으로 군사들과 차빈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개시되었다. 무딘 칼이나 숫자가 많으니 무시할 수 없는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도리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차빈은 강해지고 민첩해졌다. 그 눈은 살기로 형형하며 눈앞에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베어갔다. 그렇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자신의 망막에 비치는 오직 한 사람을 향해 차빈은 조금씩 나아갔다. 필사적으로 덤비는 차빈을 막기에는 지금의 군사로는 역부족이었다. 차빈에게는 자잘한 상처들은 많으나 치명적인 상처는 없었다. “뭐들 하는 게냐?!!!! 저 놈을 당장 잡지 않고!!!” 다급한 듯, 나누의 노성이 방안을 울렸다. 그 때였다. “모두 멈춰라!!!!” 그 동안 잠잠하던 아후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 아후의 손에는 예서가 있었다. 벌거벗은 예서의 목을 뒤에서 단단하게 끌어안고 아후는 그 목에 날카로운 검을 겨누었다. “멈춰라. 차빈.” 아후의 냉혹한 일갈에 군사들은 칼을 내리고 차빈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차빈은 그런 군사들을 날카롭게 주시하며 예서를 곁눈질로 보았다. 식은 땀을 흘리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예서의 눈동자는 열에 들떠 풀려있었다. 바르작거리며 바로 서려하나, 서 있기도 상당히 버거운 모양이다. 그런 예서가 차빈의 눈에 아프게 박혔다. “네 이 놈 뭐하는 짓이냐?!” 차빈의 갈라지고 탁한 그 음성에는 고통이 절절히 묻어나고 있었다. 한 군데도 성해 보이지 않은 예서를 보며, 이 더러운 이들 눈앞에 그 몸을 드러내는 수치를 당케 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물론, 이 사랑스러운 목을 칠 생각은 없지요. 허나 쓸데없는 건 하나쯤 잘라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 칼을 버리시지요.” 아후는 목을 거누고 있던 칼을 세워 칼끝으로 예서의 몸을 훑었다. 그리고 칼끝을 예서의 상징에 가져다 대었다. “이런 것쯤 없다고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지요. 필요한 건 이게 아니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나누 전하.” 아후는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예서의 상징을 툭툭 건드렸다. 그리고 마치 단칼에 베어내려는 사람처럼 칼날을 바짝 세웠다. 진심이다. “꿇어라.” 그 모습에 차빈은 서서히 손에 힘을 뺐고 팔을 늘어뜨렸다. ‘꿇어라. 처음부터 네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그 필사적인 몸부림 따윈 치워라.’ 차갑고 냉랭한 아후의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그리고 그 한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밀고 들어오는 칼들을 차빈은 막지 않았다. 군사들은 차빈의 손에 힘이 빠진 틈을 타 차빈의 칼을 힘껏 내리쳤고, 차빈이 칼을 놓자, 수십의 군사가 차빈을 억눌렀다. 군사들은 반항하는 차빈의 팔을 뒤로 꺾어 나누 앞에 무릎을 꿇렸고, 차빈의 머리를 발로 내리눌러 바닥에 박았다. “흐흐흐. 아하하하하.” 그런 차빈을 보며 나누는 미친 듯이 그 비열한 이를 드러냈다. “예서!!!” 차빈의 목에서 비통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악!!!” 죽을 듯이 반항하는 예서를 내리 누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차빈의 앞에서 단숨에 예서를 가지리라 생각했던 나누는 그래서 점점 불쾌해 졌다. 자신의 육중한 무게로 꼼짝 못하게 내리누르며, 나누는 강제로 예서의 두 다리를 접어 예서의 비문을 드러내게 했다. 예서를 뒤집어서 넣으면 좀 더 쉽겠으나, 건방지게 입을 놀리던 예서의 절망하는 얼굴을 나누는 보고 싶었다. 비정상적으로 접힌 허리가 꺾이는 듯한, 격한 통증에 예서는 헐떡거렸다. “으윽!!!!” 그러나 악을 쓰며 저항하는 예서의 반항이 너무 커 나누는 삽입이 불가능했다. 그예 나누는 이를 갈며 가노들로 하여금 예서의 팔다리를 붙잡게 했다. “나누!!!!” 눈이 뒤집힌 차빈은 있는 힘껏 몸부림쳤다. 차라리 자신이 저 능욕을 당하리라. 그러나 단단하게 묶인 몸은 자신을 억누르는 군사들의 힘을 뿌리칠 수 없었다. “나누!!! 차라리 나를 죽여라!!! 마나힘을 놔!!! 차라리 나를 범해 다오. 제발......” 점점 자자드는 차빈의 목소리는 물기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애원하는 차빈을 나누는 비릿한 냉소를 흘리며 바라볼 뿐, 그 어디서도 멈출 기색 따윈 전혀 보이지 않았다. “놔!!! 저희들 뭐야?! 이거 못 놔!!! 놔!!!! 이 새끼들아!!! 아악!!” 죽을 힘을 다해 발버둥치는 예서를 가노들이 안간힘을 다해 누르는 동안, 나누가 한 손으로 발기될 대로 발기된 자신의 남근을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 예서의 비문을 더듬거리자 예서의 반항은 극에 달했다. “아악!! 싫어!!” “나누!!!” “비켜!! 이거 놓지 못해!! 아악!!!!” “...........!!!” “윽!!!” 그러나 삽입은 없었다. 발기된 귀두 끝을 꽉 다물린 예서의 비문에 밀어 넣으려는 순간, 나누가 그만 참지 못하고 쏟아낸 것이다. 반항하는 예서에게 고통을 주고자 풀어야 함에도 그대로 밀어붙였던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비켜. 고작 그 정도냐.” 예서는 애널에서 느껴지는 미끈거리는 느낌에 진저리를 쳤고, 애널에 닿았던 나누의 손이나 귀두의 느낌에 구역질이 나와 나누에게 이를 갈며 비웃었다. “이것이 감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나누는 예서의 얼굴을 주먹으로 힘껏 갈렸다. 부들거리는 목소리는 평소에 흉물을 떨며 평온을 가장하던 나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닐 거다.” 거짓말이다. 믿을 수 없다. 차빈 앞에서 이 내가?!!! “다 죽인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예서의 애널을 거칠게 훑는 나누의 손에는 믿지 못하게도 끈적이는 정액이 묻어났다.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는 나누의 눈에는 이미 욕정은 사라지고 오로지 살기만이 등등했다. 나누의 그 모습에 예서를 붙잡고 있던 가노들은 두려움에 떨며 예서를 놓고 뒤로 물러섰다. 예서도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이 더러운 것이.” 분노한 나누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예서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며 그 손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아악!!!!” 예서는 부러진 자신의 팔을 받치고 고통에 몸부림치다 옆으로 서서히 무너졌다. “안 돼!!!” “하아. 하아....” 흐려지는 예서의 시야 속에 들어오는 것은 차빈뿐이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그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을 보며 예서는 흐릿하게 웃었다.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지금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예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울...... 지.... ㅁ................” 예서의 시야는 곧 까맣게 어두워졌다. “그만하시지요.” 예서의 목을 조르던 나누를 말린 것은 아후였다. 그러나 핏발이 선 나누의 눈에는 그런 아후가 들어오지 않았다. 더러운 반항만 하지 않았다면, 자신을 밀어 넣을 수 있었다. 자신 있었다. 차빈 앞에서 그 치욕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죽인다. 나누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죽이겠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이시려고 가지셨는지요.” 아후는 나누의 손목을 잡았다. 차갑게 스며드는 아후의 말과 손길에 나누는 손의 힘을 조금 풀었다. 아후가 뿜어내는 근엄한 기운에 나누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이렇게 편하게 죽일 수는 없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누는 예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기절해 너부러져 있는 예서를 보며 이를 갈았다. 아후는 예서의 목에서 나누의 손을 떼어냈다. 나누는 순순히 예서의 목을 놓아주었다. “예. 전하. 그럴 수는 없지요.” “저 더러운 개는 지하 감옥에 가두어라. 내일 황제 폐하께 직접 아뢸 것이니. 그리고 이것은 아후 네가 직접 길들여라. 반드시. 일주일이다. 알겠느냐?!” “예. 전하. 반드시 그리하겠나이다.” 나누가 분을 삯이지 못해 벌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휘청거리며 나가자, 그 뒤를 군사들이 예서를 부르며 몸부림치는 차빈을 끌고 나갔다. 아후는 한참을 나누와 차빈이 사라진 방문을 보다 천천히 시선을 돌려 침상 위의 예서를 내려다보았다. “마나힘. 당신은 바보이십니다.” 예서의 침상에 앉아 예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예서를 바라보는 아후의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웃음이 있었다. “그래도 더러운 개라 할 땐 통쾌했습니다. 아니요. 사실은 불쾌했습니다. 마나힘 당신에게 더러운 개가 손대는 것을 보는 것이 말입니다. 이상하지요? 저에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왜 그 개가 당신에게 손대는 것에 불쾌해졌는지요.” “................” 아후는 진심으로 예서의 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답은 없었다. 자신의 질문에 그 어떤 대답도 없는 예서를 아후는 조용히 바라보다 몸을 굽혀 예서의 귀에 나직이 속삭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리 되면 계획수정은 불가피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어쩌면 말입니다. 그대는 마나힘으로 태어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후는 예서의 손을 잡고 손등에, 그리고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제 옆에 두겠습니다. 그대를 진정한 마나힘으로 만들어드리지요.” 여전히 대답 없는 예서를 보는 아후의 눈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이것 또한 갚아 드리겠습니다.” 아후는 부목이 단단히 메어져 있는 예서의 다친 팔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예서의 얼굴이나 몸 여기저기에는 상흔과 치료의 흔적으로 가득이었다. 방은 아까 예서가 능욕을 당하던 그 나누의 방이 아닌 자그마하고 수수한 방으로 거기에는 예서와 아후 그리고 침상 머리맡의 작은 촛불만이 있었다. 정적만이 있는 공간에는 약에 취해 이제야 겨우 고른 숨을 내쉬고 있는 예서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그 숨소리에 아후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후는 열로 인해 땀으로 젖은 예서의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넘겨주었다. 잠시 후 아후는 예서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아후님.” 그리고 방 밖에는 무흔이 아후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처리하였느냐?” “예. 감쪽같이 처리했습니다.” 무흔은 고개를 조아리며 짧게 끊듯이 자신 있는 대답을 했다. “잘했다. 이제 황녀는 차빈 손에 죽은 것이다. 자살이면 차빈의 부인(否認)에 분노한 황녀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자 죽은 것이고, 타살이면 차빈 자신이 진실을 덮고자 저지른 일이다. 그러니 차빈은 황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져야겠지.” “예. 아후님.” “그래서 오늘 차빈을 황궁에 불러들인 거고.” 마나힘의 행방을 차빈가에 흘리는 건 쉬웠다. 그러나 그리 쉽게 그리고 감쪽같이 차빈이 본가를 빠져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작은 소란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다. 아니다. 생각해 보면 그 오래된 본가에 아무도 모르는 비밀 통로 하나쯤 없다는 게 더 이상한 것일 수도. “하긴 나라도 그리 하였을 터. 하하하.” 참을 수 없이 유쾌하다는 듯 아후는 소리 내어 웃었다. 거의 소리 내어 웃는 법이 드문 아후의 웃음소리는 맑고 경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무흔은 아후의 그 웃음에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들뜬 소년 같은 미소. 근 십 년 동안 접해 보지 못했던 미소였다. 무흔이 볼 때 분명 차빈의 일 때문은 아닌 듯했다. “아후님?” “무흔.” “예.” “반려를 맞이하려 한다.” “예?!!” 중인은 신탁이 없다. 그래도 그나마 일반 백성과 달리 성인식은 있어 사람대우는 받을 수 있지만, 신탁은 없었다. 그래서 중인은 성인식 후 적당한 시기에 반려를 얻었다. 보통은 하나뿐이었고, 조촐한 혼례식을 신전이 아닌 집에서 치렀다. “아후님?” “놀랬느냐?” “어떤 분이신지요?” 그 동안 반려에 대한 것은 고사하고 여인들에 대해서도 비릿한 시선을 보내던 아후였다. 그렇다고 남색을 즐긴 것은 전혀 아니었다. 아후는 여인들을 종종 안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반려라니? 설마....?!!!! “아후님?!!” “글쎄, 그는 두근거리지는 않아. 그저 한없이 편안하지. 추운 겨울날의 따사로운 햇볕 같다고나 할까. 나는 그 따사로운 햇볕에 꾸벅꾸벅 조는 수탉이 된 느낌이다. 무흔.” “.......그러십니까.” 쉬고 싶으셨습니까. “응.” “더 조여. 더. 더!!!!”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드는 나누로 인해 계집아이는 고통에 몸부림쳐야만 했다. 며칠 전의 괴롭힘으로 아직도 아물지 않은 밑은 이미 헐 데로 헐어 끔찍한 고통을 아이에게 안겨주었다. 그 고통에 아이가 새된 비명을 질러도 아랑곳 않던 나누는 곧 아이의 몸속에 배설했고, 토정하는 순간, 비참하게도 나누의 귀에 자신을 비웃던 예서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나누는 이를 갈며, 아이의 얼굴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치다 둔중한 몸을 빼내었다. 그리고 아이의 몸속에 모형 성기를 깊숙하게 쑤셔 넣었다. “아악!!!” 그예 아이는 아래가 갈기갈기 찢는 고통에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그래도 나누는 분이 풀리지 않아 손목을 돌리며 아이의 속을 휘저었다. 잠시 후 고통으로 깨어난 아이는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나누는 그런 아이를 버려두고, 기절에서 너부러져 있는 사내아이 몸속으로 들어가고자 자신의 손으로 체액으로 더러워진 성기를 잡아 흔들었다. 약기운 때문이었던가. 성기는 곧 힘을 받아 꼿꼿해졌다. 사내아이의 온몸은 나누가 조금 전 물어뜯은 피맺힌 상흔이 가득했다. “헐거워. 젠장.” 사내아이의 몸속을 미친 듯이 드나들면서 나누는 이를 갈았다. 만족이 없었다. 미칠 듯이 타는 욕정은 해갈될 생각도 않고 더욱 나누의 몸을 부채질했다. 이미 침상은 피로 흥건했다. 침상에는 애널이 찢어진 사내아이와 계집아이가 흘린 피로 강을 이루고 있었다. 핏기가 없는 사내아이의 눈동자는 풀린 지 오래였다. 나누는 그런 사내아이를 내려다보며 옆에 있던 단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아이의 유두를 도려냈다. “아악!!!!!” 사내아이는 고통에 발악하며 몸부림쳤다. “좋아! 조여! 더. 더!!!” 급작스레 조여든 애널의 감각을 즐기며 나누는 허리를 흔들었다. 고통으로 울부짖는 사내아이의 얼굴이 점점 예서의 얼굴로 바뀌어갔다. 나누는 흥분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나누는 아직 손에 들고 있던 단도를 사내아이의 나머지 유두에 이번에는 도려내지 않고 칼을 꽂아 돌렸다. 아이는 고통에 까무러쳤다. “좋았어!! 하악!!! 윽!!!” 나누는 그렇게 아이의 몸에 상처를 내어 애널을 조이다가 급기야 아이의 목을 그었다. 거대한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그 순간 아이는 마지막 단말마처럼 애널을 조였고, 나누는 아이의 몸속에 자신을 털어 넣었다. 나누는 몸을 떨며 눈을 감고 그 감각을 음미했다. 죽어가는 아이의 몸속에 나누는 자신의 마지막 씨를 뿌렸다. 지금까지 중에서 최고였다. 침상 위에 같이 있던 계집아이 또한 사내아이의 피를 나누와 함께 받았다. 계집아이는 자신의 옆에서 사내아이가 목이 잘리는 순간 악에 바친 비명을 내질렀다. “허억. 허억.” 침상에서 기어 내려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침상 옆 의자에 털썩 앉은 나누는 쾌락에 풀린 눈동자로 침상 위를 바라보았다. 사내아이의 목에서는 마지막 단말마가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울리고 있었고, 계집아이의 목에서는 찢어지는 듯한, 끔찍한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나누는 피비린내가 나쁘지 않았다. 지독한 암내 같았다. “아주 좋아.” 눈을 까뒤집고 죽은 아이를 보며, 나누는 자신의 가노에게 손짓을 했다. 무슨 말에든지 아무 대꾸 없이 나누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침상노예 중 하나다. 침상노예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오물을 흘리는 죽은 아이의 벌어진 애널에 자신을 박았다. 그러나 주인의 명령에 따라 허리를 흔들었다. 시간(屍姦)이었다. 나누는 그런 모습을 보며 다른 가노가 주는 쾌락을 즐겼다. 그래서 아무도 몰랐다. 계집아이가 피를 흘리며 손에 칼을 들고 엉금엉금 기어서 나누에게 다가오는 것을. 이미 계집아이의 눈은 미쳐 있었다. 계집아이는 엄청난 힘으로 나누의 남근을 빨고 있는 가노를 밀치고 발기할 대로 발기한 나누의 성기에 사내아이의 피가 묻어있는 칼을 있는 힘껏 나누의 몸속에 깊이 박아 넣었다. 잠시 후, 방안은 미친 계집아이의 웃음소리와 나누의 비명소리로 가득했다. 황궁 내(內) 신전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히루나였다. 히루나는 레탁크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 걸음은 멈춤 없이 곧장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인간의 고통과 원한, 그리고 한숨이 고인 탁한 지하 감옥은 히루나 같은 성수한테는 극약과도 같은 곳이건만 히루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걸어 들어갔다. 지독히도 탁한 기운이 히루나를 옥죄었다. 그러나 히루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신전 안에 있는 듯 가벼운 걸음이었다. 히루나가 가는 곳에는 그 어떤 생명도 생기를 품을 수 없었다. 죽음을 친구로 삼아야 했으며, 히루나는 그렇게 모든 생명들을 거두었다. 그리고 황궁 가장 깊은 곳. 그 어떤 빛조차 견디지 못하고 삼켜지는 곳으로 거침없이 히루나는 다가갔다. “................” 칠흑 같은 어두운 지하 감옥 안에서 형형한 빛을 발하는 건 차빈의 눈동자뿐이었다. 차빈은 지독히 상처 입은 짐승의 눈동자로 조금의 미동도 없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 차빈의 기운을 느끼며 히루나는 잠시 말없이 쳐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어나시지요.” “...................” “일어나시지요. 차빈님. 모시러 왔습니다.” 차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히루나는 그런 차빈에게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모시러 왔습니다.” “...........” 차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또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한, 그런 몸짓이었다. 그리고 소리 없이 히루나의 뒤를 따르던 차빈은 지하 감옥의 계단 끄트머리에서 그제서 윤기 없는 메마른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마나힘 없이 가지 않는다.”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히루나는 작게 끄덕였다. “어찌 찾았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 “.......................”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다행히도 기적처럼 예서에게 가는 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없었다. 조용한 적막만이 칠흑 같이 어두운 대기에 충만할 뿐이었다. “지금 황궁은 오 황자의 죽음으로 소란스럽습니다. 이곳은 다행히 그의 거처와 사뭇 떨어져 있는 곳이라 경계가 소원하군요. 하긴 이쪽은 황족들이 머무는 거처가 아니니 당연한가요?” 차빈은 히루나가 언급한 나누의 죽음에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 “.......................” 그 후 차빈이나 히루나나 그 누구도 입을 굳게 다물고 열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만이 그 둘을 감쌌으나 그 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차빈과 히루나는 암묵적인 약속처럼 침묵으로 묻고, 그리고 답을 했다. 침상 위의 예서는 더욱 작아져 있었다. 그런 예서의 얼굴을 차빈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쓰다듬었다. 예서는 그 손길에도 깨지 않고, 그저 약한 숨만을 내쉬었다. 열이 심한 듯 몸은 땀으로 축축했다. 그리고 예서는 여전히 나신이었다. 나신 곳곳은 상흔과 치료의 흔적으로 빈틈이 없었다. 조심스레 그런 예서를 눈으로 훑던 차빈은 더욱 삼가는 손길로 어루만졌다. 예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런 차빈의 손은 마치 우는 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예서.” 곧 차빈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마치 자신의 생명인양 예서의 손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미안하다.” 차빈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예서를 시트로 감싸 안았다. 다친 예서의 팔에 혹여 무리라도 갈까 조심 또 조심했다. 스윽. 차빈이 방문 가까이 다가가자, 소리 없이 방문은 열렸다. 차빈의 기척을 느낀 히루나가 연 것이다. 히루나와 차빈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차빈은 히루나를 지나쳐 방을 빠져나왔다. “당신을 낳은 아비로서 지금 당신에게 이름을 부여합니다.” “....................” “무이.” “.....................” “그것이 당신의 이름입니다.” “...............” “.......................” “거절한다.” 레탁크 안에서 예서를 안아 들고 서 있는 차빈은 단호했다. 히루나를 보는 서늘한 차빈의 눈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도 그것이 당신의 이름입니다. 제 속죄의 이름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당신을 기른 차빈에 대한 속죄, 당신에게서 어미를 빼앗은 제 속죄의 이름입니다. 저는 끝까지 당신을 차빈이라 부르고 싶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그 이름으로.” 차빈이 떠난 텅 빈 레탁크를 바라보며 내는 히루나의 나직한 말은 그건 아무도 듣는 이 하나 없는 너무도 쓸쓸하고 공허한 소리였다. “하아, 하아.” 차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들이 있는 곳은 대신전 성수의 못이었다. 차빈의 눈에 호우가 달빛만을 의지해 못 가를 초조하게 서성이는 것이 보였다. 의식이 없는 예서를 안고 헤엄쳐 차빈이 못가로 다가오자 호우가 황급히 두 손을 내밀었다. 차빈은 잠시 그런 호우를 쳐다보다 마지못한 듯 예서를 넘겼다. 그러나 못에서 오르자마자 빼앗길세라 예서를 받아 안았다. 차빈으로서도 의식이 없는 예서를 데리고 오는 일은 지극히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히루나님은요?” “모른다.” 망연자실(茫然自失). 차빈의 냉정한 대답에 눈을 끔벅이며 호우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히루나의 간곡한 명령을 잊지 않았기에 호우는 묵묵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차빈을 잠시 바라보다 낮게 숨을 토해내며 몸을 돌렸다. 차빈은 예서를 안아 들고 앞장서 걷는 호우의 뒤를 따랐다. “조심하세요. 턱이 있습니다.” 신전의 관례답게 신을 신지 않고 있는 호우의 옷깃이 스치는 소리와 주의를 주는 소리를 따라 차빈은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빛 하나 없는 쾨쾨한 먼지내와 지독한 박쥐 배설물 냄새가 차빈의 코를 찔렀다. “머리 조심하세요.” 마치 깜깜한 어둠 속을 투시라도 하는 듯 거침없이 걷는 호우를 따라 차빈은 미로와도 같은 길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히루나님께서 급작스럽게 준비를 부탁하셔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어요.” 차빈은 예서를 안아 들고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벽에 횃불 하나가 걸려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마른 모포와 물병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방신의 터입니다.” “고맙다.” “저, 내일은 요기할 거랑 갈아입을 옷도 좀 마련해 오겠습니다.” 차빈은 호우를 향해 고마움의 표시로 이번에는 말없이 고개를 작게 숙였다. 그런 차빈의 모습에 당황하며 마주 고개를 숙인 후, 호우는 급히 왔던 길로 돌아섰다. 호우의 소리가 사라지자 주위는 횃불 타는 소리뿐, 적막했다. 차빈은 서둘러 자신의 옷을 벗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예서를 싸고 있던 시트를 벗겼다. 모포는 다행히도 두 장이라 예서를 춥지 않게 싸맬 수 있을 듯싶었다. 차빈은 바닥이 차가운 돌이라 그 기운이 혹 아픈 예서에게 고통이 될까 저어하여 마치 아기를 안듯이 예서를 무릎에 안았다. 그리고 차가운 예서의 발을 주무르며, 예서의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차빈의 젖은 머리카락이 차빈의 온몸에 달라붙어 찬 기운을 주었으나, 차빈은 괘념치 않았다. 그런데 예서의 머리카락을 넘기던 차빈의 손이 갑자기 뚝 멈춰졌다. 감정이 죽은 얼굴로 차빈은 물끄러미 예서를 들여다보다 가만히 끌어안으며 그 자신의 얼굴을 예서의 머리에 묻었다. 그리고 잠시 후, 차빈의 어깨가 흔들렸다.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횃불이 타는 소리와 함께 밤을 지새웠다.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고여 있는 공간으로 스리슬쩍 가만히 들어오는 대기의 희미한 흔들림에 따라 이리저리 춤을 추는 횃불의 그림자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만들뿐이었다. 더불어 소리라고는 그 작은 횃불이 탁탁거리며 타는 소리뿐이었다. 차빈은 딱딱하게 굳은 밀전병과 차갑게 식은 음식들을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차빈은 깔깔한 입안에서 따로 노는 음식들이 짓이겨져 끈기가 생기고 목으로 넘기기 쉬운 상태가 될 때까지 꾸역꾸역 씹고 또 씹었다. 그리고 그런 차빈의 품에 예서가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예서는 잠을 자고 있는 건지 아니며 고통에 늘어진 몸을 그냥 차빈에게 내맡기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차빈의 작은 움직임이나 손길에도 귀찮고 아픈지 무심결에 뒤척였다. 낮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는 입술은 하얗고 꺼칠하게 일어나 있었다. 차빈은 예서를 조심스럽게 곧추 세웠다. 그러자 예서는 차빈의 목에 얼굴을 묻고 깊은 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을 들어올리기도 버거워 보였다. 차빈은 그런 예서의 머리를 손으로 받치며 예서의 입술을 벌렸다. 그러나 차빈의 혀와 함께 입안으로 들어온 이물질로 인해 예서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내저었다. “넘겨라.” 차빈은 예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넘겨.” 예서는 차빈의 단호한 말에 마지못해 음식을 넘겼다. 열로 인해 부은 예서의 목으로 음식들은 통증을 남기며 껄끄럽게 넘어갔다. “잘했다.” 예서의 땀에 젖은 이마에 자신의 볼을 비비며, 차빈은 어색하고 딱딱한 미소를 지었다. 차빈은 끌어안은 예서의 등을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쓸었다. 호우는 하루에 한 번 물과 온기가 식은 음식들을 가져왔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차빈이나 예서에게는 부족하지 않았다. 둘 다 음식을 넘길 상태가 아니었기에 대체로 항상 남았다. 음식을 남기는 날에는 호우가 염려스러운 눈길로 그 둘을 보곤 했지만, 음식을 권하지는 않았다. 나이가 어린 호우가 볼 때도 목으로 무언가 넘어가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새 황제의 등극과 민간에 퍼져있는 해괴한 소문까지, 그 모든 게 이 두 사람에게는 왠지 어려운 문제 같아 보였다. 히루나가 없는 현재 호우 자신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그저 이 둘에게 대신전 부엌에서 몰래 빼낸 음식물을 가져다주며, 가만히 히루나를 기다릴 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바깥 근황이나 제국 이루에 대한 차빈의 물음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이 없기에 고개를 흔드는 일이 고작이었다. “먹어야 한다.” 차빈은 고개를 젓는 예서의 턱을 잡고 억지로 예서의 입안으로 음식물을 넘겼다. 예서가 차빈을 밀어내는 모양새로 볼 때 예서는 꽤나 싫은 듯 보였으나, 차빈은 막무가내였다. 예서는 차빈의 끈질김에 마지못해 받아 넘겼다. 차빈은 자신이 준 음식물을 넘긴 예서의 입가를 어루만졌다. 엷은 미소가 차빈의 입가에 걸쳐졌다. 부드럽고 한없이 조심스럽게 차빈은 예서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예서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눈은 열에 들떠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몸 여기저기의 피멍들은 더욱 꺼멓게 부어올라 만지기도 무서울 지경이었다. 차빈은 그런 예서를 바닥에 눕히기 싫어 품에 안고 조심 또 조심했다. 예서를 위해서기도 하지만, 잠시도 끌어안고 있지 않으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쪼르륵. 차빈이 물을 따르자 낡아 꺼뭇하게 세월의 때가 낀 나무잔의 깨어진 틈에서 물이 졸졸 새어나왔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예서도 거부하지 않았다. 밍밍한 물 또한 음식물처럼 예서의 목에 고통을 남겨주었으나, 순식간에 넘어갔다. “싫으냐?” 차빈은 예서가 음식을 집으려는 자신의 손을 막자, 멈칫하며 예서에게 물었다. 예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먹어 두어라. 그래야 빨리 일어나지.” “...............” 예서는 말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런 예서를 보며 차빈은 미안하고 어색한 손짓으로 조심스레 이마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달싹거리듯 입을 열었다. “많이 아픈가?” “.............” 예서는 대답도, 그리고 고개의 작은 끄덕임도 없이 차빈의 목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예서의 작고 약한 숨이 차빈의 목을 간질였다. 차빈은 낮게 웃으며 예서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많이 아파?” “.........응.” 부러진 예서의 팔에 감겨있는 부목을 만지는 차빈의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깃털 같은 그 손길은 닿을 듯 말 듯 삼가 조심스러웠다. “움직여 보아라.” “.......” 차빈은 예서의 새끼손가락의 손톱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작은 원을 그리며 어루만졌다. 예서는 새끼손가락을 살짝 까닥였다. “또.” “...........” 차빈은 이번에는 예서의 약손가락의 손톱을 매만졌다. 예서는 자신의 약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차빈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어렸다. 그렇게 예서의 엄지손가락까지 차빈은 무언가를 확인하듯이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다행이다.” 차빈은 자신의 커다란 손위에 예서의 다친 팔의 손을 올려놓았다. 부목을 고정하는 천은 이미 오래 전 새까맣게 때가 타 더러웠으나 새로 갈아줄 만한 것이 없었다. 호우는 음식과 물을 가져오기도 버거워 보였다. 부스럭. 인기척이다. 차빈은 평소와는 사뭇 다른 인기척에 몸을 곧추 세우고 긴장했다. 예서를 끌어안은 차빈의 몸은 팽팽하게 곤두섰다. 잠시 후, 호우 뒤로 한 여인이 따라 들어왔다. 호우는 들어서자마자 한 발자국 옆으로 물러나 여인에게 자리를 내 주었다. 여인은 그런 호우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의 표를 하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담아였다. 차빈 부친의 헛혼의 상대였던 담아를 보는 차빈의 눈은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 “...................” 차빈도 담아도 한동안 묵묵히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여인의 눈 속에 그 어떤 적의도 없는 것을 확인한 차빈은 안도의 한숨을 낮게 내쉬었다. 그리고 담아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런 차빈을 보는 담아의 입가는 씁쓸한 미소가 그려지고 있었다. “마나힘께서는?” “많이 안 좋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무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담아의 목소리는 무덤덤하게 느껴질 만큼 평온했다. 예전 차빈 본가에서 얘기를 나눌 때와 다름없는 담담한 목소리였다. 여전히 공손했다. 차빈은 시선을 예서에게서 담아로 옮겼다. 담아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예를 표하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걸 어찌 저한테 고하십니까. 본가에는 모아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 여인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혼인한 본가의 집에서 내침을 받았다는 말이다. 담아의 말에 잠시 차빈의 눈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이내 씁쓸한 맛이 우러나는 미소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런 차빈에게 담아는 고요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부담스러웠겠지요. 인간이란 참 그렇더군요. 아니, 이번 경우에는 어리석은 범부들이라고 해야 하나요. 차빈가의 씨를 받을 수 있다 하여 등을 떠밀더군요. 그런데 이제는 차빈가의 씨를 받았다 하여 외면하더이다.” “..............” “후후후. 그게 세상의 이치겠지요. 작은 불똥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는 그런 한미한 집안이니까요.” “죄송합니다.” “차빈님께서 왜요? 아닙니다.” 담아는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께서 받아들여 주신다 하니, 돌아가려 합니다. 참으로 작은 시골 마을이지요. 평화로운 곳입니다.” “.............” “같이 가지 않으시렵니까? 황성을 나가셔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본가 사람들은 지금 철저한 감시 하에 있어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더군요.” “어찌 도와주시려고 하십니까. 위험합니다.” 담아의 뜻밖의 제안에 차빈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중히 거절했다. 그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도 안 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담아를 끌어드릴 수는 없었다. “‘왜냐?’ 라 하시면, 글쎄요. 제 아이와 같은 뿌리를 가지신 분이기 때문이라 하면 건방지다 꾸중하시겠습니까. 이 아이는 이제 제 본남편의 자식이 아니니, 차빈 어르신의 씨라 불려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 어리석은 계집은 그리 생각이 들더이다. 차빈가와 연관되어 지고, 차빈님과 형제라 칭함을 받기는 감히 바라지 않나이다. 분명 차빈님은 이 아이의 주인이십니다. 제가 누구의 반려인가는 잊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외람된 말씀이오나, 어르신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소인에게 사내의 따스한 정을 알려주신 분이십니다. 갚고 싶습니다.” “...........” “차빈님은 돌아가신 차빈 큰 어르신을 참 많이 닮으셨다고 하더군요. 모아나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주간 나이도 그리 말하더군요.” “...................” “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달이 모두 자취를 감춘 짙은 암청색의 어두운 밤하늘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하늘의 별들이 땅 위에 희미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흐릿한 그림자는 차가웠으나 고요했다. 그리고 인기척은 고사하고 개미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는 어두운 거리를 몸을 낮추고 발소리를 죽이며 그늘에 숨어 움직이는 인영(人影)들이 있었다. 그들은 차빈과 예서, 그리고 그들 앞서 게걸음으로 조심스럽게 걷는 호우였다. 서늘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호우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그들의 귀에는 자신들이 내는 소리가 천둥소리만큼 커다랗게 들리는 듯, 자신들의 발걸음 소리에도 종종 움찔거렸다. 그들은 가빠지고 있는 자신들의 숨소리를 있는 힘껏 내리누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차빈의 품에는 예서가 안겨 있었다. 잔뜩 구부리며 몸을 낮추고 걷는 차빈의 품이 불편한지 예서의 입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차빈은 걸음을 멈추고 벽에 붙어 서서 예서를 고쳐 안았다. 그리고 예서의 이마에 자신의 볼을 비비며 달랬다. 예서는 아직도 미약하나 열이 남아있었다. 깨어날 법도 한데, 예서는 눈을 뜨지 않는다. 그저 잠결처럼 잠깐잠깐 눈을 뜨는 것이 고작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원인을 전혀 모르겠기에, 맥을 놓고 있는 예서의 걱정으로 차빈은 하루하루 바짝바짝 속이 타들어갔다. “괜찮으세요?” 한껏 목소리를 낮추며 묻는 호우의 물음에 차빈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황성을 둘러싼 두 개의 성벽 중 안 쪽의 성벽은 마차 두 대가 너끈하게 지나다닐 정도로 넓었다. 그리고 그런 성벽 아래에는 허물어질 듯한, 허술한 집들이 있었다. 시내에서 비껴 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리고 지금 일행이 가고 있는 곳도 바로 그 중 한 곳이었다. 차빈들이 바삐 걸음을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주위는 희뿌옇게 밝아지고 있었다. 황성이 깨어날 시간이 된 것이다. 어두움을 틈타 움직여야 했던 탓에, 대로들을 피해 돌아와야 했기에, 시간을 더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조급한 걸음을 서둘렀다. 낯선 인영(人影)이었다. 초조하게 서성이던 인영에 잠시 주춤하던 그들은 곧 인영의 주인을 알아보고 그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 후치는 차빈들이 내는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그들을 알아본 순간 그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환해졌다. “이리로.”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차빈의 품에 있는 예서를 보자, 후치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후치는 급한 걸음으로 차빈들을 허름한 헛간으로 안내했다. 입구 없이 나무로 얼기설기 벽을 만들고, 그 위에 밀 더미를 올려놓은 곳은 급조해서 만들었다기보다는 원래부터 그렇게 지어놓은 듯 보였다. 생활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 마차 한 대가 있었다. 후치는 긴장된 걸음으로 곧장 마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마차 문을 재빨리 열고 차빈을 돌아보았다. 차빈은 망설임 없이 성큼 마차 안으로 몸을 숨겼다. 호우는 그들이 들어선 마차 주위를 서성이며 초조하게 헛간 밖의 동정을 살폈다. 마차는 두 세 사람이 운신할 정도로 그리 크지 않았다. 곧바로 차빈 뒤를 따라 들어온 후치는 마차 문을 단단히 잠그고, 바닥에 얼른 야우크의 털을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하얀 천을 까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차빈이 망설임 없이 바로 그 위에 예서를 눕히자, 후치는 촛불을 켜서 예서의 머리맡에 놓았다. 흐린 빛 탓인가. 창백한 예서의 얼굴은 더욱 아파 보였고, 예서의 몸 곳곳에 나있는 상흔들이 더욱 선명해 보였다. 후치는 천천히 예서를 훑었다. 후치의 얼굴은 경악으로 서서히 굳어져 갔다. 그러나 곧 의원답게 감정을 추스르고, 담담한 표정으로 예서를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팔은 잘 고정되어 있는 것이 꽤 솜씨가 좋은 자로군요.” 후치는 예서의 팔을 살피며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잘못 처치하는 경우, 평생 후유증이 남는 것이 골절이다. 그러므로 골절에는 꽤나 고도로 숙련된 손길이 필요하다. 후치가 보더라도 예서를 치료한 사람은 보통의 솜씨는 아니었다. “열이 심한데, 혹여 혈변이나 피를 토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아니. 없었다.” “어디 통증을 심하게 호소하시거나 심하게 불편해 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저리거나, 뭐 그런 증상도요?” 차빈은 짧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 며칠 상간 차빈이 조심스레 매만질 때 예서는 그다지 특정 부위를 아파하지는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과는 달리 차빈의 눈은 심한 걱정이 스며있었다. “일단은 보기보다 심하게 상하신 곳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 모르니 저는 이대로 본가로 돌아가서 필요한 약을 좀 챙기겠습니다. 담아님께서 홀몸이 아니신지라 의원 하나를 딸려 보내 달라 하셨기로 제가 가기로 했습니다. 물론 그건 구실에 불과한 거고 저야 작은 마나힘 때문이지요. 그 동안 차빈님께서는 마나힘을 모시고 이곳에 숨어 계십시오. 마차는 아침이 되면 본가를 들려 담아님을 태우고 황성을 뜰 겁니다. 그리고 힌두아님과 마힌님은 후반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두 분이 함께 움직이지 않은 것은 짐작하시겠지만, 고작 헛혼의 대상자가 돌아가는 길에 차빈가 최고의 칼잡이들을 딸려 보낸다는 것은 너무 수상하니까요.” 후반은 황성에서 말로 사흘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다. 차빈은 후치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모아나님의 전언입니다.” 모아나의 이름을 듣자 고뇌의 빛이 역력한 차빈의 눈꺼풀이 힘에 겨운 듯, 천천히 감겼다. 그러나 곧 자신의 신호를 기다리는 후치에게 담담하고 짧게 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차빈가 수장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안의 어른인 모아나가 어찌 지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겠는가. “지금은 아무 생각 마시고 일단 몸을 보존 하시는 것에 집중하라 당부하셨습니다. 돌아가신 차빈 어르신을 잊지 말고 그 분이 얼마나 차빈님을 소중히 여기셨는지 기억하라 하셨습니다.” 차빈의 눈가가 바르르 흔들렸다. 모아나의 뜻을 차빈은 알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차빈가의 수장이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차빈가의 존폐가 더 큰 우위를 점할 것이다. 모아나의 전언 속에 담긴 뜻은 해괴한 소문의 진위를 따지다 지지멸렬 무너지지 않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그 건 나중에 물어도 늦지 않는다. 그러나 후치의 다음 말에 차빈은 가슴이 막혔다. “그 분이 아버지이심을 잊지 말라 하셨습니다. 차빈가의 수장은 돌아가신 차빈 어르신이 정해주신 그 분의 아드님뿐이니 이 점 깊이 명심하라 하셨습니다. 모주간도 같은 말씀이셨습니다.” “알았다. 그리 하겠다 전하거라.” 막힌 말문은 울컥 솟아오르는 뜻 모를 감정과 함께 삐거덕거리며 열렸다. “이곳으로.” 다른 마차와 같이 이 마차에도 오른 쪽 창문 아래에 너른 턱이 있어 사람이 앉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후치는 거기에 덮여있는 두꺼운 천과 덮개를 치웠다. 그런데 거기에 뚜껑이 있었고, 텅 빈 공간이 준비되어 있었다. 비록 한 사람이 바로 누우면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곳이었지만 분명 몸을 숨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건...?!” 차빈은 후치를 돌아보았다. 귀족가나 행세께나 하는 집안의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이런 마차에는 의자 용도로 사용하는 턱에 아름다운 조각으로 장식할 뿐 굳이 수납공간을 만들지 않았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반 서민들이 몰고 다니는 마차와는 천양지차였다. “누가 고쳤는가?”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오랫동안 차빈가를 위해 일해 온 과묵한 사내입니다. 아무래도 소문이 새어나가면 곤란한 정도로 끝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민간에서 마차를 빌린 것처럼 했습니다. 개조도 황성 밖에서 몰래 하게끔 했습니다.” 생각에 잠겨 그곳을 내려다보는 차빈에게 후치는 나직이 고했다. 차빈이 염려하는 문제를 눈치를 챈 것이다. 황제의 칙령에 의해 차빈은 지금 황녀 살해범으로 지목된 실정이기에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차빈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일단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알았다.” 공간은 보기보다 더 좁았다. 차빈이 눕자 조금의 틈도 없이 꽉 들어찼다. 보는 이는 무척 답답해 보였건만, 차빈은 아무렇지 않은 듯 누워서 후치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런 차빈에게 후치는 낑낑거리며 예서를 안겨 주었다. 세상에는 같은 사내를 번쩍 들고 다니는 사내가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차빈은 조심스레 예서를 자신의 위로 포개 안았다. 그리고 헝클어진 예서의 머리를 넘겨주며, 뻣뻣한 목을 들어 예서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 그들을 잠시 내려다보던 후치는 예서의 온기가 묻어있는 천을 삼가 조심스럽게 예서에게 덮어 주었다. 차빈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차빈은 천천히 눈을 떴다. 낮게 들리던 후치의 발소리는 이내 사라졌다. 주위는 아무 것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고, 오직 느껴지는 건 예서의 숨소리와 온기뿐이었다. 한없이 적막했다. 피부에 와 닿는 공기가 차빈에게 모든 것을 선명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그건 단순한 공기가 아니었다. 차빈은 모든 것이 멈춰버린 그 곳에서 나와 지금 현실에 서 있는 거다. 흐름 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차빈은 예서를 끌어안았다. 발가벗겨 내몰린 듯한, 혼란과 치욕 그리고 공포라 불리어도 좋을 불안감. 그런 소용돌이치는 감정 한가운데에 예서가 있었다. 영원 전부터 그리고 영원 후까지 자신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했다. 이곳에, 그리고 자신에게 속해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과 무관한 사람이라고,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나누가 히루나를 들먹인 순간, 차빈 자신을 제일 먼저 강타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른 것도, 차빈가가 떠오른 것도 아니었다. 차빈은 다시금 예서를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말도 안 된다. 이는 내 것이다. 덜컥.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핏 잠이 들었던 차빈은 화들짝 놀라며 깼다. 주위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러나 곧 차빈은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고 예서를 살폈다. 다행히도 예서는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차빈의 입에서 안도의 숨이 낮게 흘러나왔다. 몸에서 힘을 빼고 마차의 흔들림에 차빈은 자신을 맡겼다. 아낙네들의 부산한 소리, 공동 화장실을 이용하는 듯한, 시끄러운 소리, 아이들의 짱알거림과 큰 소리로 그런 아이들을 나무라는 소리가 규칙적인 마차 바퀴의 소리와 더불어 차빈의 귀로 들어왔다. 그건 차빈이 이제껏 살면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소리였다. 그리고 마차는 어느덧 본가에 이르렀는지 멈춰 섰다. 마차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부산한 소리를 들으며 차빈은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그러나 다행히도 마차는 곧 출발했다. “지금 출발했습니다. 조금만 참아 주세요.” 담아는 턱에 앉아 살짝 가볍게 두드리며 차빈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마차는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다시금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목소리와 여러 개의 말발굽 소리가 차빈의 귀에 선명히 들렸다. 그리고 마차는 다시 한 번 더 멈춰 섰다. “멈춰라.” 커다랗고 껄껄한 사내의 목소리가 마차를 세웠다. 마부와 사내의 두런거리는 소리들이 차빈의 귀에 들렀으나 주위의 시끄러운 소음으로 인해 그 내용은 자세히 들을 수 없었다. 그저 알 수 있는 건 지금 성문을 통과하려 한다는 것뿐이었다. 드디어 성문인 것이다. 차빈은 가슴에 바위를 얹은 것처럼 답답했다. 작게 심호흡을 들이쉬며 내쉬기를 반복하다 차빈은 아예 눈을 감았다. 그 때였다. 커다란 인기척이 나더니 마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차빈의 숨이 그 소리에 맞춰 덜컥 멈췄다. “실례를 좀 범하겠습니다.” “수고가 많으시군요. 달거리 중이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듯하니, 송구하나이다.” 차분한 목소리로 담아는 남자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흠흠. 황성 친척집을 방문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시라고요.” 사내는 성문을 지키는 일반 군인이 아닌 계급이 꽤나 있어 보이는 차림이었다. 사내는 담아의 ‘달거리’라고 어려워함도 없이 또랑또랑 내뱉는 말에 당황한 듯싶었다. 여인의 달거리는 부정한 거라 하여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제국 이루의 오랜 관습이었다. 심지어 달거리 중인 여인은 부엌에도 드나들지 못했다. “예.” 사내는 다시금 밖에서 마차 안을 휙 둘러보다 이내 담아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물러섰다. 멈췄던 마차는 곧 다시 달리기 시작했고, 차빈은 그제야 멈추었던 숨을 내쉬었다. 그 후 마차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황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늘이 한없이 청명했다. 신의 예정 : the plan of GOD (1부 끝) ? 2부는 동인지 ?